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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정려: 고요한 집중

3270.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5월 10일)

오늘도 날이 흐리고, 오후에는 비가 왔다. 그래도 비가 그친 사이에 고요를 즐기려고 나의 채마밭에 다녀왔다. 오늘 사진은 거기서 찍은 거다. 오늘의 화두는 고요와 집중은 아는 듯이 머리를 이고 있는 대파이다. 

1
"군자는 몸을 편히 한 뒤 움직이고, 말을 바르게 한 뒤 신뢰를 얻는다."(공자) 기쁠 때 들뜨지 않고, 슬플 때 무너지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은 늘 마음 안에 고요한 중심을 하나 갖고 있어, 바람이 불어도 뿌리 깊은 나무는 쓰러지지 않는 것처럼 자신의 중심을 지킬 수 있다. 그건 철학을 갖고 그것을 깊게 만드는 일이다, 그러면 마음의 근육이 키워진다. 그런 차원에서 동양에서 전해 내려오는 '6 가지 마음 회복력'을 살펴본다. 페이스북에서 얻은 6가지 철학이다. 사실 우리들의 삶이 흔들리는 이유는 삶을 지탱하는 그러한 '철학'이 없기 때문이다.
(1) 무위(無爲): 힘을 빼야 흐른다. 억지로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흐르게 두는 것이다. 무위는 게으름이 아니다. 조용히 자기 흐름을 지키는 방식이다. 무리하지 않고, 억지로, 일부러 일상을 흐르게 하지 않는 거다.
(2)  정려(靜廬): 고요한 집중을 하곤 한다. 말없이, 깊히 생각하곤 하는 명상이다. 몸을 멈추고 마음이 뚜렷해 지는 순간의 고요함을 갖곤 한다. 
(3)  지족(知足): 충분함을 아는 지혜이다.더 갖기 보다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는 거다. '이러면 괜찮다'는 마음으로 지족하는 거다. 
(4)  양기(養氣): 기운 보존하는 기술이다. 말을 줄이고 에너지를 아끼는 것이다. 과한 인간관계를 다이어트 하고, 불필요한 감정 소비대신 기운을 내 안에 고요히 모으는 시간을 갖는다.
(5)  중용(中庸): 기울지 않기 위한 태도이다. 극단적인 것을 피하고 균형을 지키는 삶을 추구하는 거다.
(6)  안신입명(安身立命): 내 삶의 자리를 받아들이는 힘을 기른다. 몸을 편히 두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금 이 자리가 내 인생이라면 그걸 수용하는 용기를 갖는 거다. 운명을 받아들이고 마냥 버티는 게 아니라 살아내는 거다. 

이 6가지 철학을 좀 더 깊게 사유 해보고, 공유한다. 어제에 이어 오늘은  (2)와 (3)을 성찰한다.

2
정려(靜慮)는 잘 사용하지 않는 말이다. 원래 불교 용어로 '하나의 경계에 마음을 집중하여 고요한 상태에서 바르고 자세하게 생각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 하면 , '고요한 집중'이다. 정려의 첫 시작은 고요이다.

<<장자>> 제5편 <덕충부(德充符, 덕의 가득함의 표시)> 초반에 물과 거울에 대한 이야기이다. "人莫鑑於流水(인막감어류수) 而鑑於止水(이감어지수) 唯止能止衆止(유지능지중지)" 사람은 흐르는 물에,  자신을 비쳐보지 않고 멈춰 있는 물에 바쳐본다. 이처럼 멈춰 있는 것만이 능히 다른 것을 멈추게 할 수 있다. 이를 오강남 교수는 이렇게 해석했다. "사람이 흐르는 물에 제 모습을 비춰 볼 수 없고, 고요한 물에서만 비쳐 볼 수 있다. 고요함만이 고요함을 찾는 뭇 사람의 발길을 멈추게 할 수 있다."

장자 생각은 마음이 '명경지수(明鏡止水, 맑은 거울과 고요한 물처럼 잡념과 허욕이 없는 깨끗한 마음)'와 같다면, 그런 사람은 남의 눈치나 칭찬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 실현만을 위해(爲己, 자기 자신이기 위해)', 차분하고 조용히 정진할 뿐이다. 그런 사람 주위에 사람이 모여드는 것은 이런 거울같이 맑은 마음에 자기들의 참모습을 비추어 보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우선 자신의 마음을 맑게 만들 일이다. 흐르거나, 탁한 물이 아니라 고요하고 맑은 물처럼 마음을 닦으라는 말이다.

그 다음 문단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鑑明則塵垢不止(감명즉진구부지) 止則不明也(지즉불명야) 久與賢人處(구여현인처) 則無過(즉무과)" 거울이 맑음은 먼지가 끼지 않았기 때문이고, 먼지가 끼면 흐려진다고 했네. 또한 어진이와 오래 사귀면 허물이 없어진다고도 했지. 그러니까 거울이 맑으면 먼지가 끼지 않고, 먼지가 끼면 정말로 맑은 거울이 아니다. 현인과 오래 지내면 잘못이 없어진다는 말이다. 거울이 맑으면 먼지가 끼지 않는 것처럼, 마음이 거울같이 맑으면 '나'라는 의식이 끼어 있을 곳이 없는 법이라는 말이다.

3
"리더의 올바른 경청은 마치 술에 취한 듯 허정하게 듣는 것이다." 이 말을 기억한다. '허정하다''라는 말을 쓰는구나!  "치허극 수정독(致虛極, 守靜篤)"(노자)에서 따온 말이 '허정'이다. "허함에 이르기를 지극히 하고, 고요함을 지키기를 돈독히 한다." 아니면 "비움에 이르기를 지극하게 하고, 고요함 지키기를 도탑게 하라!" 이렇게 해석한다.

비움에 이르기를 지극하게 하면 고요함이 도타워지며, 고요함 지키기를 도탑게 하면 비움이 지극해진다는 상보적인 의미가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술에 취했을 때가 '허정'이 된다는 것이다. 술에 취하면 걱정이 없어지고, 간이 부어 용감 해진다. 그래서 술에 취한다는 것은 비우는 것일 수 있다. 그냥 쉽게 비워지지 않으니까, 술을 마시고 비우는 것이다. 자주 잊지만, 늘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이다.

비움은 인간의 도이다. 비움은 집중이다. 생각을 비우면 현재에 더욱더 집중하게 된다. 인생은 '괜찮아'와 '고마워'로 살아간다. 비움은 자유이다. 생각을 비우면 어떤 사람의 말, 표현, 사상에도 걸림 없는 자유로운 삶이 가능해진다. 비움은 평화이다. 생각을 비우면 다툼과 괴로움이 없어져 고요함 즉 평화의 세계로 들어간다. 비움은 자비이다. 나와 너의 생각을 비우니 나와 너가 사라진 전체 즉 하나가 된다. 하나가 되니 만물을 아끼고 사랑한다. 걱정하지 말고, 비우자. 그래서 현재에 집중하고, 자유와 평화 그리고 사랑이 충만하게 일상을 꾸리는 거다. 오선지의 음표가 아름다운 선율이 되는 것은 중간 중간 비어 있기 때문이다. 말이 아름다운 대화가 되는 것은 중간중간 경청하는 침묵이 있기 때문이다. 하루가 아름다운 일생이 되는 것은 중간중간 온 길을 살펴보는 멈춤의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치허극 수정독(致虛極, 守靜篤)"은 <<도덕경>>의 제16장에 나온다. "완전한 비움에 이르십시오. 참된 고요를 지키십시오, 온갖 것 어울려 생겨날 때 나는 그들의 되돌아감을 눈여겨봅니다.”라고 한다. 원문은 이렇다 “致虛極, 守靜篤, 萬物竝作, 吾以觀復(치허극 수정독 만물병작, 오이관복)”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비움을 끝까지 하고, 고요한 상태를 돈독하게 하여 지키는 일상을 꾸리라'는 말로 읽는다. 다시 마음을 비우고, "오이관복(吾以觀復, 나는 돌아 감을 볼 뿐이다)"한다. 나는, 최근 세상 돌아가는 것이 이해가 안 되면, 이 문장을 소환하고, 비우고 고요 해지려고 한다. 특히 "오이관복(나는 돌아 감을 볼 뿐이다)"을 소환하며 나를 위로 한다. 세상 모든 이치이다. <<주역>>에 나오는 말이 있다. "무왕불복 (無往不復)", 즉 자연의 순환 원리를 주역에서는 "무왕불복"의 원리라고 한다. 세상의 이치는 결국 가면 반드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순환 철학은 <<주역>> 11번째 괘인 <지천태괘>에 나온다. 이 괘에 "무평불피(無平不陂)"라는 말도 나온다. 세상에 영원히 평평한 땅은 없다는 말이다. 난세를 이겨내는 중요한 인생철학이다.

'치허'를 지극하게 하고, '수정'을 돈독하게 하라.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구절이 "萬物竝作(만물병작) 吾以觀復(오이관복)"이다. 이 말은 '만물이 연이어 생겨나지만 나는 그들이 돌아가는 것을 본다'란 뜻이다. 도올 김용옥 교수는 "만물이 더불어 함께 자라는데, 나는 돌아 감을 볼 뿐이다"고 해석한다. 나는 '만물이 다 함께 자라는데, 나는 그것을 통해 되돌아가는 이치로 본다"로 읽고 싶다. 만물이 다 함께 번성하는 모양 속에서 되돌아가는 이치를 본다는 거다. 나는 이 문장을 만날 때마다 "되돌아 감"에 늘 주목한다. 도(道)의 핵심 내용은 반대 방향을 지향하는 운동 력, 즉 반(反)이다. 어떤 것도 변화하지 않거나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이 동양 철학이고, 이를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해석한다. 이를  노자는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도덕경> 제40장)이라 말한다. 나는 오늘 아침도 '되 돌아감'을 되새긴다. 달도 차면 기울고, 낮이 밤이 되고 밤이 낮이 된다. 아주 더운 여름이 되면 다시 추운 겨울로 이동하고, 심지어 온 우주도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 이 모든 것은 어느 한 쪽으로 가다가 극에 도달하면 다른 쪽으로 가는 '도'의 원리에 따르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때는 기다리면 온다.

4
'정려'는 고요와 집중이다. 정려는 보통 '선(禪)'이라고 부르는 용어와 관련된 다양한 한역어 중 하나이다. '육바라밀' 가운데 선정바라밀을 '정려바라밀다'라고 하여 선정(禪定)과 정려는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또 색계의 사선(四禪)을 '사정려(四靜慮)'라고도 하는데, 이 사선의 '체(體)'는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것이고, 그 '용(用)'은 자세하게 생각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정려의 본래 의미를 잘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하나의 대상에 생각을 집중하여 고요해진 상태에서 바르고 자세하게 생각한다'는 거다. 바라밀이란 말은 '파라미타'에서 온 것이다. 파라미타는 '파람(저 멀리)+이타(도달하다)'의 합성어이다. 그 뜻은 궁극, 즉 멀고 험하게 보이는 부처가 되는 길을 꿋꿋하게 걸어서 이른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이 우주의 원리인 "6바라밀(세상을 건너는 일, 세상을 사는 일, 6 가지 인격의 기둥)"에 머물라는 것이다. 우리가 건너가야 할 수준을 다음과 6 가지로 말하고 있다.

보시 바라밀: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유교식으로 말하면, 인(仁)에서 나오는 측은지심(惻隱之心-남을 나와 다르게 보지 않고, 나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예컨대, 네가 갖고 싶은 것을 상대도 갖고 싶어한다는 것을 우리 양심으로 안다. 그러니 '자랑질' 하지 말라, 그것도 보시이다.
▪ 지계 바라밀: 계율을 지키는 것, 아니 유혹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 지는 것이다. 유교식으로 말하면, 의(義)에서 나오는 수오지심(羞惡之心-내가 당해서 싫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뿌린 대로 거두리라"라는 마음이다.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논어』) 정신이다.
▪ 인욕 바라밀: 수용(受容), 즉 온갖 모욕에도 원한을 품지 않는 것, '욱'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참아내는 것이다. 단 자명한 것 앞에서 참는다. '인욕'이란 무조건 참아내는 것이 아니라, 양심에 따라 진리를 인가(수용)하며 참아내는 것이다. 이 때 참아내게 하는 힘은 지혜에서 나온다. 자명한 상황을 받아들이며 참아내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욕심에 나오는 화는 참고, 양심에서 나오는 분노는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리를 인가, 수용하는 것이다. 자명을 인정하는 것이다. 지혜(양심=진리)에서 나오는 것을 참는 것이 인욕이다. 유교식으로 말하면, 예(禮)에서 나오는 사양지심(辭讓之心)이다. 타인을 배려하면서, 매너를 지킨다는 말이다.
▪ 정진 바라밀: 악을 제거하려고 치열하게 노력으로 나태하지 않는 것이다. 유교식으로 말하면, 신(信)에서 나오는 성실지심(誠實之心)이다. 성실하게 일상을 잘 살아내는 것이다.
▪ 선정 바라밀: 마음을 응시하며, 심난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유교식으로 말하면, 경(敬)에서 나오는 몰입이다. 현재 하는 일을 제외하고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것으로, "깨어 있으라"는 말이다.
▪ 반야=지혜 바라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미래에 대해 불안해 하지 않고, 자명한 것만 받아들이는 현명한 판단을 하는 것이다. 유교식으로 말하면, 지(智)에서 나오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다.

그러니까 이 '6 바라밀'은 우리가 세상을 건너는 일, 세상을 사는 일이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일이다. 궁극에 이르는 것이다. 인문학의 결론이기도 하다. 사랑(나눔), 정의(절제), 예절(수용), 성실, 몰입, 지혜(통찰-'탁!' 하면 아는 것). 이 6가지가 인문학의 핵심이기도 하다. 앞에서 말했지만, 정려는 보통 '선(禪)'이라고 부르는 용어와 관련된 다양한 한역어 중 하나이다. '육바라밀' 가운데 선정바라밀을 '정려바라밀다'라고 하여 선정(禪定)과 정려는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5
'정여'에 대해 사유하다 보니, 다음 그림이 소환되었다. 그리고 쉽보르스카의 <베르메르>시도 함께. 그걸 공유한다. "내 삶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에 화해를 청합니다." 199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유언이다. 죽음을 목전에 두었던 그녀는 자신의 미완성 유작이 될 마지막 원고에 <<충분하다>>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충분하다"는 '모자람 없이 넉넉하다'는 뜻이며 무엇도 바라지 않고 무엇도 원하지 않는 상태다. 있는 그대로 만족스러운 이 감정은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을 닮았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카잔차키스가 죽기 전에 했다던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라는 말과 결이 같다. 

다음 그림은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의 작품이다. 우리에게는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로 많이 알려진 화기이다. 이 작품 제목은 <'우유 따르는 여인(The milkmaid)> 이다. 그림 속, 맑은 빛이 창문을 타고 내려와 부엌을 비추고 있는 이른 아침, 주방에는 다소 때 묻은 듯한 머릿수건과 조금 바래진 노란 웃옷을 입은 여인이 우유를 따르고 있다. 반듯이 접어 쓴 머릿수건과 접어 올린 소매에서 매일 반복되는 노동을 대하는 정갈함이 느껴진다. 파란 앞치마와 붉은색 치마의 색감 대비가 아름다운 어느 시골 아침의 풍경은 그녀의 온화하고 평화로운 미소처럼 푸르고 상쾌한 정취를 풍긴다. 매일 하루하루, 반복되는 고단한 일상을 은은한 미소로, 또 부지런한 삶의 태도로 이어 나가고 있는 소박한 이들의 삶이 있는 한, 실로 이 세상은 종말을 맞을 자격이 없다. 


이 그림에서 나도, 오늘 공유하는 시인처럼, 충분과 함께 고요와 집중이 느껴진다. 이때의 고요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적막이 아니라 가득 찬 충분이다. 이런 충분과 고요를 위해서라면 시간을 쪼개고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농담 같지만, 내일 할 수 있는 일을 오늘 미리 하지 말자는 모토를 섬길 수 있어야 한다. 오후에 드는 햇살을 누리기 위해 저녁으로 일을 미뤄야 하고, 방금 펼쳐든 책에 빠지기 위해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다 초치기의 달인이 되는 걸 감수해야 한다. 충분하다는 말은 ‘가득 차다(充)’와 ‘나누다(分)’로 이뤄져 있다. 그러니까 나누어도 가득 차 있는 것이 충분한 것이다. 나누지 않아서 가득 찬 것이 아니라, 나누어야 완전한 것이다. 이게 오늘 우리가 살펴 본, 경계가 사라진 '정려'의 세계가 아닐까? 오늘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철학이 깊으면 삶을 단순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 중이다. 동양의 철학은 마음의 근육을 위해 '정려'를 권한다.

끝으로 쉼보르스카의 시를 공유한다. <<충분하다>>라는 시집에 나온 거다. 삶 속에서 "충분감"으로 가득 차오른 순간은 몸을 멈추고 마음이 뚜렷해 지는 순간의 고요함을 갖을 때이다.

베르메르(Vermeer)/비스와바 쉼보르스카(Wislawa Szymborska)

레이크스 미술관의 이 여인이
세심하게 화폭에 옮겨진 고요와 집중 속에서
단지에서 그릇으로
하루 또 하루 우유를 따르는 한
세상은 종말을 맞을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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