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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능력주의' 사회에서 정말 능력만큼 보상받는가?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 #복합와인문화공간뱅샾62 #구부러진_길 #이준관 #능력주의 #존엄주의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6월 30일)

'평범하고 그만하면 괜찮다'는 마음으로 가기 위한 여정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은 오직 나 스스로, 나만의 능력으로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다고 믿은 우리들의 아집이다. 거기에는 능력주의에 대한 믿음이 있다. 그때 능력주의 폭군이 된다. 능력주의가 폭군이 되는 현상은 대개 과정보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를 중시할 때 일어난다. 이런 현상은 승자와 패자로 세상을 이분하고, 그만하면 괜찮다는 마음을 무색하게 한다.

몇 년 전부터 우리 사회의 뜨거운 이슈가 '능력주의(meritocracy)' 논쟁이다. '능력주의'가 말하는 '능력만큼 보상 받는다'는 언뜻 보면 공정하다고 느껴진다. 그래 능력주의가 젊은 층들을 중심으로 인기가 있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솔직히 말해 우리 사회가 능력에 따른 보상을 하지 않으며 공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대학을 나오던, 즉 50-60대들은 운이 좋았다. 학점이 낮아도, 자격증 하나도 없어도 좋은 직장에 들어가 안착했다. 반면, 단군 이래 가장 '똑똑하다'는  20-30대들은 시대를 잘못 만난 탓에 치열한 입시와 학점 경쟁, 끝없는 자기계발 뒤에도 원하는 취업이 어렵다. 젊은이들은 능력주의 사회의 보상이 정말 능력에 따른 것인지 의심한다. 간단한 컴퓨터 프로그램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세대가 요직을 차지하는 게 부당하다는 것이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정말 능력만큼 보상받는가? 언뜻 보면, 맞는 거 같다. 우리나라는 시사총액 상위 30개 기업 임원의 25%가 소위 '스카이(SKY)대학' 출신이다. 이 점을 보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더 보상을 받는다는 원칙이 틀리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소위 스카이(SKY)에 운 좋게 간발의 차이로 합격한 학생과 불합격한 학생의 시험 점수차이는 거의 없을 정도이다. 다만 유일한 차이는 커트라인이다. 그 커트라인 안에 들어가느냐 못하느냐는 인생의 성취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 그러니 능력이 아니라, 운이다. 명문대 입학이 고소득자가 될 확률이 훨씬 높다. 이 점을 보면, 사회에서의 보상이 결코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이뤄지지 않는다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홍콩과학기술대 경제학과 김현철 교수가 소개한 로버트 프랭크 교수의 책 <<성공과 운(success and Luck)>>(2016)에 따르면,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이 모든 것을 스스로 해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 부작용이 사회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난는 거디. (1) 자기 성취가 스스로 이룬 것이라 믿을수록 세금 납부에 더 적대적이다. 정부와 사회가 도와준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2) 실패한 사람을 운이 나쁘기보다는 노력하지 않은 사람으로 인식한다. 그래 이들을 돕는 일에 소극적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늘의 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8할 이상이 공동체와 다른 사람 덕분이다. 그러니 겸손할 일이다.

우리 사회의 교육은 아직도 능력 우선주의이다. 김누리 교수는 이를 '능력주의(meritocracy)'라 했고, 이를 '존엄주의(dignocracy)' 교육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존엄한 인간을 기르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수월성 교육'에서 '존엄성 교육'으로 패러다임을 전환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독일처럼 경쟁 교육을 완화하거나 없애야 한다고 김누리 교수는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경쟁교육은 야만'이라고 자주 말했다. 경쟁을 멈추어야, 교육이 성숙한 시민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교육은 학생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고 학습을 통해 인지적 성장을 견인하며, 진로준비와 사회적 소양 함양을 통해 어엿한 직업인 및 민주적 시민을 키워내야 한다. 존엄한 인간을 기르는 교육, 성숙한 민주주의자를 키우는 교육을 할 때이다. 존엄이란 프랑스어 라 디니떼(la dignite), 영어로 디그니티(dignity)라 하는 데, 이 말의 뜻은  한 개인은 가치가 있고 존중 받고 윤리적인 대우를 받을 권리를 갖고 있는 말이다.

우리가 읽고 있는 <<평범하여  찬란한 삶의 향한 찬사>>에서 저자 마리나 반 주일렌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우리 사회가 원하는 기준만을 따르면서 무문별하고 몰염치하게 성공만을 좇는다면, 눈에 띄지 않는 것들에 관심을 갖고 언제나 공동적이지만은 않은 공동선을 지켜낼 수 있을까?

우리가 겉모습 너머를 보는 일은 까다롭고, 지난한 일이지만,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갖는 일, 그들이 걸어간 삶의 발자취와 그들의 다름을 들여다 보는 일은 우리의 지평을 넓혀 주기는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곳까지 빨리 가게 해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윌리엄 제임스는 곧장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구불구불한 길을 멀리 돌아서 가는 사람들을 관대하고 너그러운 사람들이라 했다. 윌리엄 제임스에 의하면, 그런 사람들이 현실 세계에 존재하고, 부분들이 모여 전체를 이루듯 모여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또한 부와 명예를 움켜쥔 사람들이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드러나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사람들 덕분이라는 거다. 그는 상류층과 서민층, 승자와 패자의 구분을 거부한다. 그는 흑백논리로 세상을 구분하는 것은 우리를 분열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강한 결속력을 와해 시킨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질문. 우리에게 주는 이득에 따라 타인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명령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겉으로 볼 때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관심을 가질 수 있을까?

사실 우리는 스스로를 보호하고, 우리의 앞길을 방해하는 모든 것에 맞설 능력을 갖췄을 때, 이 세상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다. 무대 앞을 차지하려는 싸움은 무대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잊게 만든다. 평범한 이들은 명예의 사다리 맨 아래에 있다. 그들은 대개 눈에 뜨지 않으며 대수롭지 않은 일에 열심이다. 우리가 흔히 능력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그저 행운일 뿐이다. 칭찬과 상을 받을 만한 사람을 명확하게 구별 지으면, 우리는 사다리의 맨 아래쪽에 있는 이들을 도외시 하게 되고, 성공이 오로지 개인의 능력에서 비롯한다는 환상에서 깨어날 수 없다. 사다리의 맨 위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이 대부분 자신이 다 이룬 게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면 겸손하게 살 수 있다. 그리고 실패했다고 생각해도 좌절할 필요 없는 이유가 나온다. 좀 운이 나빴을 뿐이다. 왜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이 더 아픈 걸까 성찰해 보고, 운이 나빴던 사람들을 더 적극적으로 도우며 사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이다. 성취를 스스로 이룬 것처럼 자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부러워 하지 말고, 불쌍하게 여기자. 그들은 착각 속에 사는 사람이니까.

2023년도 반 년이 지나 간다. 내일이면 벌써 7월이다. 행복하게 보낸 6월에 감사하다. 그리고 남은 6개월도 "구부러진 길"을 걸으며,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구부러진 길/이준관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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