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우리가 자유롭게 살려면, 힘들고 어렵게 살 줄 알아야 한다.

3321.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6월 30일)

오늘 아침 사진과 함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반추해 본다.

1
지난 주말 처음으로 윤의 모습에서 보았다. 그동안 권력에 취해서 오만방자(傲慢放恣)하게 살아온 인생에서 비로소 자신의 처지에 현타(현실 자각 타임-現實 自覺 time)가 찾아 온 모습을 보았다. 권력에 취해 오만방자할 때를 경계해야 한다. 이러면, 빈대 한 마리가 초가삼간, 아니 대를 이어 오랜 세월 공들여 이룩한 말쑥한 보금자리를 다 태우듯이, 우리도 우리의 인생을 다 날릴 수 있다. 윤에게서 배운다. 그는 나라를 망치고도 “내란 살인모의죄? 어디 해볼 테면 해봐라” 할 정도로 오만방자 했다. 세상이 원래 이렇고 인간은 이런 거라고 떠들어 대는 그의 앙 다문 입술에서 악의 신비가 드리워진 어둠을 보았다. 

이런 경우, 사람답고, 이성을 회복하려면 <주 기도 문>을 소환하는 것도 좋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이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 서와 같이 땅에 서도 이루어 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 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마태 6:9-13, 루카 11:2-4) 이 기도 문을 좀 자세하게 나누어 사유 해본다.

2
미사에서 '주의 기도 문'를 올릴 때는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라고 끝을 맺는데, 왜 '영원히'인가? 이 3차원 공간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이다. 그런데 3차원 공간을 넘어서면 공간이란 개념도, 시간이란 개념도 부질없는 곳이다. 그 세상에 '영원함'이 있다. 그러니 우리가 죽으면 '영원' 속으로 들어가는 거다. 난 이제부터 사후 세계를 믿을 것이다. 그 영원의 세계를 믿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달라"고 기도하고, 어떤 사람은 "버리겠다"고 기도한다, 어떤 게 기도인가? 기도에는 두 종류가 있다.  '생계형 기도"와 "이슬형 기도". 목구멍이 포도청인 사람들에게는 하루를 살아가는 게 거룩한 일이다. 그들에겐 밥이 하늘이다. 그들은 먹고 사는 생계 속에서 예수님의 구체적인 손길과 사랑을 느낀다. 그래 이제부터 나도 기복적인 기도도 기도로 받아 들일 생각이다. 그러나 좀 더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이슬형 기도'를 한다. 이 기도는 관조나 묵상 등 깊은 몰입에 들어가는 일치형 기도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도(祈禱)는 흔히 절대자인 신에게 자신이 원하는 욕망을 요구하는 행위로 알려져 있다. 기도를 기복(祈福)으로 생각한다. 그런 의미의 기도는 자신의 욕망을 강화하기 위해 신의 이름을 이용하는 자기만족일 뿐이다. 기도는 자신이 욕망을 신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해야 할 임무를 경청하는 수고이다. 기도의 '기(祈)'자를 풀이하면, '빌 기'자이지만, '날카로운 도끼(斤)를 자기 앞에 겨누는(示) 수련'을 뜻한다. '도(禱)'는 '목숨(壽)을 자기 앞에 내놓고 구(求)하는 행위'이다. 그러니까 기도를 말 그대로 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시간을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굳은 결심'이다. 기도는 무엇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아도 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려내는 결단의 순간이다. 그렇게 해서 기도는 자신만의 심연(深淵)으로 들어가 자신에게 쌓여 있는 적폐(積弊)를 제거하는 행위이다. 배철현의 <<수련>>이라는 책을 읽고 내 생각으로 정리한 것이다.

3
종교적인 문제라고 외면하고 싶으면, 되 집어 보는 거다. "뒤집어라, 항상 뒤집어라. 상황이나 문제를 거꾸로 뒤집어라. 문제를 거꾸로 바라봐라" 멍거는 항상 인생이나 투자에서 맞닥뜨린 문제를 풀기 위해서 '뒤집어서 생각하라'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인생에서 실패하고 싶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책도 읽지 않고 남의 의견도 듣지 않고 단기적인 시각을 가지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많이 읽고 수준 높은 사람들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장기적인 시각을 가지면 된다. (찰리 멍거) 오늘 우리들의 모습에서 되 집어 보는 거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다시 한 번  <주의 기도 문>을 되 집어 생각해 본다.
▪ 하늘에 계신 - 세상 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하늘에 계신'이라 하지 마라. 
▪ 우리 -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우리'라고 하지 마라.
▪ 아버지 - 아버지, 아들 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라 하지 마라. 
▪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이 빛나시며 -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 길(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하지 마라.
▪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 오며)' 하지 마라.
▪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 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 - 내 뜻대로 되기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 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 하지 마라.
▪ 오늘 저희에게 일용 할 양식을 주시고  - 가난한 이들을 본체 만 체 하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 할 양식을 주시고' 하지 마라.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 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 누군 가에게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 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하지 마라.
▪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 죄 지을 기회를 찾아 다니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하지 마라.
▪ 악에서 구하 소서. 아멘" (마태 6:9-13, 루카 11:2-4) -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악에서 구하 소서' 하지 마라.

4
소크라테스(BC470~BC323)가 죽은 후 아테네에는 새로운 학파들이 생겨났다. 견유학파,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가 바로 그것들이다. 이들은 모두 올바르고 도덕적인 삶을 추구한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이어받았다. 디오게네스(BC412~BC323)는 그리스 견유학파(키니코스학파)의 대표적 철학자였다. '견유(犬儒)'란 글자 그대로 ‘개(犬) 같은 지식인(儒)’이란 뜻이다. 당시 사회적 관습이나 권위를 따르지 않고 자연적인 삶을 추구했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우리가 흔히 냉소적인 사람을 영어로 '시니컬(cynical)하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유래한 말이다. '시닉(cynic)'은 본래 '개(canine, 프랑스 어로는 le chien)에서 나온 단어다. 그런데 견유학파가 사회를 냉소적으로 바라본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정의와 명예를 내세우면서도 속으로는 부정부패와 사치, 위선에 빠진 권력자들을 적극적으로 비판했다. 한 마디로 부와 권력, 명예라는 폼 좀 그만 잡고 주어진 본능에 충실하면서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디오게네스의 삶의 목표는 ‘욕심 없이 살기’ ‘지금 이 순간에 만족하기’ ‘아무것도 부끄러워하지 않기'였다 한다. 그는 이렇게 살면 어떤 고통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개처럼 살자”고 공공연히 외쳤다. 실제로 그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서 커다란 나무항아리를 집으로 삼고 개처럼 살았다고 한다.

디오게네스는 어떤 사람도 필요 이상의 물건을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 대신 커다란 나무 항아리 속에서 살면서 그 항아리를 이리저리 굴리며 옮겨 다녔다. 그러면서 항아리 앞에 앉아 햇볕을 쬐면서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지혜를 들려주곤 했다. 그런 디오게네스가 하루는 밝은 대낮인데도 초롱불을 들고 돌아다니면서 무언가를 찾는 듯 여기저기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 밝은 대낮에 왜 초롱불을 들고 다니십니까?” 누군가의 물음에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정직한 사람을 찾으려고 이러네. 이 도시엔 정말 눈을 씻고 보아도 그런 사람을 찾을 수가 없구먼!"

한 번은 알렉산더 대왕이 길가 나무 항아리 앞에 누워 있는 디오게네스를 발견했다. 일광욕을 한창 즐기고 있던 그는 왕과 사람들이 몰려오자 일어나 앉아 알렉산더를 바라보았다. 왕이 그에게 예의를 갖추며 물어보았다.“디오게네스여, 나는 일찍이 그대의 지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소. 묻건대, 내가 그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뭐 없겠소?” “있습니다. 당신이 내 햇볕을 가리지 않게끔 옆으로 조금 비켜서 주시면 됩니다.” 

그 후, 말에 올라 그곳에서 돌아서던 알렉산더 대왕이 자기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만일 알렉산더가 아니었다면, 난 저 디오게네스가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 말에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내가 디오게네스가 아니라면, 나도 디오게네스처럼 살고 싶네.” 

우리가 자유롭게 살려면, 힘들고 어렵게 살 줄 알아야 한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알렉산더 대왕이 미련이 남아 갖고 자기 밑에서 굽신거리는 철학자 중에 한 명을 보낸다. 아리스토포스라고 하는 유명한, 디오게네스하고 같이 동문수학 한 동기생이었다. "당신이 가서 좀 설득을 해봐." 그래 갔는데 콩을 삶아먹고 있는 줄 알았더니 콩깍지를 삶아 먹고 있는 거였다. 콩은 없고. 가난하니까. 그래서 옆에서 탄식을 하며 "아이고, 왕한테 고개 좀 숙이면 콩깍지 안 삶아 먹어도 되는데"라고 했더니, 디오게네스가 이렇게 답변을 했다고 한다. "자식, 콩깍지 삶는 것만 좀 배우면 왕한테 굽신거리지 않아도 되는데."

5
2025년도 반 년이 지나 간다. 내일이면 벌써 7월이다. 대통령 선거 이후, 행복하게 보낸 6월에 감사하다. 그리고 남은 6개월도 "구부러진 길"을 걸으며,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 내 호가 "곡강(曲江)"이다.


구부러진 길/이준관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