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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단순한 삶은 '사고 하는 삶' 또는 '의식적인 삶'이다.



326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5월 9일)

오늘은 아침부터 굵은 비가 내린다. 봄 비라고 말해야 할까? 농사를 중시했던 우리들에게 봄 비는 아주 귀한 손님이었다. 몇 가지 봄 비와 관련된 속담을 나열해 본다. 
▪ 봄 비는 쌀 비이다. 건 기인 봄철에 비가 넉넉히 오면 그 해 벼농사 짓는데 수월하여 풍년이 든다는 뜻이다. 
▪ 봄 비가 많이 오면 아낙네 손이 커진다. 봄에 비가 많이 오면 풍년이 들게 되므로 씀씀이가 커지고, 특히 아낙네들도 헤프게 쓴다는 뜻이다. 
▪ 봄 비는 일 비이고, 여름 비는 잠 비고, 가을 비는 떡 비고, 겨울 비는 술 비이다. 봄에는 비가 와도 들 일을 해야 하고, 여름에는 비교적 농한기 이므로 비가 오면 낮잠을 자게 되고, 가을 비는 햅쌀로 떡을 해 먹으며 쉬고, 겨울에는 술을 먹고 즐긴다는 뜻이다. 
▪ 새싹을 기르는 봄 비는 꽃들의 부모라고 한다. 
▪  ‘볼열갈결’(사계절) 비는 그 철을 돕거나 재촉하는 촉매제 같은 것이다. 봄 비는 볼 비이다. 봄 비에 만물이 잘 보이고, 열 비에 튼실한 열매 열리고, 갈비에 나뭇잎 보내고, 졸가리 훤한 나목에 결 비 내린다. 친구 김래호에게 배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재무 시인은 <봄비>를 공유한다. 


봄비/이재무

1
봄비의 혀가
초록의 몸에 불을 지른다
보라, 젖을수록
깊게 불타는 초록의 환희
봄비의 혀가
아직, 잠에 혼곤한
초록을 충동질 한다
빗 속을 걷는
젊은 여인의 등허리에
허연 김 솟아오른다

2
사랑의 모든 기억을 데리고 강가로 가다오
그리하여 거기 하류의 겸손 앞에 무릎 꿇고 두 손 모으게 해다오
살 속에 박힌 추억이 떨고 있다
어떤 개인 날 등 보이며 떠나는 과거의 옷자락이
보일 때까지 봄비여,
내 낡은 신발이 남긴 죄의 발자국 지워다오

3
나를 살다간 이여, 그러면 안녕,
그대 위해 쓴 눈물 대신 묘목을 심는다
이 나무가 곧게 자라서
세상 속으로
그늘을 드리우고 가지마다 그리움의
이파리 파랗게 반짝이고
한 가지에서 또 한 가지에로
새들이 넘나들며 울고
벌레들 불러들여 집과 밥을 베풀고
꾸중 들어 저녁밥 거른 아이의 쉼터가 되고
내 생의 사잇길 봄비에 지는 꽃잎으로
봄비는, 이 하염없는 추회
둥근 열매로 익어간다면
나를 떠나간 이여, 그러면 그대는 이미
내 안에 돌아와 웃고 있는 것이다
늦도록 봄비 싸돌아 다닌 뒤
내 뜰로 돌아와 내 오랜 기다림의 묘목 심는다


2
오늘 아침의 화두는 '힘 빼고 살아라. 조용한 사람이 제일 잘 산다' 이다. 마침 제목이 좋아 구입한, <<철학이 깊을수록 삶은 단순하다>>(레베카 라인하르트(장혜경 옮김)를 읽고 있다. 올 초부터 단순한 삶을 꿈꾸고 있다가 눈길이 간 책이다. 그리고 얼마 전에 린다 브린 피어스의 책, <<조금 소박하게>>를 읽게 되었다. 이 책은 동네 중고 서점에 우연히 발견한 책이다. 영어 제목은 "Choosing Simplicity"이다. 부제가 "Real People Finding Peace and fulfillment In a complex world"이다. 저자는 복잡한 세상에서 내적인 평화(Peace)와 동시에 성취감(fulfillement)을 찾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일상 생활에서 스트레스의 원인을 모두 제거한다고 해서 저절로 행복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내적인 평화와 동시에 성취감을 원하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며,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 싶어 한다. 우리는 선천적으로 배우고, 성장하고, 이 세상에 이바지하도록 만들어진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들 각자의 인생 행로는 음과 양의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도전적이면서도 보람 있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직장에서 일하고 싶다. 그런데 그 직장은 우리의 가치관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고, 근무 내용이나 시간이 너무 빡빡해서 내적인 평화를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내적인 평화와 성취감은 항상 서로 이끌리지 않으며 가끔은 양 극단에 놓여 있을 때도 있다. 우리는 두 가지 욕구 사이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맞춰 나가며 살고 있다. 그래 저자는 단순한 삶을 살라고 권한다. 단순한 삶은 균형과 목적 의식과 기쁨이 있는 사람을 촉진할 수 있다는 거다. 또 우리의 물질적인 필요와 욕구를 알 수 있게 해 주며, 나아가 내적인 평화와 성취감을 위한 비물질적인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거다. 

단순한 삶은 쉬운 삶이 아니고, 현대 생활의 물질적인 이점으로 스스로 박탈한다는 것도 아니다. 단순한 삶에서 중요한 것이 자발성이다. 적절한 의식주와 의료 대책 없이 사는 것은 단순한 삶이 아니다. 그건 비자발적인 빈곤이다. 단순한 삶은 '사고 하는 삶' 또는 '의식적인 삶'이다. 저자가 내린 단순한 삶의 정의는 내적인 평화와 성취감이 있는 참된 삶을 위해 더 많은 부와 지위와 권력을 추구하는 데에서 벗어나려는 평생 동안의 과정이다. 단순하게 산다는 것은 물질적인 안락함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활에서 짐을 벗어 버리는 것, 물질적인 사물이나 행위나 관계에 마음을 덜 뺏기고 보다 가볍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단순한 삶에 이끌리는 것은 생활이 너무 복잡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 때문이다. 단순한 사람은 2 단계 과정의 거친다. 우선 인간으로서 우리라는 존재를 느끼고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 내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그 다음에는 우리의 참 모습을 반영할 수 있는 삶을 창조해야 한다. 이것이 단순한 삶의 의미라고 저자는 말한다. 단순하게 사는 것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했다, 그것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해 내적인 평화와 성취감으로 충만한 삶을 창조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거다.

2
단순한 삶, 그거 어렵다. 그러다가 이건 삶의 철학이 문제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어제 구입한 책의 제목처럼, 철학이 깊을수록 삶을 단순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철학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관리하고 통제(controle)하기 위해서 만든 매우 고효율의 장치이다.  철학이라는 말을 한국어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철학이라는 말의 프랑스어는 '필로소피(philosphie)'이다.  '필로(philo)'가 '사랑하다'라는 뜻이고, '소피(sophie)'가 '지혜'이다. 그러니까 '필로소피'란 '지혜를 사랑하다'라는 말이다. 지혜는 깨달음에서 나온다. 그리고 지혜는 무지를 없애는 일이다. 우리가 살면서, 진짜 황당하게 당하는 일은 모르고 하는 짓이다. 물론 알고 하는 나쁜 짓은 수치심을 느끼는데, 모르고 하는 나쁜 짓은 정말 답이 없다. 철학은 '사랑해서 아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지혜와 자비, 깨달음과 사랑은 불교 철학의 핵심이다. 다른 이가 곧 나라는 깨달음이 있어야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사랑해서 아는 것'이다. 나는 "사랑의 지혜"라는 말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혜는 사랑에서 나온다는 말로 지금은 잘 이해한다. 상대방이 무엇을 사랑하는 지 알아야 그를 제대로 아는 것이기도 하다. 유홍준의 말이 생각난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어쨌든 철학은 생각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한다는 것은 내가 있는 지금, 여기에서 송골매 같은 새의 눈으로 그 곳을 나를 위한 천국으로 만들려는 행위이다. 이를 어려운 말로는 '사유思惟'라고 한다. 왜 사유가 필요한가? 행복하기 위해서 이다. 결론적으로 철학을 한다는 것은 지혜를 사랑하여, 그걸 일상의 삶에서 구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 철학을 한다는 것은 사유를 사유 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를 사유 하는 것이다.
• 철학을 한다는 것은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구체적으로 울퉁불퉁한 것을 보편으로 승화 하는 일이지, 다른 데서 생산된 창백한 보편을 가져와 그것으로 자신의 울퉁불퉁함을 재단하는 일이 아니다.
• 철학을 한다는 것은 기성의 철학 이론으로 삶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철학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 철학을 한다는 것은 자기 삶을 철학적으로 살려고 도전하는 것이다. 정해진 철학을 이념 화해서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지배하고 평가하기 보다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대해 철학을 하는 것이다.
• 철학을 한다는 것은 남이 정해준 정답을 찾아 얌전히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발견해서 해결하려는 야성을 잃지 않는 것이다. 쉽게 신념이나 이념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 철학을 한다는 것은 매혹적인 세련되고 정밀한 이론에 충실한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직 거칠고 정리 안 된 미숙한 자신의 현실을 깎고 다듬는 것이다.

4
"군자는 몸을 편히 한 뒤 움직이고, 말을 바르게 한 뒤 신뢰를 얻는다."(공자) 기쁠 때 들뜨지 않고, 슬플 때 무너지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은 늘 마음 안에 고요한 중심을 하나 갖고 있다. 모든 걸 바꾸기를 애쓰기보다 진정한 철학을 하나 만들고 조용히 나를 두는 연습부터 시작해 바람이 불어도 뿌리 깊은 나무는 쓰러지지 않는다. 다음이 동양에서 전해 내려오는 '6 가지 마음 회복력'이고, 마음 근육을 키우는 길이다. 우리들의 삶이 흔들리는 이유는 삶을 지탱하는 '철학'이 없기 때문이다.

▪ 무위(無爲): 힘을 빼야 흐른다. 억지로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흐르게 두는 것이다. 무위는 게으름이 아니다. 조용히 자기 흐름을 지키는 방식이다. 무리하지 않고, 억지로, 일부러 일상을 흐르게 하지 않는 거다.
▪ 정려(精廬): 고요한 집중을 하곤 한다. 말없이, 김이 생각하곤 하는 명상이다. 몸을 멈추고 마음이 뚜렷해지는 순간의 고요함을 갖곤 한다. 
▪ 지족(知足): 충분함을 아는 지혜이다.더 갖기 보다 지금 가진 것에 ㅁㄴ족하는 거다. '이저면 괜찮다'는 마음으로 자족하는 거다. 
▪ 양기(養氣): 기운 보존하는 기술이다. 말을 줄이고 에너지를 아끼는 것이다. 과한 인간관계를다이어트하고, 불필요한 감정 소비대신 기운을 내 안에 고요히 모으는 시간을 갖는다.
▪ 중용(中庸): 기울지 않기 위한 태도이다.극단적인 것을 피하고 균형을 지키는 삶을 추구하는 거다.
▪ 안신입명(安身立命): 내 삶의 자리를 받아들이는 힘을 기른다. 몸을 편히 두고, 운명으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금 이 자리가 내 인생이라면 그걸 수용하는 용기를 갖는 거다. 운명을 받아들이고 마냥 버티는 게 아니라 살아내는 거다. 

우리의 인생이 흔들리는 이유는 삶을 지탱하는 철학이 없기 때문이다. 이 6가지 철학을 좀 더 깊게 사유 해보고, 공유한다. 오늘은 제1번까지 무위에 대한 성찰을 공유하고, 나머지는 내일로 미룬다.


5
무위는 일상을 억지로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흐르게 두는 것이다. 무위는 게으름이 아니다. 조용히 자기 흐름을 지키는 움직임이다. 그러니 당장 무언가를 바꾸려 하지 말고, 지금은 일상이 자연스럽게 흐르게 내버려 두는 거다. 무위는 존재적 삶을 사는 데 필요하다. "살면 살아진다." <폭삭 속았수다(제주도 말로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드라마 이야기이다. 주인공 순애의 삶을 보면 그렇다. 우리 보통 사람들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무조건 사는 거다.

존재는 이어져 있지만, 소유는 끊어져 있다. 소유는 이어져 있지 않고 끊어져 있다. 따로따로 있어, 각각 이어서 각자 가지고 산다. 그래 존재는 '있다'이고, 소유는 '가짐'인 것이다. 그냥 있는 대로 두면 되지, 가지려 하는가? 소유 의식은 내일에 대한 근심 걱정에서 생긴다. 그러다 보니, 이젠 '존재-있다'로 존재하고 싶다. 그냥 '있고' 싶다, '되다'가 되고 싶다. '하다'를 하고 싶다. '이루다'를 이루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싶다'가 근심 걱정, 괴로움의 뿌리가 된다는 점이다. '싶다'의 마음을 비우고, 되는 대로, 그 상황을 받아들이면, 괴로움이 사라진다. 존재 방식의 삶과 소유 방식의 삶을 '무위(無爲)의 삶'인가 아니면 '유위의 삶'인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억지로', '일부러'가 아닌 물의 흐름처럼 자연스럽게 하루를 맞이하고, 그 하루를 상황에 맞추어 충만하게 보내는 것이다. 그 충만함 속에는 기쁨과 평온이 있어야 한다. 그건 옳은 일을 하고, 바른 길을 걸어갈 때 생기는 느낌과 기분이다. 무위는 쉽게 말해, 일상을 '억지로', '일부러' 일을 꾸미며 사는 게 아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흐르는 거다.

'무위(無爲)'의 삶은 아무 것도 안 하는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주의 순환이나 사시사철의 변화와 같이 정교한 원칙의 표현이다. '무위'라는 말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상대가 과중하게 느낄 정도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나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위'는 정교한 '인위(人爲)'이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무불위(無爲無不爲)"를 이해하여야 '무위'가 이해된다. "무위하면 되지 않는 법이 없다"는 뜻이다. 이 문장을 단지 이렇게 해석하면 부족하다. 세상사에서 어떤 욕망도 품지 않고, 그냥 되는 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것을 '무위'로 보는 것이 아니다. 노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위'보다도 '되지 않는 일'이 없는 "무불위(無不爲)"의 결과였다고 본다. '무위'라는 지침은 '무불위'라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도덕경>> 제22장을 보면 안다. "구부리면 온전해지고, 굽으면 곧아질 수 있고, 덜면 꽉 찬다. 헐리면 새로워지고, 적으면 얻게 되고, 많으면 미혹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노자를 구부리고, 덜어내는, 헐리는, 적은" 것만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사실 노자는 온전하고 꽉 채워지는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이 더 컸다.

그러니까 <<도덕경>> 제 22장에 나오는 것처럼, 내 일상을 다음과 같이 꾸리는 거다. 6가지 이다.
▪ - 휘면 온전할 수 있다(曲則全 곡즉전). 그러니 너무 각을 세우지 말고 구부러진, 유연한 일상을 꾸려간다. 
▪ - 굽으면 곧아 질 수 있다(枉則直, 왕즉직) 그러니 너무 꼿꼿하게 살지 말고, 구부정하게 살며 '난득호도'의 정신으로 산다. 
▪ - 움푹 파이면 채워지게 된다(窪則盈, 와즉영) 그러니 덜어내고 비우며 산다.
▪ - 헐리면 새로워지고(敝則新, 페즉신). 그러니 나를 무너뜨리고 이웃과 함께 산다.
▪ - 적으면 얻게 되고(小則得, 소즉득). 작고 단순한 일상을 유지하며 크고 좋은 것을 원치 않는다.
▪ - 많으면 미혹을 당하게 됩니다(多則惑, 다즉혹). 그러니 망ㅎ은 것을 소유하지 말고, 풍성한 존재적 삶을 살도록 한다.

세상의 모든 길도 강(江)도 나무도 적당히 휘어져 있어 자신의 임무를 다할 수 있다. 또한 땅 속의 온갖 나무 뿌리도 알맞게 굽어서 척박한 땅 속에서도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 성장할 수 있다. 그러니까 "휘면 온전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온전하려면 휘어져야 한다. 들판의 풀잎들을 보면 그렇다. 바람이 불 때 휘어지지 않는다면 뿌리에 뽑혀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나무가 구부러져 쓸모없어 보이면 잘리지 않고 그대로 온전히 남을 수 있는 거다. 살아 가는데 융통성, 유연성을 유지라는 말로도 이해된다.

자벌레를 가만히 보면, 굽어져야 곧아지고, 곧아져야 굽어진다. 곧아지려면 굽어져야 하고, 굽어지려면 곧아져야 한다. 굽어짐이 돋 곧아짐이고, 곧아짐이 곧 굽어짐이다. 굽어짐과 곧아짐은 서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처럼 "와(파임)"과 "영(메워짐)", "폐(헐어짐)"과 "신(새로워짐)", "소(적음)과 "다(많음)"은 모두 반대되는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 우주의 생성 변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서로 붙어서 돌아가는 하나의 진행일 뿐이다. 따라서 노자적 삶을 사는 사람은 '반대의 일치'라는 위대한 진리를 통찰하고, 거기에 따라 살아가는 자이다. 보통 우리는 세상을 한 쪽 면으로 본다. 이런 사람은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보다 절대적으로 더 좋다고 생각하고, 그 한 쪽을 위해 전심 전력한다. 위에 본 것처럼,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한 세상 지내는 것보다 좋다고 생각했으면 스스로를 드러내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인다. 기회 있을 때마다, 기회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자기가 뭔가 되는 것처럼 목에 힘을 주고, 자기를 자랑하고, 뽐내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짓들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뿐이다. 세상을 양면으로 다 보는 사람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는 일이 없어 구태여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더욱 빛이 나고, 돋보이고, 인정을 받고, 오래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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