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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십자가의 처형은 폭력이다. 폭력은 생명을 부정하는 거다.

324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4월 19일)

어제는 '성금요일'이었다. 성금요일은 '주님 수난 금요일' 로도 알려져 있으며 예수의 십자가형 과 갈보 (골고타)에서의 죽음을 기념하는 엄숙한 기독교 성일이다. 오늘은 '성토요일-파스카 성야'이다. 이날 교회는 주님의 무덤 옆에 함께하면서 수난과 죽음, 또 저승에 가심을 묵상한다. 깊은 침묵과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부활의 실현을 바라고 기다린다. 제대는 벗겨진 상태이며 미사도 드리지 않는다. 

'성토요일 밤인 파스카 성야'는 ‘모든 성야(전야제)의 어머니(Mater omnium sanctarum vigiliarum)’로 모든 밤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고귀한 밤이다. “주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려고 밤을 새우셨으므로,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도 대대로 주님을 위하여 이 밤을 새우게 되었다”(탈출 12,42)는 말씀처럼 하느님 말씀을 들으며 주님을 기다리는 밤이다. 또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고 주인을 기다리는’(루카 12,35-37 참조) 것처럼 깨어 있는 밤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 나도 밤을 새웠다.

1
십자가의 처형은 폭력이다. 폭력은 생명을 부정하는 거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는 생명, 자유 그리고 평화이다. 어제는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되신 '성 금요일'이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기억하는 날에 ‘거룩한 성(聖)’자를 더한 것은 그의 죽음의 숭고함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십자가형은 인간이 고안해낸 가장 잔인한 처형 방식이다. 사형수는 장시간의 고통을 견뎌야 하고, 완벽한 고립감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옷까지 벗겨진 채 십자가에 달림으로 그들은 인간적인 품격조차 박탈당했다. 사람들의 눈에 고스란히 노출된 그들의 몸은 더 이상 존엄하지 않았다. 

게다가 십자가 아래에 있는 이들은 조롱과 모욕을 가함으로 처형 당하는 이들과 자기들을 구별했다. 인간의 잔혹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현장에서 죽어가는 한 인간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조롱 거리로 삼는 순간 인간의 소외는 절정에 이른다. 무지가 열정과 결합하면 폭력이 된다. 폭력은 자기 속에 깊게 자리 잡은 두려움의 이면인 경우가 많다. 무지가 무섭다.

이 세계는 내 쪽에서 바라보는 시선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 그때 자기 모멸의 감정이 일어난다. 이는 자신의 무지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거쳐야만 자신만의 좁은 선입견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관점에 접근할 수 있다.

2
무지를 벗어나려면, <<주역>>에서 말하는 관어천문 찰어지리(觀於天文, 察於地理)가 필요하다. 이는 '생생(生生)의 이치-모든 생물이 생기고 퍼져나가는 자연의 이치'를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 지 막막할 때 이 여덟 자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 말을 줄이면 '관찰(觀察)'이다. 이 말은 '천문을 보고, 지리를 살핀다'는 말이다. 세상에 관한 모든 지식은 일차적으로 관찰을 통해서 습득한다. 안다는 것은 이 관찰에 의해서 형성된 그 무엇이다. 관찰은 인간이 세상과 교류하는 통로이며, 세상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 초석이다.

한문으로 관찰의 낱말 풀이를 해 본다. 관(觀)은 황새(雚)가 큰 눈을 뜨고 본다(見)이다. 또는 황새가 하늘에 날아 올라 세상을 크게 본다는 뜻으로 객관적인 세상을 크게 조망해 본다는 의미가 있다. 찰(察)은 집(宗)에서 제사(祭)를 올리며 신의 뜻을 알아낸다는 뜻으로 지극한 정성을 기울여 사물과 상황의 진의를 파악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관'은 하늘을 보며 세상을 크게 조망하는 것이고, '찰'은 땅을 굽어 보며 세부적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따라서 관찰은 큰 흐름의 줄기를 보고, 세부적인 일의 정황을 파악한다는 두 가지 방법이 동시에 수반되는 것이다. 큰 흐름만 보고 세부적인 정황에 대한 살핌이 없으면 두루뭉술한 이야기가 될 것이고, 세부적인 정황만 살피고 큰 흐름을 보지 못하면 그 정황의 정확한 주소지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관찰이라는 것은 단지 객관적인 세상을 보는 것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스스로를 객관적인 대상으로 던져 놓고, 던져진 자기 자신을 살펴보는 것도 관찰이다. 모든 현상과 존재를 관찰하는 데, 우선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다. 그 다음 큰 흐름을 보고, 세부적인 정황을 살펴 본다. 나를 관찰하고, 세상을 관찰한다. 나를 관찰하고, 세상을 관찰하는 그 무엇을 또한 관찰한다.

<주역> "계사전" 제 4장의 "우러러서는 천문을 보고(仰以觀於天文), 구부려서는 지리를 살핀다(부以찰어지리)"에서 "관어천문, 찰어지리"가 나온 것이다. 이는 하늘의 이치인 천문은 관(觀)하고, 땅의 이치인 지리(地理)는 찰(察)한다는 것이다. 거대한 국면인 하늘의 이치는 관(觀)하고, 구체적인 땅의 이치는 찰(察)한다는 것이다. 관과 찰이 겸해질 때 세상의 이치를 제대로 알게 되는 셈이다. [<장자>의 덕충부에 이런 말이 있다. 하늘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땅은 모든 것을 실어준다. 천무불복, 지무부재이다.]

서양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플라톤의 우주론을 인용해 본다. "우주에는 우리 삶을 이끄는 섭리(섭리-자연계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와 법칙 providence)가 담겨 있고, 우주의 일부분으로서 인간은 그 섭리에 따라 살아야 한다. 플라톤에게 우주는 인간을 이루는 물질적 원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편으로 인간의 삶을 훌륭하게 이끄는 원인이다." 즉 그에게 "'자연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곧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풀어 줄 열쇠였다. 플라톤은 하늘 속에 담긴 땅의 모습을 보았고, 땅 위에 펼쳐진 하늘의 원리를 읽었다." (신근영, <삶을 노래하는 우주>, 채운 수정 기획 엮음 <고전톡톡>)

이 관찰이 앎의 시작이고 본질이다. 이 앎과 함께 인간의 길이 시작된다. 인생이란 길 위에서 '길' 찾기 이다. 그래 안다는 것은 구도(求道) 행위이고, 그런 사람은 다 구도자이다. 나도 구도자이다. 이러한 길을 찾을 때 필요한 것이 지도이다. 그러니까 앎이란 지도인 것이다. 앎이 없으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정처 없이 방황할 수 있다. 그래 무지가 무서운 것이다. 그리고 무지는 그 자체로 고통이고 괴로움이다.

무지로 헤매다가, 길을 찾는 것을 우리는 '깨닫는다'고 한다. 지혜의 출발이다. 그 때 존재는 환희로 넘친다. 희열과 기쁨을 맛본다. 그래 사람들은 공부하고, 그 속에서 기쁨을 만끽한다.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 가려진 것을 열어 보이듯, 어리석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 주듯, 눈 있는 자가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들러 올리듯, 그 희열은 평온함으로, 평온함은 오롯한 집중력으로 변주되어 다시는 길을 잃지 않는다.

3
무지가 열정과 결합하면 폭력이 된다는 말을 하다가, 무지로 빠져 너무 길게 이야기를 했다. 폭력은 자기 속에 깊게 자리 잡은 두려움의 이면인 경우가 많다. 생명은 그 자체로 존엄하다. 폭력은 생명에 대한 부정이기에 거기에는 아름다움이 없다. 적나라한 폭력의 현장에서 인간의 숭고함을 드러내는 이는 예수 뿐이다. 

그는 자기를 조롱하는 무리들을 위해 기도를 바친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이가 오히려 사람들의 무지함과 폭력을 사랑으로 품은 것이다. 시인 박두진은 <갈보리의 노래>에서 그런 예수의 마음을 헤아려보려 애쓴다.


갈보리의 노래 2/박두진

마지막 내려 덮는 바위 같은 어둠을
어떻게 당신은 버틸 수가 있었는가?
뜨물 같은 치욕을,불 붙는 분노를,
에어내는 비애를, 물새 같은 고독을,
어떻게 당신은 고통을 견딜 수 있었는가?

꽝! 꽝! 쳐 못을 박고, 창(槍)끝으로 겨누고,
채찍질해 때리고, 입맞추어 배반(背叛)하고, 매달아 죽이려는,
어떻게 그 원수(怨讐)들을 사랑할 수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강(强)할 수가 있었는가?

파도(波濤)같이 밀려오는 승리(勝利)에의 욕망(欲望)을
어떻게 당신은 버릴 수가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패(敗)할 수가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약(弱)할 수가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이길 수가 있었는가?

방울방울 땅에 젖는 스스로의 혈적(血滴)으로
어떻게 만민(萬民)들이 살아날 줄 알았는가?
어떻게 스스로가 신(神)인 줄을 믿었는가?
커다랗게 벌리어진 당신의 두 팔에
누구나 달려들어 안길 줄을 알았는가?

엘리…… 엘리…… 엘리…… 엘리……
스스로의 목숨을 스스로가 매어 달아,
어떻게 당신은 죽을 수가 있었는가?

신(神)이여! 어떻게 당신은 인간(人間)일 수 있었는가?
인간(人間)이여! 어떻게 당신은 신(神)일 수가 있었는가?

아! 방울방울 떨구어지는 핏방울은 잦는데,
바람도 죽고 없고 마리아는 우는데, 마리아는 우는데,
인자(人子)여! 인자(人子)여! 마지막 쏟아지는 폭포(瀑布) 같은
빛줄기를 어떻게 당신은 주체할 수 있었는가?


시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어떻게'라는 부사는 그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정신의 뿌리를 궁금해한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어떻게'를 굳이 규명하려 하지 않는다. ‘어떻게 당신은 버틸 수가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견딜 수가 있었는가?’ ‘어떻게 그 원수들을 사랑할 수 있었는가?’ 이런 수사 의문문은 우리를 경외심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 세계는 한때 우리에게 속해 있었으나 지금은 잊힌 혹은 잃어버린 세계다.

4
김기석 목사는 세상이 장터로 변했다고 한탄했다. "욕망의 물결에 휩쓸리며 사는 동안 우리는 우러러보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우리가 더 큰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었다. 아름다움과 장엄한 세계에 대한 인식은 이해관계와 동떨어져 있다. 절대로 손해 보지 않겠다는 맹렬한 의지가 작동될 때 삶의 여백은 사라진다. 삶의 더 높은 준거점을 잃어버릴 때 세상은 장터로 변한다. 짐승들이 자기 몸을 부풀려 상대를 제압하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자기를 크게 보이기 위해 진력한다. 패거리를 짓고, 인위적인 방어막을 만든다. 그럴수록 불안감은 더욱 커지고,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외로움은 심화한다. 내면의 여백이 사라진 자리를 채우는 것은 냉소와 혐오, 무례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으로 전 세계가 요동치고 있다. 세계 도처에서 분노의 소리가 들려온다. 인류가 소중하게 가꿔온 모든 가치들이 악마의 맷돌에 갈리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늘 피해를 입는 것은 약자들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휴전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졌고 그사이에 폭격으로 죽어가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가자지구에서는 구급대원과 구조대원들까지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인류의 오랜 꿈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세상이 그렇다 하여 꿈조차 버릴 수는 없다.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에서 조금 비켜난 자리에서 밭을 가느라 여념이 없는 한 농부의 사진을 보았다. 일상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는 현장에서 그는 검질긴 인내로 일상을 복원하고 있었다. 암흑의 시간에 빛이 도래하도록 힘쓰는 이들이 있다. 비참과 냉혹함으로 얼룩진 세상에서 새로운 세상은 그렇게 열린다. 지극한 고통을 겪어내면서도 가없는 사랑을 전하던 한 사람을 기억하는 건 그 때문이다."

5
공자도 늘 노력했다는 내려놓아야 할 4 가지 이야기를 오늘 다시 소환한다. 
▪ 이런 저런 ‘잡념’
▪ 반드시 이러해야만 한다는 ‘기대’
▪ 묵은 것을 굳게 지키는 ‘고집’
▪ 자신 만을 중시하는 ‘아집’.

공자의 표현대로 하면, “의필고아(意必固我)”이다.
▪ 의(意): 무슨 일이든 확실하지 않는데도 지레짐작으로 단정을 내리는, 사의(私意), 사견(私見)으로 근거 없는 억측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을 갖는다.
▪ 필(必): 자기 주장을 기필코 관철시키려는 자세로 자기 언행에 있어 반드시 틀림없다고 단정 내리지 않고 버린다.
▪ 고(固): 융통성 없는 고집, 유연한 관점이 아닌 경직된 틀로 자기의 의견만 옳다고 고집하는 것을 버린다.
▪ 아(我): 자신을 내세우는 이기적인 것으로, 나를 비우고, 양심이 아니라 욕심을 버린다.

'의필고아'를 이렇게 푸는 사람도 있다.
▪ 의: 현재를 방해하지 마라!
▪ 필: 미래를 기대하지 마라!
▪ 고: 과거에 집착하지 마라!
▪ 아: 자아를 내세우지 마라!

나는 이렇게 풀었는데, 오늘 아침 더 좋은 번역을 만났다.

이 네 가지 중에서 버려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아집’이다. 나를 중요시하는 아집을 없애면, 자신의 욕심 때문에 일어나는 부질없는 망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과거 주장이나 행적에 대한 고집도 없어질 것이다. 이를 실천하기 위한 명상은 ‘모른다.’ ‘나는 내 이름도 모른다.’고 하며 자신의 ‘참나'와 만나는 것이다. 흔히 아집은 지나친 자기사랑에서 나온다. 자기를 되돌아보고 ‘나는 모른다.’는 무지(無知)와 자기의 욕심을 버리겠다는 무욕(無慾)을 지녀야 아집이 사라진다. 공자도 그래서 무지(無知)와 무욕(無欲)을 주장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욕이 욕심을 완전히 비우고 살라는 말이 아니다. 욕심을 그대로 긍정하되 남의 욕심도 긍정하며, 나와 남 모두를 배려하는 ‘양심’으로 자신의 ‘욕심’을 잘 조절해가자는 것이다. 

이를 일상의 삶 속에서 잘 실천하기 위해서 공자는 다음 세 가지를 말했다.
▪ 지족불욕(知足不欲), 즉 족함을 알아라. 다시 말하면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일이다.
▪ 지지불태(知止不殆), 멈출 때를 알면 위태롭지 않다. 인생은 타이밍이다. 즉 ‘때'를 알아야 한다. 멈추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하는 것 같다.
▪ 소사과욕(少私寡欲), 자기중심성과 욕망을 좀 줄이라는 것이다. 끝으로 무지(無知)란 우리의 간지(奸智), 즉 꼼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한 잔 꾀 같은 것을 없애라는 말 같다. 그리고 지식을 없애라는 말은 기존에 고집하던 것을 지우고, 새로운 안목을 키워 새롭게 이 세상을 보라는 말이겠지. '무사무욕(無私無欲)'을 말하지 않고, '소사과욕(少私寡欲)'의 현실적 처방을 한 것이 인상적이다. '소'와 '과'는 끊임없는 과정이다. 일정한 눈금이 있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적게 하고 끊임없이 줄이는 역동적인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로 나를 버릴 때 우리는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나는 <<화엄경>>의 이 문장을 좋아한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 그러면 나의 어느 것을 비워야 할까? 나는 늘 다음 세 가지 경계한다. 교만, 조급함 그리고 공격적인 태도의 사나움. 다시 말하면, 자기를 낮추며 겸손해 하며 세상의 눈높이와 함께 한다.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실천이라고 나는 이름 지었 다. 다음은 조급함 대신 여유를 택하며, 움직이지 않기가 태산처럼 원칙을 지킨다. 이를 '부동여산(不動如山)의 여유'라 한다. 끝으로 공격적인 사나움 대신 부드러운 감성을 키운다. "유약승강강(柔弱勝剛强, 부드러움이 결국 강하고 센 것을 이긴다)"의 삶이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뽐내고 잘난 척 하는 교만대신 자기를 낮추고 세상의 눈높이에 맞추며 겸손한 삶을 추구한다.
▪ 조급함 대신 여유롭고, 유연하지만, 어떤 움직이지 않는 원칙을 갖고 산다.
▪ 공격적인 사나움 대신 부드러운 감성을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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