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68혁명에 대해 제대로 잘 모른다. 지난 달에 이런 칼럼을 읽은 적 있다.
"다소 갑작스런 상상력의 부상은 ‘상상력에 권력을’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던 프랑스 68혁명의 기억을 소환한다. 뚜렷한 혁명의 계기도, 지도부도 없었던 이 수상한 혁명은 대학생들이 이끌었다. 역사상 최초의 비(非)프롤레타리아 주도 혁명이었다. ‘금지를 금지하라’ ‘혁명을 생각하면 섹스가 떠오른다’ 같은 상상 밖의 구호를 내걸고 기존 정치체제와 윤리에 대한 전면적 반란을 꾀했다. 목표조차 희미해 파괴와 혼란으로 치달았던 68혁명의 전개는 현 정부 대북정책의 모호함과 오버랩 된다."
백광엽이라는 한국경제 논설위원의 주장이다. 정말 세상에 대한 지식과 경험 부족에서 오는 편견이다. 68혁명을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문제는 이런 자가 논설위원이라는 것이다. 악의가 있는 것일까? 내 생각으로는 편견이다.
이인영 신임 통일부장관이 이야기 했던 ‘대북 상상력’이란 이야기는 사실 문 대통령도 수차례 해온 말이다. 1년 전 트럼프와 김정은의 판문점 회동 이후 열린 국무회의에서 ‘상상력’이란 단어를 8번이나 언급하며 감격해 했다. 그런데 소위 논설위원이라는 사람의 주장을 보면 어이가 없다. "그런데 ‘상상력’ 발언이 나오기 시작한 이후 돌아가는 분위기가 수상하다. 정세현 부의장은 라디오에 출연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만든 건 미국”이라는 엉뚱한 진단을 내놨다. 2001년 평양을 다녀온 김대중 대통령이 “북은 핵을 개발한 적도, 개발할 능력도 없다”고 한 것과 비슷한 빗나간 상상력이다. 북핵이 안 풀리는 이유는 ‘상상력 빈곤’이 아니라 ‘상상력 과잉’ 탓이라는 게 지금까지의 교훈이다.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상상은 ‘망상’으로 끝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나는 그의 주장에 반대한다. 우리에겐 상상력이 부족하다. 이렇게 저렇게 꼬인 남북 관계는 상상력이 있어야 회복된다. 현재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 속에서는 얽힌 실타래를 풀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문운동가로서 나는 시 읽기의 중요성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개인의 차원에서도 각자의 행복을 위한 각자의 상상력을 회복하여야 한다. 최고 좋은 방법이 시 읽기이다. 시 속에서 은유(메타포)를 배우는 것이다. 은유는 서로 상관 없을 것 같은 것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힘이 나오기 때문이다. 세상을 너무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말고, 달과 해가 공존하는 어둠과 밝음이 함께하는 시선을 회복하게 해주는 힘이 거기서 나온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성은 불평등 문제이다. 사회계급 문제이다. 누군가가 특정 사회 계층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갖가지 혜택을 누릴 때, 더 많은 누군가는 그런 혜택이 존재한다는 사실 조차 모르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우리 사회의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이젠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이 문제는 우리들의 삶의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회가 너무 건조하다. 왜? 상상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 즉 일상의 사막화는, 김누리 교수에 의하면, 한국에 68혁명과 같은 과정이 없었기 때문이라 한다.
68혁명의 핵심적인 구호는 '모든 형태의 억압으로 부터 해방'이다. 여기서 방점을 찍어야 할 것이 '모든'이다. 사실 우리를 옥죄고 있는 억압들이 너무 많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다. 유교적 윤리의 억압, 부모로부터의 억압, 여성에 강제된 독박 육아의 억압, 자본주의로부터 비롯된 억압, 우리의 행동을 알게 모르게 통제하는 사회적인 시선으로부터의 억압, 사회가 요구하는 강박 관념 같은 억압 등 다 열거하기 쉽지 않다.
위에서 말한 모든 종류의 억압으로 부터 해방을 추구하는 68혁명은 프랑스 빠리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퍼졌다. 김누리 교수는 이 68혁명의 결정적인 역사적 계기가 베트남 전쟁이라고 본다. 1964년부터 베트남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동시에 이때부터 반전 운동도 확산되었다. 김 교수는 이 반전 운동의 확산을 1965년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TV라는 매체의 변화로 더 확산시켰다고 본다. TV를 통해 젊은이들이 전쟁의 참혹한 광경에 충격을 받고 깊은 도덕적 상처를 입었다. 그때 비틀즈 음악의 저항적인 분위기도 한 몫을 했다. 그리고 김 교수는 미국과 소련 간에 벌어진 군비경쟁이 68혁의 두 번째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젊은이들은 이때 이런 질문을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가 과연 제정신을 가진 정상적인 세계인가?' 이 때 지식인들은 부조리(absurde)라는 말을 많이 했다. 세상이 부조리하다는 것이다. 양차 세계 대전에서 인간을 그렇게 무수히 죽인 것도 모자라서, 더 많은 인간을 죽일 수 있는 무기를 만들기 위해 경쟁을 하고, 베트남이라고 하는 작은 나라를 세계 최강의 힘을 가진 나라가 무차별적이고 약탈적인 방식으로 공격할 수 있는가를 젊은이들은 고민하였다. 게다가 어른들은 이런 세계에 저항하지 않고, 입으로만 세계 평화를 떠들어 대는가 충격을 받고, 젊은이들은 기성 세대 전체를 부정하고, 기성 가치 전체를 회의하는 상황에서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가치 질서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이런 혁명의 흐름이 우리나라에만 도착하지 못했다. 이것이 한국 문화를 다른 나라보다 반세기 가량 지체 시킨 중요한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 김교수의 주장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10년간 유학을 했던 경험을 통해 나도 김교수의 생각과 같다. 우리는 세상이 당연하지 않다고 여기는 수많은 일들을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고, 문화적으로도 세계의 흐름에 매우 뒤쳐져 있는 현상들을 지금도 나는 매일 본다.
'모든 형태의 억압으로 부터의 해방"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은 나라마다 달랐다. 김교수는 독일의 모습을 소개했다. 그 이야기는 여기선 구체적으로 하지 않겠다. 그러나 요약하면, 68혁명은 완전히 새로운 독일 만들었다는 것이 김교수의 주장이다. 반공 전선의 첨병이던 냉전 국가는 유럽의 평화를 이끄는 탈냉전 국가가 되었고, 경제성장에 치중하던 성장 국가가 사회적 분배를 중시하는 복지국가로 변했으며, 나치의 유산이 썩어가던 '청산되지 않는 과거'의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과거 청산 국가'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68세대는 지금 나이가 거의 70대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청년처럼 열정적이고, 이상주의적이며 실천가적인 모습을 견지하고 있다고 한다. 같은 연배의 우리 노인들과 대비된다.
68혁명 세대들은 아직도 국적을 불문하고 민족을 초월하여 이상 사회의 실현이라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처럼 나도 몇 년 전부터 많은 것을 내려 놓고 인문운동가로서 마을 공동체 회복이라는 이상을 실현하려고 나이를 잊고 뛰고 있는 것이다. 68혁명 새대들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프랑스 파리 10년 유학동안 알게 모르게 내 내면에 체화(體化)된 것이 68혁명 정신이다. 어쨌든 우리 사회의 기형성은 68혁명의 부재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 김교수의 주장이다. 지금부터는 왜 한국에만 68혁이 없었는가를 살펴본다.
왜 이런 68혁명이 우리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까 나는 늘 궁금했다. 김교수의 분석으로 그 답을 찾았다. 68혁명 당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반공 국가였기 때문이다. 68혁명이 반공 국가 대한민국의 철통 방어망을 뚫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베트남 전쟁이 우리가 68혁명을 경험할 수 없게 한 결정적인 요인이기도 하다는 분석이다. 베트남 전쟁에 대해 전 세계가 반대하는 지상병을 파병한 유일한 나라가 우리였다. 난 몰랐다. 난 초등학교 때 그저 파병 장병을 위한 위문편지를 썼고, 그 덕분에 우리가 잘 살게 된 것으로 알았다. 전 세계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할 때 우리만 그 전쟁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1964년부터 1968년까지 5년 동안 32만 명의 지상군을 파병했다. 지상군을 파병한 또 다른 나라 하나가 있는 데, 대만이었고 달랑 20명이 파병되었다. 이 미스터리 속에는 박정희가 끼어 있다. 그 구체적인 이야기는 생략한다. 책으로 보시길 권한다.
베트남 전쟁 이후에, 어쨌든 박정희 정권 시절의 1968년부터 우리 사회는 '병영 사회'가 되며, 역사의 흐름에 역행했다. 내가 어린 시절의 이야기이다. 몇 가지 김 교수가 지적하는 사건들은 다 내 이야기이다. (1) 주민등록법을 만든다. (2) 모든 학생이 국민교육헌장을 외워야 한다. 이는 국민들을 일종의 예비 병력으로 무장시키기 위한 정신교육의 일환이 었다. 난 지금도 그 헌장의 일부를 기억한다. (3) 학교에서 교련복을 입고 군사훈련을 받았다. 학교도 일종의 병영으로 변한 것이다. 우리 세대가 이런 군사 교육, 아니 파시즘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기 때문에 성숙한 민주주의자가 되지 못한 것이라 본다. 이런 권위 주의 교육이 내 뼈 속에 깊이 박혀 프랑스에서의 초기 유학 시절에 실제로 나는 힘들었다. 지금도 한국에서의 사회 생활에서 가끔씩 힘들어 한다.
68혁명은 유럽을 기점으로 전 세계가 모든 형태의 억압으로 부터 해방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변곡점이었는 데, 유독 한국에서만 1968년이 자유와 해방이 아니라, 억압과 굴종으로 나아가 전환전이 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잘 몰랐다. 그 때가 나는 중학생이었다. 그러니까 그 이후 고등학교와 대학교 교육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알만 하지 않은가? 더 나아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시점부터 한국 사회는 급속히 병영 사회로 재편되었다. 지금도 그 잔재를 씻어내지 못하고 있어서, 우리 사회가 기형이다.
내가 그때 받은 교육은 권위 주의적이고, 폭력적인 것이었다. 군사 문화의 잔재가 깊게 베어 있는 교육이 었고, 인권을 경시하고 끊임 없는 경쟁과 희생을 강요하는 교육이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해 내 주변의 대다수 사람들은 '내 안의 파시즘'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는 나 보다 몇년 아래인 86세대가 등장한다. 이 이야기는 내일 아침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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