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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선행'에서 나오는 사람의 좋은 향기는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느끼기에 좋은 것이다.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4월 14일)

예언자 미가는 신이 원하는 것은 종교 행위가 아니라, 선행(善行)이라고 말했다. 우선 선한 마음을 지니고, 이어서 선한 행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배철현 교수한테서 배웠다.

'선행(善行)'에서 '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토브(tob)'인데, 이 말은 보기에 좋고, 듣기에 좋고, 냄새가 좋고, 맛이 좋고, 촉감이 좋은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향기와 맛처럼, 그것을 접하는 상대방이 느끼는 '토브'라는 선은 내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접하는 상대방이 느끼는 어떤 것이다. 그때 우리는 '인향만리(人香萬里)'를 이해하게 된다. 정리하면, 좋은 매너, '선행'에서 나오는 사람의 좋은 향기는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느끼기에 좋은 것이다. 좋고 나쁨의 기준이 절대적으로 상대방에게 달려 있다. '선행'이란 나의 행위가 타인의 입장에서 향기로운 가를 묻는 일이다.

사실 우리는 자기 멋대로 살 수 없다. 그것은 삶이 관계 속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타인은 기쁨의 샘일 때도 있지만 우리 삶을 제한하는 질곡일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타인을 조종하려는 충동이 우리 자신 속에서 스멀스멀 자리 잡을 때가 있다. 자기 의사를 타인에게 부과해 그가 내 뜻을 수행하는 것을 볼 때 만족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걸 우리는 '권력에의 의지'라 한다. 그 '권력에의 의지'는 분수를 모르기에 언제나 한계를 넘는다. 성경은 이러한 과도함 혹은 오만함이 죄라 말한다. 죄는 남을 해칠 뿐 아니라 자기도 파괴한다. 여기서 서슴없음과 당당함은 자신을 강자로 여기는 이들의 한결같은 태도이다. 이기심과 결합되면 몰염치함으로 변질된다. 몰염치는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한 행복 연구소의 모토가 "선물을 사러 가지 말고, 선물로 살아 가라"이다. 우리 최고의 선물은 '선한 마음'이다. 그 마음은 남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선한 마음을 넘어 선한 행동은 <미가서>가 잘 말해준다. "정의를 행하고, 자비를 추구하며, 겸손하게 네가 만난 신이 요구한 대로 생활하는 것"(<미가서> 6:8)이다.

(1) 정의(正義) 실천: 정의를 히브리어로 번역하면, '미쉬파트'란다. 그 단어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사람을 차별 없이 대하는 것'이다. 어원적으로 보면, '공평하게 판단하다, 재판하다'이다. 그러니까 '미쉬파트'의 소극적 의미는 잘못된 행위에 대해 그에 해당하는 동일한 처벌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잘못에 대한 벌을 넘어 사람들 각자에게 걸맞는 권리를 보장한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성서는 지속적으로 미쉬파트는 '과부, 고아, 이민자 그리고 가난한 자'에 대한 지속적인 돌봄과 그들의 바람을 사회에서 펼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임을 이야기 한다. 오늘날은 외국인 노동자, 노숙자, 한 부모가정, 노인계층이 포함된 기초생활자, 차상위 계층 등이 바로 이 미쉬파트의 대상이라 할 수 있다. 그 사회의 성숙도와 정의 실현 정도는 순전히 그 사회가 이 계층을 어떻게 대하느냐 에 달려 있다. 이 계층에 대한 소홀이나 무관심은 자비의 부족이 아니라, 신의 제1명령인 '미쉬파트'를 범하는 죄악이다. 신이 인간에게 원한 첫 번째 명령, 신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첫 번째 선은 사회의 취약 계층을 차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해결해주는 것이며, 이것이 가장 위대한 신을 위한 '예배 행위'라고 주장한다. 그러니 평상시의 작은 선행이 성전에서의 예배보다 중요한 것이다.

(2) 자비 희구(慈悲 希求)를 히브리어로 하면, '아하보쏘 헤세드'라 한다. '아하보쏘'는 보편적으로 '사랑하다'로 해석한다. 특히 '인간들 간의 사랑, 즉 부부, 자녀, 친구들 간의 사랑과 우정 혹은 신에 대한 인간의 정성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적인 감정이 내포된 상대방에 대한 관심으로 '희구(希求)'로 번역할 수 있다. 헤세드(chesed)는 현대어로 번역하기 어렵지만, 보편적으로 '인애(仁愛)'라고 해석하고 영어로는 'steadfast love(변치 않는 사랑)', 'kindness(친절)'로 번역된다. 이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하는 충성이나 사랑이 아니라,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사람으로 한자로 표현하면 '총애(寵愛)' 정도가 될 것이다. 그리스어로 아가페(agape)이다. 인간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응원하고 믿어주고 끝까지 사랑하는 신의 마음이다. 신만이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인데, 신은 그런 사랑을 인간에게 요구한다.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이기도 하다. 이때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잃어버리는 '무아'의 상태로 진입한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영어로 'I'm nothing'의 상태가 되어야 아가페, 헤세드의 사랑이 시작된다. 모든 인간의 생존은 바로 어머니의 헤세드를 통해 가능하게 되며, 어린 아이는 어머니를 통해 헤세드가 인간이 단순한 동물이 아닌 신적인 존재로 도약하게 하는 이타적 존재라는 사실을 서서히 배운다. 신은 우리에게 자기 희생적 사랑을 목표로 삼고 행동으로 옮기기를 경주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정의는 실천하고, 자기 희생적인 사랑인 헤세드는 희구(希求)하라는 명령이다. '희구하라'는 말의 뜻은 '바라서 요구함'이다. 그러니까 헤세드를 원하고 그렇게 되게 해달라고 자신에게 요구하라는 말이다. 희구의 비슷한 말은 간구(懇求)이다. 간구는 '간절히 바라는 것을 얻고자 하는 구함'이란 말이다. 신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는 삶을 갈구해야 한다고 명령한다. 헤세드는 관심의 단계를 넘어선다, 그것에는 베푸는 주체와 받는 주체가 일치해 상대방의 희로애락을 함께 느끼고 해결하려는 노력이 동반된다. 아파하는 갓난 아기의 고통을 어머니도 느끼듯이 인간은 헤세드를 통해 나와 다른 사람들의 일상을 나의 삶으로 인식한다. 신은 그런 삶이 어렵다고 판단해 헤세드를 '희구하고 간구하라'고 주문한다는 거다.

(3) 겸손(謙遜) 생활 :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만난 신의 명령에 따른 겸손 생활 하기'이다. 겸손은 자기 비하적인 면과 동시에 자신 안에 숨어 있는 위대함을 발견하는 시발점이다. 강과 바다가 백 개의 계곡 물을 다스릴 수 있는 까닭은 강과 바다가 계곡 물보다 낮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싶은 리더들이 항상 말을 겸손하게 하여 자신을 낮추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은 인간이 겸손 생활을 하기 위해 필요한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소크라테스가 "내가 아는 사실은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밖에 없다"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 인간은 대자연의 섭리와 인간 생명의 오묘함을 완벽하게 알 수 없고, 단지 그 지극한 일부만을 발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근본은 삼라만상에 대한 경외심을 갖는 일일 뿐이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자신을 잃어버리고 직업, 명성 그리고 재산이 자신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혹은 남에 의해 강요된 신을 숭배하고 그 신에 대한 여러 의견들을 '교리'라는 이름으로, 신봉하며 예배를 드리고 그 종교가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며  일생을 산다. 신은 우리 모두에게 먼저 '자신만의 신'을 찾을 것을 요구한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모두 각자의 신을 찾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과정이 바로 신을 만나는 지름길이 때문이다. 그 신을 찾게 되면 인간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오늘 아침 사진을 고르다가, 어제 만난 지인의 페북 담벼락 생각이 났다. 겸손 해지려면, 자신이 가벼워져야 한다. 오늘 아침 사진은 민들레 홑 씨이다. 홀씨가 아니다. 사람들은 보통 민들레의 씨앗을 두고 민들레 홀씨라고 부른다. 가수 박경미가 부른 '민들레 홀씨 되어'도 그렇고, 책이나 신문, 사람들 입에서도 자연스럽게 쓰여왔으니 그것이 정말 맞다고 여긴다. 그러나 민들레 꽃이 진 뒤에 생기는 '하얀 텅 뭉치'는 홀씨가 아니다. 홀씨를 한자로  하면, 포자(포자)이다. 이끼, 곰팡이, 버섯 등 꽃이 피지 않는 식물들이 포자로 번식한다. 아마도 민들레 꽃씨의 둥근 풍선 모양을 훅 하고 불어 본 경험들이 많을 것이다. 흔하게 모든 꽃씨는 쉬이 날라갈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영 글지 않은 민들레 꽃씨는 붙들고 있다가 가벼워져야 훅 하고 날라간다는 거다. 영 글어져야 가벼워진다. 더 가벼워지려면 예언자 미가의 말처럼 선행을 베풀어야 한다. "더 가벼워지려면 주변에 많은 나눔으로 비우고 욕심을 덜어내고 가진 재능이 있다면 쓰임이 있는 곳에서 잘 풀어내며 살자. 마지막 순간에 훨훨 날아갈 수 있도록 가벼운 존재로 만들어 가야 함을 새삼 민들레 홑 씨를 통해 나를 다져보다."(빈산 갤러리, 장윤희) 오늘 아침 사진을 선택하고, 류시화 시인의 <민들레>를 공유한다.

민들레/류시화

민들레 풀씨처럼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게
그렇게 세상의 강을 건널 수는 없을까
민들레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네
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고
그러면 민들레 풀씨처럼 가벼워진다고

슬픔은 왜
저만치 떨어져서 바라보면
슬프지 않은 것일까
민들레 풀씨처럼
얼마만큼의 거리를 갖고
그렇게 세상 위를 떠다닐 수는 없을까
민들레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네
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고
그러면 민들레 풀씨처럼 가벼워진다.  

그런데, 마음이 바쁘고 여유가 없으면 시야가 좁아져 면전에서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도 지나치게 된다. 그 예가 다음의 연구이다. '선한 사마리아인' 연구로 널리 알려져 있는 연구가 있다. 프린스턴대의 연구자 존 달리와 다니엘 뱃슨은 신학대에 재학 중인 예비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설교를 준비하도록 했다.  이 때 조건을 나누어 한 조건에서는 늦었으니 서둘러서 설교 장소로 이동하라는 이야기를 한 반면(빨리빨리 조건) 다른 조건의 사람들에게는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 천천히 이동하면 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때마침 설교 장소로 이동하는 길목에는 남루한 차림을 하고 쓰러져 있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연구자와 공모한 연기자이다. 이 때 어떤 조건의 사람들이 얼마나 더 곤경에 처해 있는 사람을 도왔을까? 답은 참가자들이 성직자들이고 낯선 사람도 곤경에 빠졌다면 도움을 줘야 한다는 내용의 설교를 준비한 만큼 조건에 상관 없이 많은 이들이 도움을 주었을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는 서두르지 않은 조건의 사람들은 약 60%가 낯선 이에게 도움을 주었지만 서두른 조건의 사람들은 10% 정도만 도움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선행이라고 하면 거액의 기부나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등 크고 멋진 일들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도움이 필요한 경우는 대부분 작은 관심과 따뜻한 말 한 마디의 위로가 필요한 경우일 때가 많다.
선행을 실천할 기회가 잘 없다는 생각과 다르게 선행은 작은 친절과 위로를 통해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어떠냐고, 잘 지내고 있냐고 묻는 안부와 지금도 잘 하고 있다고 하는 작은 응원이 그 사람에게는 그 날 하루를 밝혀주는 따스함이 될 수도 있다. 다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겠지만 잠깐씩이라도 마음의 여유를 갖고 천천히 주변을 돌아볼 수 있다면 우리의 세상은 조금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심리학 칼럼니스트 박진영의 주장이다.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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