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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도이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 下自成蹊): 오얏(자두)나무와 복숭아나무는 스스로 말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꽃과 열매가 있어 사람들이 모인다.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4월 15일)

지난 4월 12일자 <인문 일지>에 이어, 오늘 아침도 파커 J. 파머의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을 읽는다.  이 책에서 말하는 "성실성(誠實性, integrity-정성스럽고 진실한 품성, integrity)"은 삶에서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성실성은 '온전하고, 이미 갖추어져 있고, 깨어지지 않은 상태나 성질'을 뜻한다. '나뉘지 않고 온전한 상태, 원래의 조건에 일치하고, 손상되지 않고, 섞인 것이 없는 진정한 상태에 있는 어떤 것'을 말한다. 프랑스어는 'Integrité'인데, 생략이나 파손되지 않은 전체로 본래대로의 상태를 말한다. 이 "성실성"에서 <<중용>>에서 말하는 "지성(至誠)"이 소환된다. <<중용>> 제23장은 우리가 자신의 변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잘 설명한다. "지성(至誠)"을 잘 해석해야 한다. 다음과 같이 두 단계이다. (1)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2) 그런 식으로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할 때, 우리는 그 일을 정성스럽게 하게 된다. 작은 일에 최선과 그 일에 정성을 다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중용>>의 원문을 읽어 본다.

其次(기차)는 致曲 曲能有誠(치곡 곡능유성)이니
誠則形(성즉형)하고
形則著(형즉저)하고
著則明(저즉명)하고
明則動(명즉동)하고
動則變(동즉변)하고 變則化(변즉화)니
唯天下至誠(유천하지성)이어 爲能化(위능화)니라

이를 해석하면,
숨겨진 진실에 진심을 다해야 한다.
진심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형태가 만들어지고,
형태가 만들어지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명백해지고,
명백해지만 남을 감동시킨다.
남을 감동시키면 변화하게 되고,
변화하면 되어진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다.

변화의 완성은 오얏과 복숭아 향기에 취해 많은 사람들이 과수원을 찾아오는 길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이는 사마천의 <<사기>>에 ‘도이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 下自成蹊)’라는 말이다. 오얏(자두)나무와 복숭아나무는 스스로 말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꽃과 열매가 있어 사람들이 모이게 하므로 그 밑에 저절로 길이 생긴다는 뜻을 갖고 있다. 말 그대로 하면, '복숭아 나무와 오얏(자두)나무는 말이 없다. 그러나 그 아래 저절로 발자국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 나무들은 일 년 내내 자연의 순환에 따라 말없이 조용하게 정진해 왔던 것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안개가 내리나 서리가 내리나, 그 나무에겐 열매를 훌륭하게 맺기 위한 당연한 과정일 뿐이었다. 적당한 시간이 되니, 마침내 탐스런 복숭아와 자두를 맺게 된 것이다. 그랬더니 그 열매를 보고 사람들이 저절로 모이게 되었다.

한문 '혜(蹊)'를 찾아 보면, 의미가 여럿이다. '좁은 길', '지름길', '발자국' 등이다. 혼자 생각해 보았다. 발자국을 남긴 좁은 길이 지름길이다. 지름길은 멀리 돌지 않고 가깝게 질러 통하는 길이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을 말하기도 한다. 코로나-19로 요즈음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이 군대에서 보냈던 허송세월을 사는 것 같다. 허(虛)하다. 그러나 복숭아 나무와 자주 나무처럼, 말없이 이런 저런 책들을 많이 읽고, 생각하고 쓰는 일을 하며 보내면, 그 길이 지름길일 것이다.

우리가 성실성이나 지성의 모습을 이해하면, 행동수칙에 집착하지 않고 온전해지기 위한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고 본다. "선함보다 온전함이 더 낫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는 좁은 문과 좁은 길로 들어선다.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아가는 것은 온전하게 살아가는 것에 비하면 훨씬 쉬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존 미들턴 머리)

우리는 우리를 분리시키면서도 또 온전해지도록 할 수 있는 양날의  칼을 지녔다. 온전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좋은 일로 여겨지나, 곧 위험한 일이라는 게 드러난다. 당연히 우리는 위험을 피하길 원하고, 따라서 우리의 결의는 약해진다. 그런 차원에서 사람보다 나무에게서 온전성이 더 쉽게 드러난다. 나무는 자신의 생각으로 고통을 자초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나무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은 원래 모습 그대로, 성실성으로 서 있는 한 '분리되지 않은'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들은 내면의 진실을 외부 세계에 실현함으로써 스스로 온전성을 되찾고 아울러 우리 사회가 온전성을 되찾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치루어야 할 대가가 크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 혼자 오랫동안 그것을 감당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분리되지 않은 삶'으로 계속 나아가길 원한다면, 믿을 수 있는 관계, 어떤 난관도 같이 헤쳐 나갈 수 있는 커뮤니티가 필요하다. 그 이유는 크게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이다.
- 온전한 삶을 찾아 여행하다 보면 혼자 가야 할 때도 많지만, 다른 이들의 도움 없이 혼자 힘만으로 가기에는 너무 힘들 때도 있기 때문이다.
- 우리는 자기기만 능력이 아주 뛰어나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길을 잃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커뮤니티는 '영혼과 역할을 개결합하기 위해' 서로 격려하는 만들고자 하는 이들과 협력으로 이루어진다. 의외로 어디에 있든 분리되지 않은 삶을 살면서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길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가 '분리된 삶'을 사는 이유는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 때문이다. 그러한 보호 본능은 '인생에 대한 밝은 기대'djl '그늘진 현실' 사이의 간극을 보기 시작한 어린 시절부터 나타난다. 그러나 어린아이일 때 모든 아이의 타고난 선물인 '기쁨의 날개를 단 에너지'를 타고 그 '어두운 심연'을 넘어 갈 수 있다. 이 에너지는, 시인 루미의 말에 따르면, "여기 그 자체의 기쁨을 위한" 순수한 영혼에서 나온다.
아이들이 커다란 곤경에 맞닥뜨려도 쉽게 좌절하지 않고 놀라울 정도로 빨리 회복할 수 있는 건 이 순수한 영혼 덕분이다.

그런 우리가 어른이 되면서, 이 세계에서 살아남고 성공을 거두는 데 몰두하면서 영혼과 접촉을 끊고 역할 속으로 사라진다. 즉 가면을 쓰고, 갑옷을 입은 어른이 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대가들을 치른다.
- 삶에서 무언가 잃어버렸다고 느끼지만, 그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것을 찾아 세상을 헤매고 다닌다.
- 자신의 진정한 모습 그대로 세상에 있지 못하는 까닭에 자신이 세상을 속일 수 있다 거나 심지어 세상에서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느낀다.
- 내면의 빛이 세상의 어둠을 비추지 못한다.
- 세상의 빛이 내면의 어둠을 비추지 못한다.
- 내면의 어둠을 다른 이들에 투사함으로써 그들을 '적'으로 만들고 세상을 위험한 장소로 만든다. 여기서 투사란 자신이 지닌 나쁜 점을 다른 사람 역시 지니고 있다고 보는 심리를 말한다.
- 거짓과 투사 때문에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하므로 고독 해진다.
- 세상에 대한 공헌이 이중성에 의해 더럽혀지고, 생명을 주는 잠자아의 에너지를 빼앗긴다.

이런 것들은 '분리된 삶'에서 비롯된 것인데, 여기에 대중 문화가 더 부추긴다. 예컨대, "속마음을 내비치지 마라",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말은 우리가 어릴 때부터 "가면을 쓰고, 갑옷을 입고" 살아가는 게 안전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사람들을 대할 때, "이 사람의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속 모습이 과연 같을까 하고 자문한다. 그 대답이 "예"라면 우리는 자신을 맡겨도 될 만큼 그 관계가 안전하다고 느끼면서 긴장을 푼다. 그러나 대답이 "아니오"라면 우리는 극도로 경계한다. 더 나아가 속과 겉의 불일치는 서로 의욕과 능력을 억압하여 관계가 계속 훼손된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가면을 쓰고 갑옷을 입고" 살아가는 게 안전하고 건전한 방식은 아니라는 게 밝혀진다. 그리하여 영혼의 진실이 우리의 역할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면 우리의 삶이 훨씬 건전해지고, 안전해 질 것이다. 내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아이를 찾아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파블로 네루다의 다음 시가 생각난다. 다음에는 "온전한 어른 된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할 생각이다.

질문의 책/파블로 네루다(정현종 역)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그는 알까
그리고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왜 우리는 다만 헤어지기 위해  자라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썼을까?

내 어린 시절이 죽었을 때
왜 우리는 둘 다 죽지않았을까?

만일 내 영혼이 떨어져 나간다면
왜 내 해골은 나를 쫓는 거지?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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