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오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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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5월 24일)
항상 예의를 잃지 않고, 마음 속에 윤리적 나침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인정사정 없이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사람도 있다. 여기서 방점을 찍고 싶은 말이 '윤리적 나침반'이다. 자신을 소모하지 않는 현명한 태도를 가진 사람은 주어진 직무에 무조건 성실하게 따르기 보다는 자신의 '윤리적 나침반'을 가지고 그것이 가리키는 방향을 고통스러워도 따라야 한다. 그런데 사회는 우리에게 그런 사람보다 '유능한 개인'이 되기를 원한다. 우리는 "지남철의 여윈 바늘 끝처럼 불안하게 전율하고 있어야 하는 존재"(신영복)이어야 한다. 떨림이 없이 어느 한 쪽에 고정되면 나침반이 아니다. 오늘의 지식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콘크리트처럼 굳어진 신념과 그 신념을 펼치기 보다는 나를 소모하지 않는 현명한 태도를 위한 '떨림'이어야 한다. ‘나침반의 바늘이 흔들리는 한, 그 나침반은 틀리는 일이 없다’라는 아라비아의 경구가 있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10억원이 생긴다면 잘못을 하고 1년 정도 감옥에 가도 괜찮은 가"를 물었더니 고등학생의 57%가 그렇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설문조사를 본 적이 있다. 돈과 범죄 전과를 맞바꾸겠다는 응답 비율은 초등학생 23%, 중학생 42%였었다. 아이들이 자랄수록 돈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심해진다는 얘기이다. 다른 설문조사에선 "인생에서 추구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 냐"는 질문에 초중고생의 52.5%가 돈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황금만능주의를 청소년 탓으로만 돌릴 순 없을 것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행동을 보고 배운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돈을 왕처럼 떠받들고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이 정말 많지 않은가? 우리들은 전례 없는 풍요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정신은 여전히 성장지체 상태이다. 힘이 커진 돈은 급기야 인간을 종처럼 부리기 시작했다. 인간성이 파괴되고 인간이 불행에 빠진 근본 이유이다.
한 경영 컨설턴트가 강연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많은 돈을 갖고 싶다면, 먼저 생각부터 바꿀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우선적으로 비용 효율성을 분석해야 한다. 윤리적 원칙도 예외가 아니다. 정직해서 얼마를 손해 볼 것인가? 정직하지 않았다면 이익이 얼마나 됐을까? 만일 누군가를 속이면 득과 실은 어떻게 되지? 이건 범죄가 아니다. 그저 돈을 벌기 위한 방식이다. 금융 위기에 책임이 있다고 해서 교도소에 들어가는 사람은 없다. 가장 끔찍한 경우라면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조금 당할 뿐이다. 리스크가 없으면 큰 돈을 갖겠다는 꿈은 결코 실현할 수 없다." 모든 게 돈을 중심으로 돌아가면 , 원래의 가치는 설 자리를 잃고 만다.
돈을 떠나 모든 욕망은 멈추지 않는다. 성공은 그 자리에서 만족하는 법이 없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어떤 대상에 집중하는 시간이 지난 10년 사이 평균 12초에서 8초로 줄었다고 한다. 8초 후에도 시선을 계속 붙잡지 못하면 사람들은 곧바로 다른 곳으로 떠나간다. 연구에 따르면 금붕어가 주의를 기울이는 시간이 9초라 한다. 그러니 이 연구의 제목도 꽤 그럴싸하게 들린다. "인간의 집중력은 금붕어보다 짧다." 그러다 보니 성공한 여느 브랜드들처럼 호감을 가진 포인트를 가지라는 '설프 마케팅' 혹은 '자기 PR'이 필수라는 말이 당연한 듯 들린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라는 사람을 상표처럼 극단적으로 단순화 시켜야 한다고 강요한다. 그러나 삶에서 가장 멋진 것은 상품이 아니며, 인간 관계, 경험, 의미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남들보다 내가 더 가졌다고 다른 이들에게 부러움을 사려는 사람들은 살고 있는 지역, 타고 다니는 차, 들고 다니는 가방 등의 이름에서 자존감을 얻으려 한다. 사람들은 상품이 아니다. 따라다니는 라벨로 다른 이들을, 또 나를 판단할 수 없다. 인정받기 위해, 부러운 눈길을 얻기 위해, 또 가볍게 보거나 얕보는 듯한 눈길을 피하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소비하는 지 모른다. 나의 인간적 가치는 내가 얼마나 가졌는 가에 달려 있지 않다. 나의 재산과 재능을 지혜롭게 쓰면서 다른 이들을 섬기는 것이 나에게 더 소중한 가치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방해하는 모든 것들, 아직도 나를 거만하게 만드는 그것들을 나에게서 없애기 위해 나는 계속 노력할 것이다.
'행복하기 위해 물질적 풍요가 필요하고, 이것을 위해서는 사회에서의 성공이 필요하다.' 이거 누구나 다 아는 공식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공식에 대해 자동으로 반응할 뿐, 이 공식의 원래 목표를 생각하지 않고, 그냥 '물신주의'와 '성공 지상 주의'에 빠져 있다. 이 공식은 '행복하기 위해'로 시작한다. 하지만 어느덧 '행복'이라는 말은 사라지고, 물질적 풍요와 세속적 성공만 남아 있다. '물신주의'라는 말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나온 것이다. 노동의 산물인 상품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신비 화되는 현상을 말한다. 생활의 수단인 상품이, 교환가치의 척도인 화폐가 '물신(物神)'으로 승격하였다. 수단이 목적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행복을 위한 풍요, 풍요를 위한 성공이 변해서 물질적 풍요와 성공만이 삶에서 추구해야 할 전부가 되어 버렸다. 좋은 차에 미치고, 무엇이 되기 위해 혈안(붉은 눈)이다.
나비는 길을 묻지 않는다/박상옥
나비는 날아오르는 순간 집을 버린다.
날개 접고 쉬는 자리가 집이다.
잎에서 꽃으로 꽃에서 잎으로 옮겨 다니며
어디에다 집을 지을까 생각하지 않는다.
햇빛으로 치장하고 이슬로 양식을 삼는다.
배불리 먹지 않아도 고요히 내일이 온다.
높게 날아오르지 않아도 지상의 아름다움이
낮은 곳에 있음을 안다.
나비는 길 위에 길을 묻지 않는다.
길을 묻지 않으니 삐뚤삐뚤 갈지자로 날아 가는 군. 내비게이션을 써 보면 달라질 걸. 쉬는 자리가 집이라니 홈리스로 군. 취직을 시켜서 청약저축을 들게 해야 해. 평생 잎과 꽃 사이 옮겨 다녔 다니, 알프스의 봄꽃과 안데스의 가을꽃 관광 상품을 팔아야겠 군. 햇빛으로 치장 한다니 선크림은 필수이고, 이슬로 양식을 삼는 다니 참이슬을 권해야겠 군. 배불리 먹지 않는다지만 야근 후 치맥은 피할 재간 없겠지. 고요했다지만 게을렀던 거야. 출근부 찍느라 정신이 바짝 날 걸. 지상의 낮은 곳에 아름다움이 있다면 슬기인간들은 왜 우주로 나갈 생각을 하겠나. 길 위에 길을 묻지 않으니 조상 대대로 겨우 나비였던 거야. 이제 나비를 인간 답게 만들어 새로운 시장의 소비 주체로 만들어야 해. 이 시를 소개한 시인 반칠환의 덧붙임이 더 흥미롭다.
지난 주말에 읽은 마티아스 뉠케의 <나를 소모하지 않는 현명한 태도에 관하여>>라는 책 이야기를 하고 있다. 모든 과장된 언행의 배후에는 두려움이 숨어 있다는 거다. 언제든 대체될 수도 있고, 잉여가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말이다.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에서 뒤떨어지지 않으려면 정체해선 안 된다는 말을 듣는다. 이런 상황에 빠지지 않으려고 사람들은 달린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서 그 자리에 있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려야만 하는 붉은 여왕처럼 우리 역시 치열함을 강요 받는다. 그러면서 우리는 "서열주의(Rnkism, 로버트 풀러, Robert Fuller)에 빠져 있다. 상대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태도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그게 상대보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높다는 것을 드러내는 방법이라고 믿는다. 이 '서열주의'에서는 '먼저 인사하는 자가 진다'고 말한다. 이처럼 지위를 두고 벌이는 게임에서, 겸손함은 그 게임을 무산시키는 시도이자 방법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 게임의 룰은 물론이고 별다른 고민 없이 이 게임을 벌이는 사람들을 이해해야 한다. 권력을 의식하며 타인을 자기 뜻대로 다루는 걸 좋아하는 그들이, 지위를 두고 유치한 게임을 벌이는 것을 알아차리고 유유히 그 게임에서 걸어 나오려면 말이다.
노자는 <<도덕경>> 제66장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강과 바다가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스스로를 잘 낮추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계곡의 왕이 되는 것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강해소이능위백곡왕자) 以其善下之(이기선하지) 故能爲百谷王(고능위백곡왕)". 이 장의 메시지는 "앞서고자 하면 반드시 그 몸을 뒤에 두어야 한다"는 '겸양지덕'과 단순히 "부쟁(不爭, 싸우지 않음)"을 넘어서는 다양한 리더의 철학이다. 리더가 성공을 잘 마무리하는 방법을 말한다. "부쟁"은 성공한 자의 신의 한 수라는 거다.
이 "부쟁"은 노자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단순히 싸우지(爭) 않는다(不)'는 뜻을 넘어서 다양한 지도자의 철학을 말하는 거다. 우선 "백성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는 거다. 보통 권력을 잡으면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려 한다. 그 욕망을 버리고 겸손하게 백성을 대하면 오히려 더욱 백성들의 지지를 얻고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거다. 다음은 자신의 덕을 과시하거나 타인과 경쟁하지 않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권력자는 늘 백성의 지지를 얻으려 한다. 그래서 자신의 공을 과시하거나 자랑하려고 한다. 타인과 비교하여 자신의 능력을 돋보이려 하면 역효과를 낼 수 있다. "부쟁"의 핵심 철학은 겸손이다. 늘 말이라도 자신을 낮추고, 몸으로는 늘 타인의 뒤에 서는 거다. 그러나 그 결과는 놀랍다. 낮추었는데(下) 더욱 존경받고, 뒤(後)에 섰는데 앞(先)으로 추대된다. 이게 "부쟁"의 놀라운 기적이다. '부쟁'을 하려면, "선하(善下)", 즉 자신을 낮추기를 잘 하는 거다.
그리고 제6장에 나오는 '계곡의 신은 죽지 않는다'는 "곡신불사(谷神不死)"라는 말도 좋아한다. 이 말은 시적이고 풍부한 메타포(은유)이다. 계곡은 양 옆의 봉우리 때문에 형성되는 것이다. 그래 봉우리는 참(만, 滿)이고, 계곡은 빔(허, 虛)이다. 도올은 봉우리를 남성 성기의 상징으로, 골짜기는 여성 성기의 상징으로 보기도 한다. 봉우리는 우뚝 서서 남 보라 뽐내지만, 골짜기는 감추어져 있으며 은밀하다. 봉우리는 자기를 높이고, 골짜기는 자기를 낮춘다. 골짜기는 자기를 낮추기 때문에 주변의 모든 것들이 몰려드는 것이다.
자기를 낮추며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박수갈채와 최고라는 평가를 수집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오늘은 여기서 멈추고, 내일은 조용히 이기는 겸손한 능력자들에 이야기를 할 생각이다.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에 있다. 관련 그림은 블로그에서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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