
339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7월 25일)
선행(善行)을 일상화 하며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이 일이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선행은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을 가져오는 태도이자 결정이기 때문에 좋은 사람이 되는 선행을 실천하기 힘들지 않다고 생각한다. 선행은 평범하다. 그것은 한 번의 미소로 시작한다. 이 생각은 레베카 라인하르트의 책, <<철학이 깊을수록 삶은 단순하다>>(장혜경역)을 읽으면서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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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화두는 '선의 평범성'이다. 행복이란 인생의 매력 가운데 하나이다. 종류도 참 다양하다. 행복은 금방 기분을 띄운다. 그런 행복은 빠른 행복이다. 빨리 오지만 그만큼 가는 속도도 빠르다. 그 곁에는 조용하고 나직하며 느린 행복이 존재한다. 느린 행복은 볼품없지만 대신 고장이 잘 안 난다. 문제는 느린 행복은 쉽게 '얻지' 못한다. 빠른 행복은 엄청나게 예민해서 빠르게 등락한다. 그러나 느린 행복은 윤리적 태도를 기초로 삼는다. 선행을 할 때마다, 행동과 도덕을 결합할 때마다 조금씩 빠른 행복에서 독립한다. 선행을 자주 할수록 느린 행복이 사라진다. 결핍감이 줄어든다. 불안감도 상실감도 줄어든다.
윤리와 느린 행복이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류는 오래전부터 깨우쳤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리스 철학자들은 느린 행복에 이름을 붙여주었다. 바로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유다이모니아) 이다. 지금 우리들의 삶의 전 국면을 자본이나 돈이 잠식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시대 대부분의 직업은 소외된 노동을 기반으로 한다. 여기서 소외는 삶의 본성과 괴리되어 있다는 뜻이다. 누군가를 이겨야 하고, 자신을 눌러야 하고, 맘에도 없는 말과 행동을 해야 하고, 억지로 웃어야 하는 등, 이런 것을 우리는 소외라고 한다. 생존과 자립을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우리는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그 통로에서 출구를 찾을 수 없다. 나에게도 좋고 남에게도 좋은, 지금도 좋고 나중에도 좋은, 청년에게도 좋고 노년층한테도 좋은 그런 활동을 찾아야 한다. 탈주하여 방향을 바꾸고, 배치를 다르게 하는 변화를 시도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빛이 보인다. 그게 우주의 원리라 고미숙은 말하였다. 내가 원하지 않는데, 길이 열리는 경우는 없다. 탈주하여 방향을 바꾸고, 배치를 다르게 하는 변화의 길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유데모니아(eudaimonia) 아닐까? 이 말은 좋은 삶(good life)로 번역 될 수 있다. 이 말은 삶의 의미와 가치에 주목하는 개념으로, 단순히 삶에 대한 평가나 감정 상태보다 더 넓은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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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D에서 정의하는 행복이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면서 자신의 경험에 대한 정서적인 반응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다양한 평가를 포함하는 건강한 정신 상태"라 말한다. 그리고 행복에 대한 측정은 인지적 평가인 '삶에 대한 만족도', 정서적인 측면인 긍정적, 부정적 정서감, 마지막으로 미래적인 관점에서 삶의 목적이나 의미, 가치를 측정하는 유데모니아 항목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 이 말은 100% 다 맞는 말은 아니다. 행복이란 맛있는 거 먹고, 일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는 것과 관련된 것들을 많이 생각하지만 이와 같은 소소한 행복도 삶에서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 있을 때만 약속한 행복을 겨다 준다. 우리가 흔히 소확행(사소한 것에 확실한 행복)을 이야기 한다. 이 말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한 말이다. 일상의 작은 일들이 주는 행복이 그가 누리는 행복의 전부가 아니다. 큰 행복에 빠져 있다가 작은 행복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작은 행복을 연료로 큰 행복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소소하고 작은 행복이 그의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자잘한 행복이 전부인 줄 알면 하루키에게 속은 것이다. 소확행이 전부인 젊은이는 자기의 포부나 꿈이 없이 자본주의의 부스러기나 먹으며 얻는 심리적 만족감이 행복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어제 최진석 교수의 한 인터뷰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유다이모니아(eudaimonia, 에우다이모니아)도 행복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이 말은 자신을 존재의 수준에서 차별화 시키는 삶의 목적을 각성하고, 이 목적을 현재 자신의 삶과 일로 가져와서 실현시키는 과정을 의미한다. 또한 현재 자신의 삶에서 그 목적이 조금씩 실현되어 자신이 성장하고 성숙해지고 결과적으로 '번성'하는 체험을 의미한다. 번성과 성숙은 고사하고 우리 삶이 지속적으로 쪼그라드는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런 본질적인 행복과 차별되는 순간적 쾌락을 가져다 주는 소확행의 행복을 아리스토텔레스는 '헤도니아(hedonia)'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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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도니아는 쾌락이다. 응원하는 팀이 이겼을 때, 복권에 당첨되었을 때 느끼는 기쁨이고, 유데모니아는 명상 같은 데서 오는 행복이다. 유데모니아는 오랜 훈련과 연습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바르게 살 때만 가질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가치, 의식이 조금 더 높은 곳에서 위치하면 그것 때문에 더 삶이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런 삶의 목적을 각성하지 못한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 우리가 행복의 원천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소확행은 위에서 말한 유데모니아가 전제되어야 행복을 가져다 준다. 예를 들어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에서 여행을 즐기는 삶은 소확행이고, 열심히 일한 당신과 관련된 부분은 여행을 더욱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유데모니아이다. 열심히 일함을 통해 스스로 성장체험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매일 여행만 다닌다는 것은 지루한 고역이 될 수 있다. 소위 '불금'이 기다려지고 즐거운 이유는 주중에 유데모니아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내가 바나나를 싫어하는 이유는 과일 껍질을 벗기는 수고가 들어가지 않기 때문과 같다. 자신의 수고 후에 얻은 소확행이 더 값지다. 마치 주요리를 먹지 않고, 디저트만 넘게 되는 상황과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재력과 체력 그리고 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유데모니아 없는 소확행을 지속적으로 즐길 수 있더라도 그 소확행은 결국 햇빛과 같다. 햇빛이 쨍쨍한 날을 갈망해도 매일매일 해가 쨍쨍 뜨는 삶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삶은 사막화되어 금방 황폐화된다. 그러니 삶의 목적을 자기 일과 삶을 통해서 실현시키는 성장체험인 유데모니아가 행복의 본질이다. 결혼의 경우도 두 부부가 결혼생활을 통해 서로 성숙시키는 유데모니아가 끊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서로에 대한 유데모니아 체험을 할 수 없다면 결혼생활은 그냥 지루한 일상에 불과할 수 있다.
돈, 명예, 권력 등을 획득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돈, 명예, 권력을 획득하면 획득한 상태를 당연한 상태로 받아들이는 데 걸리는 몇 주 정도만 행복하다. 하지만 새로운 상태에 적응된 후에는 더 나은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서 기대치를 높이는 톱니바퀴적 성향 때문에 점점 더 큰 것을 얻어야 행복해진다. 얻은 대가로 짧게 행복한 기간을 지내다 더 긴 기간 동안 불행한 삶을 사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톱니바퀴 효과"라 한다. 사막 효과란 말도 있다. 예를 들어 결혼 생활의 경우와 같다. 돈, 명에, 권력을 포기하지 못하면 이것들도 매일 내리쬐는 햇볕이 되어 삶을 지속적으로 사막화 시킨다.
행복은 자신의 성장 체험과 직접 관련을 맺지만 자신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성장체험을 한 경우에도 이어진다. 자신 때문에 세상이 더 행복해지고, 더 건강해지고, 더 아름다워지는 상태를 구현한 것이다. 결국 자신이 성장한 결과로 이런 상태가 만들어지고 소중한 사람들과 소통이 더 활발해진다면 최고의 행복한 상태를 체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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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아무것도 없다./그저 행복하게 살라는 한가지 의무 뿐"이다. 헤르만 헤세의 시를 공유한다. 18세기 프랑스 작가인 디드로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수많은 타인의 행복을 먼저 생각해 주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그게 아마도 사랑이라는 능력일 거다.
행복해 진다는 것/헤르만 헤세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행복하게 살라는 한가지 의무 뿐
이 세상을 사는 이유지
온갖 도덕적 의무를 다하고 깨우침을 갖고도
사람들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하지
그것은 사람들 스스로 행복을
만들지 않기 때문
착하게 산다면 누구나 행복에 이르지
스스로 행복을 느끼고 마음에서 조화를
찾는다면
그러니까 사랑을 한다면
이것이 이 세상의 단 하나의 교훈이지
예수도, 부처도, 헤겔도 가르쳤다네
모든 인간에게 세상에서 한가지 중요한 것은
그의 가장 깊은 곳
그의 영혼
사랑이라는 능력이지
보리죽을 떠먹든 맛있는 빵을 먹든
누더기를 걸치든 보석을 휘감든
사랑이라는 능력이 살아있는 한
세상은 조화로운 영혼의 음악을 울렸고
언제나 좋은 세상
올바른 세상이었지
언젠가 적어 둔 글이다. 다른 이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향수를 뿌리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뿌릴 때 자신에게도 몇 방울은 튀기 때문이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도 행복해야 한다. 다른 이와 상관없이 나만의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원리는 강자가 약자를 지배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힘과 권력을 갖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상대방의 약점은 공격할 만한 빌미를 찾는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원리는 강한 자가 자기보다 약한 자를 도우며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약점을 들추어 내어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약점을 담당하며 가리워 주는 것이다. 상대의 약점을 담당하며 섬기는 것이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며 동시에 내가 속한 공동체를 한층 더 아름답게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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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규정했듯이 성장 체험을 통해 더 성숙해짐에 대한 되어 감을 통해서 증진된다. 목표 자체의 달성보다 달성하는 과정이 우리들에게 더 행복을 가져다 준다. 그리고 성장 체험의 본질은 지속적 학습을 통한 성장과 성숙이지 실수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행복한 사람은 항상 자신만의 일인칭 프로젝트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프로젝트가 중요한 이유는 남들과 비교할 필요가 없이 자신의 목적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존재의 수준에서 차별화 시킬 수 있는 목적을 각성했고 이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한 자신만의 일인칭 프로제트가 있다는 유데모이나의 조건에서 우리는 행복해 질 수 있다. 내 삶이 내재적 기준에 의해서도 지속적으로 쪼그라들고 있는데 행복을 느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들이 유데모니아가 없는 소확행에 빠져 살다가 결국 삶이 사막 화되면 무언가 더 심각한 것에 자신을 중독 시킨다. 소확행으로 행복을 쫓는 것은 영원히 잡을 수 없는 파랑새를 쫓는 것과 같다.
느린 행복, 에우다니모니아는 규칙적으로 실천하는 인간성을 통해 쉼 없이 늘어 나며, 주관적 감정을 통해 이 세상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가치를 만들어 내는 행복이다. 모든 인간이 헤도니아, 빠른 행복이 아닌 에우다이모니아를 추구한다면 시기심도, 증오도, 치명적 무기도, 불행도 줄어들 것이다. 느린 행복이 꾸준히 늘어나서 세상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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