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2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3월 30일)
지금은, 대통령이 벌인 계엄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이견이 들어설 자리 없는 위법이기에 탄핵 결정을 이처럼 오래 기다리게 될 줄 몰랐다. 이번이 좋은 기회이다. 나라를 새로 세워야 한다. 현재 우리 사회는 '심우정', 죄상목' 기득권들이 서로 나눠먹기, 서로 챙겨 주기하며 국민을 착취하는 나라로 밝혀졌다. 그 징후들은 2024년 12, 3일 이후, 윤의 수족들이 나를 망가뜨리고 있다. 나라가 망하는 것은 상관하지 않고, 개인을 지키고 타락하고 있다. 천주교 사제, 수도자들의 선언문에서 지적하고 있다.
- 공작자들의 타락:
"대통령 권한대행인 국무총리가 "국회가 선출한 3인을 헌법재판관으로 임명하지 않은 것은 헌법상의 의무 위반"이라는 현재의 결정을 듣고도 애써 공석을 채우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현재의 결정은 민주적 절차를 거쳐 내려진 법적 판단이니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며 국민을 훈계합니다. 총리의 이중적 처신은 헌법재판소가 초래한 것이기도 합니다. "피 소추인이 헌법수호와 법령을 성실히 준수해야 할 의무(헌법 66조, 111조 국가공무원법 56조)를 위반 했다"고 말한 뒤, 그렇다고 "파면할 만한 잘못' 곧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면서 직무에 복귀시켰기 때문입니다. 죄를 범했지만 죄인으로 봐서는 안 된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서울중앙지법이 내란 수괴를 풀어주고, 검찰총장은 법원의 결정을 존중한다며 맞장구치는 자신감이 대체 어디서 생겨났겠습니까? 하여 대한민국을 통째로 태우려던 불길은 군을 동원한 쿠데타를 넘어 사법 쿠데타로 번졌으며 걷잡을 수 없는 형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불법이기는 하나 탄핵할 만한 정도는 아니다"라는 말은 난센스다. 언어가 훼손되고 있다. 죄를 범했지만 죄인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어불성설이다.
- 헌법재판소의 교만:
"억장이 무너지고 천불이 납니다. 신속하고 단호한 심판을 기다렸던 시민들의 분노는 폭발 직전입니다. 사회적 불안과 혼란이 임계점을 넘어섰습니다. 화재를 진압해야 할 소방관이 도리어 방화에 가담하는 꼴입니다. 여덟 분 재판관에게 묻겠습니다. 군경을 동원해서 국회와 선관위를 봉쇄 장악하고 정치인과 법관들을 체포하려 했던 위헌 위법행위를 단죄하는 것이, 명백한 사실도 부인하고 그 책임을 아랫사람에게 돌리는 자의 헌법 수호 의지를 가늠하는 것이 그를 어떻게 해야 국익에 압도적으로 이익이 되는지 식별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까? 우리는 가타부타 아무 말도 못하는 재판관들로부터 죄인의 종 노릇 하는 인간의 슬픔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 한참 늦었으나 이제라도 정의로운 판결을 서두르시기 바랍니다."
나라의 주인은 법의 주인이기도 하다. 주권자인 국민은 법을 무겁고 무섭게 여기는데, 법을 관장하고 법리를 해석하는 관료들이 마치 법의 지배자인 듯 짓뭉개고 있다. 서부지법에 난입했던 폭도들 이상으로 법의 뿌리를 흔들어 대기도 한다. 정의가 없는 국가란 '강도 떼'나 다름없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 만도 못한 '사자들'이 하늘의 마음(한마음)과 홍익인간의 철학을 가진 우리 미래를 가로막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시작이 멀지 않았다. '민주 농사'는 원만하고 풍요로울 것이다. 화마도 태울 수 없고, 내란 세력도 빼앗을 수 없는 귀한 마음으로 약한 존재들을 이젠 저항부터 하여야 한다. 그래 오늘은 저항 현장에 나간다.
저항/류시화
광야에 홀로 선 떡갈나무
광기 어린 눈보라에 저항하기 위해 태어나
깃대 끝에 매달린 깃발
가슴 찢는 비바람에 저항하기 위해 높이 올라
태풍 속에 온 존재로 내리 꽂히는 칼새
거친 중력에 저항하기 위해 알을 깨고 나와
바다에 홀로 솟은 바위
천 개의 파도에 저항하기 위해 온몸을 부딪쳐
절벽 끝에 발돋움하고 핀 한해살이 꽃
소멸의 어둠에 저항하기 위해 씨앗을 물고 태어나
저항하기 위해 살아 있는 것, 살기 위해 저항하는 것
나는 무엇에 저항하며 여기에 있나
2.
불안 사회를 넘는 방법이 필요하다. 인문 운동가의 시선에 꽂힌 대안이다. <<‘무례한 시대를 품위 있게 건너는 법>>에서 악셀 하케는 “어떤 이들은 영양 섭취 면에서 극단적인 방법만이 세상을 구할 것이라 믿는다. 정치적 올바름에 매달리는 사람들은 언어에 엄격한 법칙을 정해 놓고 이를 지키려 한다”고 말한다.
현실에서 자신을 불안정한 존재로 느끼기 때문에 안전하고 확실한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운동 중독, 채식주의, 외국인 혐오나 정치인 팬덤 같은 사회 현상을 이해해볼 수 있다. 불안한 시대를 건너기 위해 나만의 안전지대를 찾는 건 중요하다. 그것이 매일 한 개의 사과를 먹는 일이든, 만 보씩 걷는 일이든, 환경보호 단체에 참석하는 것이든 상관없다. 문제는 극단에 있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다. 육식하는 사람을 혐오하거나, 타 종교를 이단이라 배척하고, 운동하지 않는 사람을 게으르다고 비난하는 식 말이다. 사람마다 보호색은 제각각이다. 다름을 틀림으로 오독하는 확신범들이 많을수록 오해는 이해의 강에 이르지 못한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라, 차이일 뿐이다. 거기서 타자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것이다. '타자 윤리학'으로 우리들의 도덕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타자 윤리학"을 말하는 레비나스는 이런 말을 했다. "타자는 나에게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얼굴로 나타내는 현현(epiphany)에 의해 나에게 의무를 지운다." 이러한 의무에 따라 타자로 향한 정향성으로 말미암아 인간 간의 유대와 연대가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 레비나스의 주장이다. 그는 "제대로 된 정의는 타자로부터 시작 된다"고 말했다. 오늘은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후안무치로 "얼굴로 나타나는 현현"을 느끼지 못해 그런지 점점 더 세상이 삭막하다.
레비나스의 철학, '타자 윤리학'은 다음과 같이 5단계로 잘 요약할 수 있다. 이를 나는 <"윤리적 주체'로 거듭나기의 5단계>라고 말하고 싶다.
- 'Il y a(일리야)"라는 존재의 심연 인정: 웅성거림만으로 존재하는 '거기 있음'의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임.
- 그렇지만 "향유"를 통한 이기적이고 주체적 자아 확보: 주체적인 동일성 세상에서의 "향유"를 통해 자신의 주체성을 찾아가는 초월 시도.
- 타자에 대한 환대와 타자의 얼굴을 통한 관계적 만남: 나는 이를 '접속'으로 이해한다.
- 타자 학습을 통한 타자 되기: 이를 통해 타자의 세상이 드러난다.
- 많은 타자를 통한 무한의 경험(무한의 세상을 목격)을 통한 "윤리적 주체"로 거듭난다.
정리하면, Il y a(일리야, '거기 있음') → 향유 → 환대, 얼굴 → 타자 되기 → 무한 경험을 통한 윤리적 주체가 된다.
- 1에서 2로 초월:
'그저 있음(Il y a)'의 세상에서 초월해서 사랑도 해가며 삶을 향유도 해가며 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동도 해가며 미래를 대비해가며 집에 소유도 축적해가며 사는 삶으로부터 초월하여 자신의 주체적 자아를 찾는 일이다. 우선 향유가 필요하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향유’(frui)와 ‘사용’(uti)을 구분한다. 사용이 대상을 자기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것이라면, 향유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것이다. 향유는 가장 온전한 사랑함이다. 향유의 능력을 잃어버리는 순간 타자들과 허물없이 순수한 사귐은 불가능 해진다. 사용할 것을 많이 소유하는 것을 성공의 가늠자로 삼을 때 사람은 욕망의 종살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분주함이 사회적 신분에 대한 표징으로 인식되는 세상에서 한가로움은 덕이 아니라 게으름으로 받아들여지기 일쑤이다. 가속의 시간에 적응하며 사는 이들은 아름다운 풍경이나 예술품 앞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아니, 오래 머물지 못한다. 시급히 처리해야 할 일에 몰두하는 동안 향유의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향유를 통한 주체성과 동일성으로 쌓인 재현의 세상을 통해 내 영혼이 부르는 길을 따라갈 수 없는 것이다. 다음 단계가 필요하다.
- 3에서 4로 무한의 세계로 확장:
자아실현을 넘어선 타자 되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타자의 얼굴에 대한 환대가 제대로 자신의 주체성을 초월하여 윤리적 주체로 거듭나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한다. 타자의 세상은 능력이 있고, 재능이 있고, 부모를 잘 만나 세상의 행운을 다 향유해 온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낮춰 타자를 환대할 때 스스로 드러나는 세상이다.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니라 현현(ephiphanie)된다. 타자의 세상이 그냥 모습이 드러난다. 이 때, 잘난 사람들이 자신을 낮출 때 타자는 그 잘난 이들에게 스승이 된다. 행운을 만끽해온 장본인인 나는, 타자를 환대해가며 타자 되기를 공부하기 시작할 때, 재현에 의해 구성되었던 우주에 균열이 생기고 이 균열을 빠져나가, 무한의 세상을 목격하게 된다. 나의 세계가 확장된다.
- 4에서 5로 "윤리적 주체"로 거듭 남:
환대를 통한 무한의 세계를 경험하면, "윤리적 주체"로 거듭난다. 다시 말하면, 환대를 통해 향유하는 주체가 초월 되어 "윤리적 주체"가 될 때 자아실현을 넘어서는 "타아(他我, 윤리적 주체)" 실현의 강한 무한 세계가 펼쳐진다는 이야기이다.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학'에서 조심해야 할 것은 전제가 있다는 거다. 몇 차례의 초월을 통해서 "타아(윤리적 주체)" 실현의 세상에 도달한다는 점이다. "일리야"의 세상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현존재가 그냥 "타아" 실현할 수 있는 도약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레비나스는 '공공(公共)의 철학'이다. 자아실현이라는 <정신모형 1>의 세상을 넘어서 "타아" 실현이라는 <정신모형 2>의 세상을 플랫폼으로 구축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높은 곳에서 더 고르게 평평한 운동장을 만들어 변화를 실현시키려는 철학이다. 윤정구 교수의 해석이다. 동의한다. 물론 자아실현이 안 된 사람이 '타아'실현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허구이다. 자신의 주체적 독립의 토대를 마련한 후 타자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시스템을 설계할 수 있는 자가, 내 방식대로 말하면, '위대한 개인'이다.
레비나스 철학이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남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내재화해 이를 위해 행동으로 나서는 긍휼(矜恤. 불쌍히 여겨 돌보아 줌)과 환대(歡待, 반갑게 맞아 정성껏 후하게 대접함)의 기반이라 보기 때문이다. 긍휼감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넘어져 피 흘리고 있는 타자의 얼굴을 통해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거다. 그리고 그 질문에 응답해 자신의 주체성, 동일성, 전체성의 가면을 벗고, 타자의 고통의 가면을 쓰는 것이다.
이런 '타자 되기'를 실현하는 세상은 결핍의 해결을 추구하는 자아실현을 향한 욕구의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다. 레비나스는 이 '타자 되기'를 실현하는 세상을 여성성으로 설명한다. 자신의 고통에 대한 환대를 제대로 해 본 사람만이 타인의 고통의 얼굴에 대한 환대로 이어간다. 그게 여성성이다. 인간은 누구나 성장의 고통을 앓는다. 자신도 성장의 고통을 가지고 있고, 이런 자신의 성장의 고통에 대한 직면이 레비나스가 말하는 여성성이다. 이 여성성은 내가 동일성의 집에 거주하고 있어도 나에 대한 환대를 느끼는 나의 얼굴이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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