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90.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7월 19일)
1
아인슈타인은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은 두 가지 뿐이라고 말했다. “아무것도 기적이 아닌 것처럼 살거나, 모든 것이 기적인 것처럼 살거나.” 우리에게는 후자가 필요하다. 유지되기 힘든 기쁨을 고집스레 키우는 능력 말이다. ‘나는 늘 부족 하다!’는 마음속 불안을 내려놓고, 기쁨을 차단하는 두려움과 맞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삶은 무의미로 가득할 것이다. 기쁨과 행복도 용기가 필요하다. 마음 가면을 벗고, 맨 얼굴로 내게 온 기쁨과 행복을 마주할 용기가 필요하다.
침습적인 슬픔과 달리 기쁨은 왜 지속되지 않을까? 인간은 생존을 위해 위험을 감지하고 불안을 느끼는 능력을 진화시켰다. 불행에 대비하는 게 종족 보존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순수한 기쁨을 느끼는 능력은 서서히 퇴화했다. 더 기이한 건 우리 내면에서 작동하는 기괴한 밸런스 게임이다. 기쁨을 감추면 고통도 적게 느낄 것이라는 인생 총량의 법칙 같은 것으로 “기쁨을 적게 누리는 대신 고통도 덜 느끼는” 방식을 택한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쾌락으로 기쁨을 대체한다.
즐거움과 기쁨이 다른 것처럼, 쾌락과 기쁨은 다르다. '희로애락(喜怒哀樂)'에서 '희'는 기쁨이고, '락'은 즐거움이다. 둘 다 '쾌(快)'의 감정이지만, '락(樂)'은 감각적 차원의 쾌감이다. 이 쾌감은 고통이나 불편을 동반하지 않은 순수한 감정이다. 이 감정은 동물도 느낀다. '희'는 고통이나 불편이 동반된 쾌감이며, 정신적인 것이다. 이 기쁨이라는 감정은 순수한 쾌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불쾌감을 거치고 난 후의 쾌감이다. 그러니까 기쁨의 '희'에서 불쾌감은 만족의 지속을 위해 불쾌를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이를 우리는 '자발적 불쾌'라 한다. 이 '자발적 불쾌'가 있을 때 '쾌'는 깊어지고 길어진다. 즐거움은 쉽게 휘발되지만 기쁨은 오래 지속되는 이유이다.
‘빨간 머리 앤’에게 기쁨은 “진주알들이 하나씩 한 줄로 꿰어지듯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이 조용히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도파민 같은 자극에 익숙해져 소소한 기쁨을 자주 놓친다. 저자는 감사가 ‘기쁨 차단 하기’의 해독제라고 말한다. 기쁨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모두 감사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왜 우리는 있는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심지어 타인의 배려를 종종 자신의 당연한 권리인 듯 여길까? 데일 카네기는 <<자기 관리론>>에서 “감사는 교양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자기 수행의 결실”이라고 정의하며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으며 오히려 감사를 기대하지 않을 때 선물처럼 감사가 찾아오는 역설을 강조한다. 애타게 바라면 오히려 멀어지는 행복의 역설처럼, 감사함 역시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기억할 때 라야 찾아온다. “나는 신발이 없어 우울했다. 거리에서 발이 없는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잃고 나서 후회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 우리가 비범해지는 유일한 길은 매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감사의 반대말이 '당연하다'라 한다. 내 일상에 당연하게 일어나는 일들이 다 감사해야 할 것들이다.
2.

이어서 어제 멈춘 <택뢰 수> 괘의 '육삼' 효사를 이어 읽는다. '육삼' 효사는 "六三(육삼)은 係丈夫(계장부)하고 失小子(실소자)하니 隨(수)에 有求(유구)를 得(득)하나 利居貞(이거정)하니라" 이다. 번역하면, '육삼은 장부(丈夫)에게 매이고 소자(小子)를 잃으니, 따름에 구함이 있음을 얻으나, 바른 데에 거함이 이롭다'가 된다. <택뢰 수> 괘에서는 지도자의 역할을 하는 '구오' 인군을 중심으로 모두가 '구오'의 뜻에 따르고 있다. '육삼'은 중에서 벗어나 있고(不中) 양자리에 음으로 있으니(失位), 사실 위태로운 자리이다. 응하는 관계인 '상육' 역시 음(陰)이니, '육삼'은 자신이 따라야 할 주체를 찾지 못해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내괘의 '초구' 소자(小子)에 매이지 않고, 외괘의 '구사' 장부(丈夫)에게 매여 따르니, 구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 다만 위(位)가 마땅하지않고 중(中)을 얻지 못했으니, 바른 데에 거함이 이롭다.
그러니까 "장부"에 붙매이고 "소자"를 잃으라는 거다. 따르면 바라던 대로 얻게 될 것이다. 바르게 머무르면 이로운 것이다. "사소취대(捨小取大)'하라는 거다. '따름'을 이야기하는 <택뢰 수> 괘에서 '육삼'은 따를 상대를 잘 선택해야 하는 자리이다. '상비(相比)'하는 '구사'와 같은 내괘에 있는 '초구' 중에서 따를 상대를 결정해야 한다. '상비'의 관계에 있으며 선배, 상사와 같은 '구사'를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 따름의 방향은 본래 아래에서 위를 향하는 것이다. '구사'를 선택하면 '초구'는 잃게 된다. 우리는 '육이'에서 이미 둘과 동시에 함께 할 수 없는 이치에 대해 이해했다. '육이'에서 '소탐대실'을 경계했다면, '육삼'에서는 '사소취대'를 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라'는 이치이다.
"수유구득(隨有求得)"을 직역하면, '수(隨, 따르면), 유(有, 있게 될 것이다), 구득(求得, 구하여 얻음)'으로 '바라던 대로 얻게 될 것이다'가 된다. "구(求)"는 '육삼'이 '구사'와 함께하기를 구하고 청하는 것이다. "구득"은 '구사'가 '육삼'의 구함과 청함을 받아 주는 것이다. 여기서 "수(隨)"는 '구사를 따르면'의 뜻이 아니라, 앞 문장을 그대로 받아 "계장부, 실소자"의 이치를 따르면'으로 이해해야 자연스럽다. "이거정(利居貞)"은 제3괘인 <수뢰 둔> 괘의 '초구' 효사에 등장했던 표현이다. <수뢰 둔> 괘의 '초구' 효사'가 "初九(초구)는 磐桓(반환)이니 利居貞(이거정)하며 利建侯(이건후)하니라" 이다. 번역하면, '초구는 반환함(머뭇거림)이니, 바른 데에 거처함이 이로우며 제후를 세움이 이롭다'가 된다. 더 쉽게 말하면, '머무르라, 바르게 자리해야 이롭고 제후를 세워야 이로울 것이다. 따라서 "이정(利貞)", 바르게 하면 이로울 것이라고 읽었지만. "이거정"은 "거(居)"를 강조할 때 쓰는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육삼'이 동하면, 내괘는 <리괘>, 불이 된다. '육삼'이 따를 상대를 선정할 때는 바른 이치대로 해야함을 암시한다(離而者明也, 리는 밝은 것이다). 그리고 '육삼'이 동하면 지괘는 제49괘인 <택화 혁(澤火 革)> 괘가 된다. <택화 혁> 괘의 '구삼' 효사는 '九三(구삼)은 征(정)이면 凶(흉)하니 貞厲(정려)할지니 革言(혁언)이 三就(삼취)면 有孚(유부)리라" 이다. 번역하면, '구삼은 가면 흉하니, 바르게 하고 위태하게 여길 것이니, 고치자는 말이 세 번 나아가면 미더움이 있을 것이다가 된다. 다시 말하면, 무리해서 나아가면 흉하니 바르게 힘써야 한다. '혁하자'는 말을 세 번은 얻어야 믿음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니 <택뢰 수> 괘의 '육삼' 효사에 나오는 "이거정"를 말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양 자리에서 음으로 약하고, 중도 얻지 못한 '육삼은'은 '구사'를 따르며 자기 본분을 잘 지켜야만 하는 것이다.
<소상전>은 "象曰(상왈) 係丈夫(계장부)는 志舍下也(지사하야)라" 이다. 번역하면, '상전에 말하였다. 장부에게 매임은 뜻이 아래를 버리는 것이다'가 된다. TMI: 舍:버릴 사·집 사. '육삼'의 뜻은 아래 '초구'에 매이지 않고, '구사' 장부를 따르는 것이다. '장부에 붙매인다'는 것은 뜻이 아래를 버리는 것이다.
3
'구사'의 효사는 "九四(구사)는 隨(수)에 有獲(유획)이면 貞(정)이라도 凶(흉)하니 有孚(유부)코 在道(좌도)코 以明(이명)이면 何咎(하구)리오" 이다. 번역하면, '구사'는 따름에 얻음이 있으면 바르더라도 흉하니, 믿음을 두고 도에 있고 밝음으로 하면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가 된다. TMI: 獲:얻을 획, 何:어찌 하. '구사'는 대신 자리에 있다. 내괘의 백성들은 '구오' 인군을 직접 받들 수 없고, '구오' 인군의 명을 받은 '구사' 대신을 따르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사'가 대신(大臣)으로서 나라 일을 하면서 만일 얻는 것이 있다면, 설사 바르더라도 흉하다. 나라 일을 하는 대신은 공명정대(公明正大)하고 청렴결백(淸廉潔白)해야 하기 때문에, '구사'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 만일 '구오' 인군에게 믿음을 두고 '도'로써 처신하고 밝게 집행하면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따름에 얻는 것이 있으면 바르게 해도 흉할 것이다. 도리에 맞게 하겠다는 신념을 갖고 공명정대하게 하면 허물이 있겠는가? '원칙대로 투명하게 일을 처리하라'는 거다. '구사'는 실위(失位), 실중(失中)한 자리이다. 음의 자리에 양으로 있으니 지나치게 강한 상황이다. '구사'는 임원, 참모, 재상의 자리인데, 내호괘가 <간괘> 산이라 내괘가 <진괘>로 움직여 온 사람과 물건들이 '구사' 앞에서 멈추는 상이다. 외호괘가 <손괘> 바람이니 '겸손하게 따르는(從, 종) 상이 되어 '수(隨)'의 의미가 만들어진다. 리더를 능가하는 실권을 가진 위세당당한 2인자의 모습이다.
사람들의 권위에 눌려 추종하는 이런 상황을 <<주역>>은 "획(獲)"이라고 표현했다. 아무리 좋은 취지로 성의를 표하는 것에 불과한 작은 선물이라고 해도 만일 '구사'가 받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원칙이 무너지게 된다. 그것을 약점 삼아 사람들은 질기게 붙들고 물어지게 될 것이다. 아무리 바르게 하더라도 사람들의 시선에는 이미 불신이 스며들게 마련이다.
'구사'가 동하면, 외괘 <감괘> 물이 된다. 스스로 어두운 상황을 초래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어려움을 맞지 않도록 이치에 맞게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명공(明功)"해진다고 <소상전>에서 공자는 말했다. "공(功)"은 일이고, "명(明)"은 밝히는 것이니, '일을 투명하게 한다'는 의미가 된다.
'구사'가 동하면, 지괘는 제3괘인 <수뢰 둔(水雷 屯)> 괘가 된다. <수레 둔> 괘의 '육사' 효사는 "六四(구사)는 乘馬班如(승마반여)니 求婚媾(구혼구)하야 往(왕)하면 吉(길)하야 无不利(무불리)하리라" 이다. 번역하면, '육사는 말을 탔다가 서성거리니, 혼인을 구하여 가면, 길해서 이롭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가 된다. 말을 탔다가 내려 혼인을 청해 가면 길할 것이다. 이롭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택뢰 수> 괘의 '구사'와 연결하여 이해하면, 리더의 위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 말고 낮은 자세로 내려와 사람들과 진실한 마음으로 교류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소상전>은 "象曰(상왈) 隨有獲(수유획)은 其義(기의) 凶也(흉야)오 有孚在道(유부재도)는 明功也(명공야)라" 이다. 번역하면, '상전에 말하였다. 따름에 얻는 것이 있음은 그 뜻이 흉한 것이고, 믿음을 두고 도에 있음은 공을 밝게 하는 것이다'가 된다. 만일 '구사'가 나라 일을 하면서 얻는 것이 있다면, 이는 '구사'의 뜻이 흉한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다. 믿음을 두고 '도'가 있고 밝게 하면 대신으로서의 공(功)을 밝게 하는 것이다.
5
오늘 사진은 우리 동네 보문산의 한 절에서 찍은 것이다. 웃음과 울음은 정반대의 감정이지만, 연상의 파괴에서 시작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정히 길을 걷던 연인 중 한 명이 예상치 못하게 넘어진다고 치자. 상황이 희극적이면 웃음으로, 비극적이면 울음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인간은 언제부터 웃기 시작했을까? 김찬호의 책 , <<유머니즘>>에는 웃음의 기원에 대한 얘기가 등장한다. 책에 따르면 웃음은 생존에 필요한 심리적 안전을 확보하는 역할을 한다. 가령 맹수(猛獸)의 습격에 늘 노출되어 있던 원시인들이 크게 웃을 때는 뭔가 꿈틀거려서 사자(獅子)일까 불안했는데 알고 보니 사슴이었을 때였다. 웃음은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이제 안심해도 좋다는 안전 메시지인 것이다. 실제 가게 안에서 점원이 웃고 있으면 범죄자들이 섣불리 범죄를 시도하지 못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오늘 사진과 어울리는 시 한 편을 찾았다.
웃음의 배후/이재무
웃음의 배후가 나를 웃게 만든다
자꾸 웃음이 나온다
밥 먹으면서 웃고 길 걸으며 웃는다
앉아서 웃고 서서 웃고 누워서 웃는다
수업 하다가 웃고 차 타면서 웃는다
잠자다 깨어 웃고
소리 내어 웃고 소리 죽여 웃는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몸에 난 사만팔천 개의 구멍을 열고
비어져 나오는 웃음의 가래떡
찡그리면서 웃고 이죽거리며 웃는다
웃는 내가 바보 같아 웃고
웃는 내가 한심해서 웃는다
이렇게 언제나 나는 가련한 놈
웃다가 웃다가 생활의 목에
웃음의 가시가 박힐 것이다
백지의 공포 앞에서 볼펜이 웃고
웃음의 인플루엔자에 전염된
꽃들이 웃고 새들이 웃고
애완견과 밤 고양이가 웃고
가로수가 웃고 도로가 웃고 육교가 웃고
지하철이 웃고 버스가 웃고 거리의
간판들이 웃고 티브이, 컴퓨터가 웃고
핸드폰, 다리미, 냉장고, 식탁,
강물, 들녘이 웃고 산과 하늘이 웃는다
동심원을 그리며 번져가는
웃음의 장판무늬들
그리다가 돌연 사방팔방 안팎에서
떼 지어 몰려와
두부 같은 삶 물었다 뱉는,
가공할 웃음의 저 허연 이빨들
웃음의 감옥에 갇혀 엉엉 웃는다
그 언제나 즐겁고 신나는
옛날 같은 새날이 와
눈치 보지 않고
눈물 콧물 흘리며 실컷 울 수 있을까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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