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3월 9일)
오늘 아침은 주말농장에 나갈 생각이다. 그전에 언젠가 적어 두었던 다음 내용을 다시 읽게 되었다. 다시 공유한다. 마음을 다시 차분하게 할 의도이다. 가장 먼저 만난 문장은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은 당신이 알지 못하는 상처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서로에게 친절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누구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을 여행하고 있기 때문이다”(류시화 시인)였다.
'상처입은 치유자'를 칼 융은 "운디드 힐러(Woundes Healer)"라 했다. '운디드 힐러'는 치유 과정에서 자신의 상처를 도구로 사용하여 자신의 상처뿐만 아니라 타인의 상처도 돌보는 사람으로서, 비슷한 아픔을 경험하는 타인을 도울 수 있는 민감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나의 경우도, 내 상처가 나를 치유해 주었다. 거기서 배운 것이 삶에 직접 맞서는 것이다. 그때 상처는 미지의 영역에 들어설 때의 안내자가 아니라, 눈앞의 실체를 통해 체화되는 삶의 가치는 효율과 비효율의 기존 상식을 깨트렸다. 삶은 설명을 듣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지름길로 가지 않고 경험자의 조언에 의지하지 않고 직접 맞서는 것이다. 경험자들의 조언에 매달려 살아가는 사람들보다는 불확실성의 세계로 직접 뛰어들어 결국 삶이 답을 알려줄 것이라는 차원에서, "안전하고 확실한 것에만 투자하는데 관심이 있다면 당신은 행성을 잘못 선택한 것이다"라는 페마 초드론의 생각에 나는 동의한다. 새는 날아서 어디로 가게 될지 몰라도 나는 법을 배운다는 진리가 삶의 두려움을 제압하며 큰 용기를 준다.
“생의 한때에 자신이 캄캄한 암흑 속에 매장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어둠 속을 전력 질주해도 빛이 보이지 않을 때가. 그러나 사실 그때 우리는 어둠의 층에 매장된 것이 아니라 파종된 것이다. (중략) 세상이 자신을 매장시킨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을 파종으로 바꾸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나는 아픔과 좌절의 어둠에 매장된 것이 아니라 파종된 것이다. 매장과 파종은 땅 속으로 들어가는 공통점이 있지만, 결과 하늘과 땅사이처럼 차이가 난다. 그 의미를 바꾸는 것은 나 자신이다.
"영혼을 돌본다는 것은 자신의 내적 삶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영혼을 가진 육체가 아니라 육체를 가진 영혼임을 아는 것이다.” 이 말을 한 류시화 시인은 자신의 책에서 토머스 모어(Thomas Morus)의 <<영혼의 돌봄>>이라는 책을 소개했다. '영혼의 돌봄'이란 말 그대로 영혼을 보살피는 것이다. 몸을 위해 좋은 음식을 먹고 규칙적인 운동을 하듯이 자기 영혼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것이다. 토마스 무어에 의하면, 영혼을 소홀히 하면 의미 상실, 무기력, 관계에 대한 환멸, 자기 비난, 폭력성과 중독 증세가 나타난다고 한다.
플라톤은 '영혼의 돌봄'을 '삶의 기술'이라 정의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한 참 말을 달리다가 멈추곤 한다. 왜냐하면 영혼이 뒤 따라올 시간을 주기 위해서라 한다. 바쁠수록 영혼을 챙겨야 한다. 류시화 시인은 이런 일화를 소개한적이 있다. 한 남자가 너무 일을 많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밤중에 잠이 깬 그 남자는 숨이 막힐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음 날 그 남자를 진찰한 의사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영혼이 주인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어서 다른 어딘 가에 떨어져 있소. (…) 자기만의 장소를 찾아 그곳에서 당신의 영혼을 기다려야만 하오." 그 외에도 류 시인은 영혼을 돌보려면, 명상이나 독서뿐 아니라 여행, 예술 활동, 자연과 가까워지는 일도 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일상 속에서는 건강한 음식, 만족스러운 대화, 기억에 남을 뿐 아니라 감동을 주는 경험들도 영혼에 자양분을 선물한다고 한다는 거다. 그리고 예술 감각을 가지라고 했다. 예를 들어 커피를 마시거나, 와인을 마시는 것과 같은 평범한 행위를 예술 감각으로 수행하는 것은 영혼을 성장시킨다는 거다. 예술은 세계를 더 심층적으로 보게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국은 가장 경쟁적인 사회이다. 그런 경쟁이 가져다 주는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이 문제를 김기석 목사는 다음과 같이 인터뷰에서 말했다. “경쟁은 자극을 주어 성과를 내게 하는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이다. 그러나 경쟁을 내면화 하는 순간, 협력해야 할 때도 경쟁하고, 이완해야 할 때도 긴장하게 한다. 타인을 밟고 올라가도 아래에서 잡아 끌지 모르니 불안할 수밖에 없다. 경쟁은 타자를 소중한 이웃으로 보지 못하고 우리 마음에 차단 막을 치곤 한다. 인간은 본래 경쟁하는 주체로 만들어진 것일까? 소설가 존 쿳시는 ‘경쟁은 전쟁의 순화된 대체 물’이라고 말했다. 경쟁은 사람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이지 필연적인 삶의 양식이 아니다. 경쟁은 평화나 공존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우리의 강강수월래는 높낮이가 없다. 원 밖에서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을 보면 ‘왜 밖에 있느냐’면서 손을 잡고 함께한다. 그러면 원이 더 커지고, 더 흥겨워진다.”
생명체의 관계는 크게 4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포식(捕食), 기생(寄生), 경쟁(競爭), 공생(共生)이 그것이다. 포식과 기생은 상대에게 해를 끼치면서 자기 이득을 취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필연적으로 타자의 반격을 부를 수밖에 없다. 포식을 생존 수단으로 삼는 호랑이나 늑대가 멸종위기에 처하고, 기생의 대표 격인 칡덩굴이 인간의 손에 의해 제거되는 것은 그런 이유이다. 자원이 유한한 환경에서 생명체는 서로 경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나친 경쟁은 모두에게 해가 된다. 공생이 완전히 배제된 파멸적 경쟁은 종의 번성에 기여하기는 커녕 쇠락을 초래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가장 성공적인 생존전략은 공생이라고 할 수 있다. 벼, 밀, 옥수수, 과일, 가축 등이 지구상에 번성한 것도 공생 전략을 생존 수단으로 삼은 덕분이다. 인간은 이들에게 열매와 고기 등을 얻는 대가로 이들이 서식할 환경을 마련해준다. 식물들이 곤충들에게 꿀을 주고 곤충들이 꽃가루를 옮기는 것 역시 공생원칙에 충실히 따른 행동이다.
이러한 경쟁 속에서, 희망이 없다며 절망하는 청년들에게 김기석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냉소나 허무주의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세상을 직시해야 한다. 물질주의의 챔피언들이 만든 게임의 법칙을 따르기 보다는 자신의 길을 만들려는 의지와 당당함이 필요하다. 분명한 것은 누구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투덜거린다고 내 인생이 좋아진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 소비 패턴을 따라가면서 수입과 욕망 사이에 갭을 메울 수 없어 투덜거리는 것은 병적 징후다. 내 삶 속에서 제법 쏠쏠한 것들을 찾아내 주체적으로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은 머무는 곳 어디에서나 삶을 작은 축제로 바꿨다. 길들여지는 것처럼 슬픈 게 없다. 광고나 매스컴이 만든 삶만 동경하며 ‘살 맛 없다’고 하기보다는, 익숙한 데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찾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여기도 제법 좋은 삶이네'라고 자족하는 삶이 되면 좋겠다.”
가난해도 행복한 사람은 자연스럽고 평화롭다. 왜? 세상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렇게 된다. 애정은 내 마음에서 나온다. 그 내 마음으로 내 영혼을 돌보면 된다. 예컨대, 우리 스스로 지금 하고 있는 일에 감사하고, 그 일의 근원을 스스로에게 물을 필요가 있다. 자발성의 문제이다. 자아의 중심에서, 남이 말하는 것을 무시하고, 어떤 일을 행할 때 감정과 감수성의 꽃이 피어난다. 마치 새가 하늘을 만나면 기쁨의 원천과 하나가 되듯이 말이다.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기쁨의 샘을 막지 말아야 한다. 세상을 한 번 둘러보라. 완벽한 곳은 없다. 또한 아무리 부정하거나 외면하려 해도 아름다운 것을 한 가지라도 발견할 수 없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두 사람 있으면 사물을 바라보는 두 가지 방식이 있게 된다. 60억의 사람이 있으면 60억 개의 세상이 있게 된다."(류시화,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우리가 삶에서 받는 가장 큰 유혹은 무엇인가? 김기석 목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자기가 중요한 사람으로 대접받고 싶은 유혹이다. 그러면 평가의 기준이 내 쪽이 아닌 저쪽에 있다. 저 사람 마음에 맞는 말과 행동을 해야 하니 불행해진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에게 유혹 받은 것도 세 가지다. 먼저 40일 금식한 예수에게 돌을 떡으로 바꾸라고 했다. 물질적 풍요에 대한 유혹이다. 두 번째로 성전에서 뛰어내리라고 했다. 신비에 대한 유혹이다. 세 번째로 자기에게 절을 하면 만국을 다스리게 해준다고 했다. 권력에 대한 유혹이다. 그런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야 말로 참사람, 큰사람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가장 큰 저항은 자족하는 삶이다.” 오늘 아침 사진은 우리 동네 공원에서 찍은 거다. 이 목련 꽃을 보면서, 나는 절대로 남을 위해서 자신이 뭘 한다 거나 혹은 예언하거나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산다는 것은 그냥 아니 그저 세상에 꽃 한 송이가 피듯이 그냥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꽃이 핀다/문태준
뜰이 고요하다
꽃이 피는 동안은
하루가 볕 바른 마루 같다
맨 살의 하늘이
해종일
꽃 속으로 들어간다
꽃의 입시울이 젖는다
하늘이
향기 나는 알을
꽃 속에 슬어 놓는다
그리운 이 만나는 일 저처럼이면 좋다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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