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지난 3월 초부터 다시 <장자> 함께 읽기를 시작했다. 매주 목요일 오후 두 시에 만나 <장자> 원문을 읽으며, 사는 이야기를 장자에 빗대어 말하며, 스스로 성찰한다. 어제는 제4편 인간세(人間世, 사람 사는 세상) 7-10절을 읽었다. 이 4편의 인간세란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란 뜻이다. 이 편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특히 복잡하고 비정한 사회, 정치적 상황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개인적으로 훌륭하게, 자유스럽게 사는 것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진정 기여(寄與)하면서 보람 있게 사는 길인지를 보여 준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을 굶기는 것(心齋)'이다. 이 말은 사회나 정치에 효과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우선 마음을 비우고 도(道)와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라는 것이다. 세상과 무관하게 사는 은둔주의나 도피주의가 아니다. 진정 건설적이고 효과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우선 의식을 고치고 차원 높은 방도를 터득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성숙한 성찰과 노력으로 시선의 높이를 올리는 일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함께 읽기를 마치면, 5-6의 키워드 뽑아 일상에서 실천하기로 정했다. 어제 읽은 부분에서 나는 6 가지 화두를 얻었다. (1) "단이허, 면이일(端而虛, 勉而一)" "단정하고 겸허하며 근면하고 오로지 하나에 전념 한다."는 말이다. 난 여기서 이상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 4가지가 이 거라고 생각한다. 단정, 겸손, 근면 그리고 일념(잡다하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거나 하는 일이 아님) (2) "일점지덕성(日漸之德成)"해야 대덕자(大德者)가 된다. "나날이 덕을 닦는 일"을 해야 "큰 덕"을 가진 사람이 된다. 내가 살고 있는 대전의 '대덕 연구 단지'가 생각난다. (3)"집이불화(執而不化)" 고집 또는 집착은 우리를 변화 시킬 수 없다. 다르게 발하면 설득할 수 없다. 원래 문맥에서는 위 왕이 고집이 쎄서 꺾을 수 없다고 하는 문맥에서 가져온 것이다. (4) 삶의 세 가지 길을 보여준다. ① 하늘과 함께하는 삶=동자(동자, 어린아이)의 사람으로 "여천위도(與天爲道)"라 한다. ② 인간들과 함께 하는 삶. 여인위도(與人爲道)라 했다. ③ "여고위도(與古爲道)"라고, 옛 사람과 함께 하는 삶이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5) "다정법(多政法)은 '불첩(不諜)'이다. "꾸밈이 너무 많아 좋지 않다"는 말이다. (6) 유사심자(猶師心者)는 "가이급화(可而及化)"하지 못한다. 오로지 가르치려는 흑심을 가진 자는 상대를 변화 시킬(설득할) 수 없다. 나는 감화력(感化力, 좋은 영향을 주어 생각이나 감정이 바람직하게 변화하도록 하는 힘)이란 말을 소환했다.
아침 사진은 몇 일전에 동네 공원의 산수유 꽃을 찍은 것이다. 봄에는 참 여러 가지 꽃들이 핀다. 제일 먼저 봄을 기다리는 꽃은 동백꽃, 성급해서 눈 속에서 핀다. 그 다음은 버들강아지-갯버들 꽃, 다음은 산수유와 매화 그리고 목련이 이어진다. 병아리가 생각나는 개나리가 거리를 장식하는 동안, 명자나무 꽃, 산당화 그리고 진달래가 봄 산을 장식한다. 바닷가에서는 해당화가 명함을 돌린다. 다음은 벚꽃이 깊어 가는 봄을 알린다. 그 사이에 마을마다 살구꽃, 배꽃, 복숭아꽃이 이어진다. 그 끝자락에 철쭉도 자신의 순서를 기다린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는 기후변화가 아니라, 기후위기라며 봄에 꽃이 피는 순서가 없이 동시에 피면서 화란춘성(花爛春盛, 꽃이 만발한 한창 때의 봄), 만화방창(萬化方暢, 따뜻한 봄날에 온갖 생물이 나서 자라 흐드러짐)이었는데, 올해는 비교적 위의 순서를 잘 따르는 듯하다. 지금은 산수유와 매화가 한창이다. 오늘은 비가 와서 못 나갔다, 아마도 이 비 그치면, 여러 꽃들의 봉우리가 막 터질 것이다. 코로나-19로 시간이 많아 고전을 꼼꼼하게 다시 읽은 것은 즐거운 일이다. 영혼이 살찌며 근육이 생기는 듯 하다. 오늘 시처럼, 꽃을 통해서도 허공을 읽고 싶다. 오늘의 화두는 '허(虛)'이다. 비우는 것이다.
꽃을 통해 허공을 말하는 법/박남희
나는 어느 날
당신이 말하는 것이 허공을 말하는 것 같아
당신이 문득 꽃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지
꽃은 자신이 허공에 있다는 것을 모르지
자신의 안에 허공이 있다는 것도
하지만 뿌리는 꽃을 통해 허공을 말하는 법을 알고 있지
그런데 한차례 꽃이 피어나고 시드는 허공의 이치를
뿌리는 왜 끝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인지
그러면서 실뿌리는 점점 땅 속 깊이 뻗어가
낯선 돌을 만지고 샘을 더듬다가
어둠의 차디찬 깊이를 만나고 끝내 꽃을 떨구게 되지
아름다움은 모두 한차례의 흔들림으로 기억되는 것인지
허공은 자꾸만 꽃을 흔들고 꽃은 점점 외로워지지
그렇게 꽃은 떨어져 시들어가지
꽃이 외롭게 흔들리다 만들어낸 흔적이
다시 허공이 된다는 것을 바람은 알고 있지
그렇게 만들어진 텅 빈 커다란 꽃이 허공이라는 것을
아무도 가르쳐주는 이가 없어도
허공은 텅 빈 꽃으로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지
당신과 내가 마주 보며 흔들려서 만들어낸
바람의 바깥, 저 허공의 언어가
꽃이라는 것은 영원히 당신과 나만이 알지
다시 또 <장자> 이야기를 한다. 매주 금요일에는 동양 고전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최근에 우연히 만난 한 블로그에서 딱 떨어지는 주장 하나를 만났다. <장자>에 흐르는 하나의 흐름을 다음과 같이 말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심과 사심을 버리고 허심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상이 복잡하고 얽혀 있다할지라도, 지금-여기서 편안한 상태를 얻을 수 있는 ‘동어대통(同於大通, 위대한 도와 하나가 됨)’의 길과 ‘어떻게 사는 것이 온전해지는 삶의 길인 가’를 중심으로 장자의 철학을 정리해보면, 북명의 ‘곤'이라는 물고기가 ‘붕'이라는 큰 새로 변신하여 남명을 향한 사유 여정에서 도달한 목적지가 ‘나 없음’(無己)이라는 것과 ‘나 없는 마음’(虛心) 앞에 현현하는 세계가 곧 ‘제물(濟物)의 세계'라는 것이었다. 만물제동(萬物濟同, 만물은 도의 관점에서 보면 등가이다)인 ‘제물의 세계’는 긴 것은 긴 대로, 짧은 것은 짧은대로 ‘있는 그대로의 평등한 세계’라는 것이다. 따질 것 없다.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말이다. 다만 나는 나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하고는 피할 뿐이다. 다시 말하면, 나를 존중하지 않는 이를 곁에 두지 않겠다는 말이다. 마참가지로 내가 상대를 존중할 수 없다면 따로 관계를 돈독히 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나 허심은 늘 유지한다.
이런 만물제동, 즉 평등은 허심에서 비롯되며, 허심에 도달하기 위한 공부인 좌망(坐忘)과 심재(心齋)는 더하기 공부가 아닌 걷어내는 공부, 즉 해체 시키는 공부이다. 이 길은 다음과 같이 네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성심에서 사심으로 가지 않고, 허심으로 가는 기는 네 가지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용선 선생의 블로그와 그의 멋진 책 <장자, 나를 해체하고 세상을 해체하다>에서 얻은 생각 갈무리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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