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88.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3월 9일)
1.
인간 평균을 깎아 먹는 개들이 판을 친다. 세상이 개판이다. "척구폐요(跖狗吠堯)"라는 말이 있다. 역사는 이 말을 "걸견폐요(桀犬吠堯)"로 바꾼다. 개들의 이야기이다. 인간 평균을 깎아 먹는 자들로부터 공동체의 수준을 지키려면, 인간 평균을 끌어올리는 사람이 더 많아야 한다.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紂)왕은 주색에 빠져 포악무도한 정치를 일삼다가 주(周)나라의 시조인 무왕(武王)에게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 무왕은 문왕(文王)의 아들이다. 요순(堯舜)이 성군의 대명사라면, 주(紂)는 하나라의 걸(桀)과 함께 '걸주(桀紂)'라 하여 폭군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걸견폐요(桀犬吠堯)'라는 고사성어가 여기서 나온다. 이 말은 '걸주같이 포악한 인간이 기르는 개가 요(堯)와 같은 성군(聖君)을 보고도 짖어댄다'는 뜻이다. 개는 주인만을 알아볼 뿐 그 밖의 사람에게는 사정을 두지 않는다는 거다. 나아가서 인간도 상대의 선악(善惡)을 가리지 않고 자기가 섬기는 주인에게만 충성을 다한다는 뜻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목격된다. 진정한 '충(忠)'은 시대불문 필요한 덕목이다. '충(忠)'은 '가운데 중(中)'과 '마음(心)'으로 구성돼 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심을 지키는 행동지침이다. 주자는 "자기의 최선을 다하는 것(盡己之謂忠)"이라고 풀이한다. '주인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식을 갖고 본분을 다하는 것'이다. '주인에 대한 충성'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은 충의 의미를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오늘 공유하는 이승하 시인은 "낮과 밤/둘 중 하나를 택일하라면/난 밤의 하수인"이라며 스스로 ‘어둠’의 편에 선다. 그리고 "별 한 개 보이지 않는 이 어둠 속에서/두 눈 부릅뜨고/날 밝기를 기다리리’라고 다짐한다. 이렇게 캄캄한 어둠의 세계에서 그의 역할은 "감시하듯이, 아니, 망을 보듯이"라는 마지막 문장에 함축돼 있다. 나도 이 어두운 시국에서 감시하고 망을 본다. 그리고 오늘 아침 사진처럼, 잘렸어도 봄을 기다린다.
태초의 어둠/이승하
태초에는 모든 것이 어둠이었으리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고
생명이 있으라 하니 숨 쉬게 되었으리
우리는 모두 어둠으로부터 왔기에
잠을 잘 때는 눈 감는 거지
신이여
임종 이후에 내가 있게 될 세계가
어둠인지 밝음인지 가르쳐 주오
나 탄생 이전의 세계가
어둠이었는지 밝음이었는지 가르쳐 주오
낮과 밤
둘 중 하나를 택일하라시면
난 밤의 하수인
별 한 개 보이지 않는 이 어둠 속에서
두 눈 부릅뜨고
날 밝기를 기다리리
감시하듯이, 아니, 망을 보듯이
2.
'걸견폐요(桀犬吠堯)'는 <<사기(史記)>의 <회음후편(淮陰侯篇)>에 나오는 고사이다. 원래는 '도척(跖狗)의 개가 요임금을 보고 지는다(跖之犬吠堯, 척지견폐요)'였다 한다. 요(堯)는 '흙을 높이 쌓고 그 위를 평평하게(兀) 만들었다는 데서, ‘높다’, 즉 ‘요임금’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진나라 말 때 괴통이라는 책사가 있었다. 어느 날 괴통은 한신을 찾아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지금 항우는 남쪽을 차지하고 있고, 유방은 서쪽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세력은 서로 우열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팽팽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왕께서 누구와 연합하느냐에 따라 천하의 대세는 좌우 될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항우가 망하면 대왕의 신변은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이 기회에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동쪽을 대왕께서 차지하고 대세를 관망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일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한신은 며칠을 두고 고심하다가 결국은 포기를 하고 말았다. 얼마 후 유방에 의해서 천하가 통일됐다. 그리고 한신은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했다. 한신은 죽음 직전에 이르러 “나는 괴통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참으로 후회스럽다”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을 전해들은 유방은 괴통을 잡아들였다. 그리고 그는 괴통에게 물었다. “네가 한신에게 반역할 것을 권고한 것이 사실이냐?” “예 그렇습니다. 신이 반역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제 말을 듣지 않아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화가 난 유방은 그를 기름 가마에 삶아 죽이라고 명했다. 이때 괴통은 원통함을 하소연하며 말했다. “도척 같은 도둑놈의 개도 요임금을 보면 짖습니다(跖之狗吠堯, 척지구폐요). 요 임금이 어질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개는 원래 주인 이외의 사람을 보면 짖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개가 짖는다고 탓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한신만을 알고 있었을 뿐 폐하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신에게 충성을 다한 것입니다. 이런 저를 삶아 죽인다면 세상 사람들은 폐하를 비웃을 것입니다.”
3.
유방은 괴통의 말을 듣고 한참을 망설인 끝에 살려 주었다. 이 때부터 '척구폐요'가 '걸견폐요'가 된다. 이 말은 ‘개는 주인만을 섬긴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두 가지 교훈을 준다.
▪ 개가 오로지 주인만 알아보듯, 사람들이 양심의 판단에 따르기 보다는 맹목적으로 윗사람에게 충성함을 한탄하는 말로 읽는다. 악한 자와 한패가 되어 어진 이를 미워하거나 또는 선악을 불문하고 각기 그 주인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거다. 개는 그냥 자신의 주인이기 때문에 충성하지 그 사람의 인성과 인품을 보고 충성하지 않는다는 거다. 자신의 주군을 잘 못 만나 결과적으로 개가 된 인물들이 역사 속에 많다. 조심하여야 한다. 까닥 잘못하면 바로 개새끼가 될 수 있다.
▪ 요즘은 여러 주인을 섬기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낯선 사람을 보고 짖기보다는 여기저기 꼬리치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특히 정치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적과 동지가 수시로 바뀌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선거철만 되면 철새 정치인 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온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이 있듯이 일은 반드시 바른 데로 돌아가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때문에 허상과 미몽에 사로잡혀 철새가 돼서는 안 된다. 세상이 각박해 질수록 우리 모두는 마음의 중심을 잡고 의리와 정도를 지켜야 한다. 그것이 바로 '걸견폐요'의 교훈일 수도 있다.
3.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병패들, 즉 탐욕과 이기주의, 과잉 히스테리, 갈등과 긴장들의 원인은 어른다운 어른이 없는 탓이다. 미숙한 인격체들이 만드는 사악함은 부의 양극화, 약자에 대한 자별, 공정성과 정의의 실종, 동물 학대와 생명 경시, 살인과 폭력으로 드러나고, 바로 이것이 우리 사회를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지옥으로 몰아넣는다. 쩨쩨하고, 자기 중심적이며, 남의 고통에 무감각하거나 관심이 없고, 매사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이들에게는 어른 품격이 없다. 어른이란 소란과 허장성세로 갈팡질팡 하거나 말초 감각에 휘둘리고, 욕구와 충동에 따라서는 안 된다. '어른 다움'이란 절제와 포용, 관대함, 높은 자존감과 윤리 의식을 두루 갖춘 인격과 삶의 태도에서 나온다. 타인을 향한 사리와 분별이 깊고, 앎과 행동이 하나이며, 연륜과 나이에 맞는 교양과 예의로 품격을 드러내는 이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미래 세대에게 삶의 푯대가 될 수 있는 어른이 많은 사회가 좋은 사회이다.
결국 어른의 품격이란,
▪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닌 주변과 세상을 품을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
▪ 어떠한 상황에서도 소중한 자신을 케어 하는 일에 소홀하지 않으며 타인을 배려하는 일에 성심성의를 다하는 것이다.
이러한 품격은 곧 진정한 ‘자기 다움’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4.
'체면(體面)'이라는 말로도 쓰인다. 말 그대로 하면, '체면(體面)'은 '남을 대하는 관계에서, 자기의 입장이나 지위로 보아 지켜야 한다고 생각되는 위신. 체모. 면목. 모양새', 또는 ‘남을 대하는 도리’를 말한다. 이 사전적인 뜻 자체는 나쁘지 않다. 그런데 “체면이 깎이다” “체면이 말이 아니다” 등 부정적인 용례가 대부분이다. “체면이 서다”는 말도 겨우 낭패를 면했다는 수세적인 긍정에 불과하다. 체면이 서도록 일부러 하는 행동을 가리키는 ‘체면치레’ 역시 기분 좋게 쓰는 말은 아니다. 실속도 없이 체면만 차리는 것은 근대화 과정에서 악습으로 지목돼 왔다. 나의 내면을 성찰하기보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 관심을 두는 것이므로 체면에 매여 행동하는 게 바람직할 리 없다. 주로 신분이나 지위에 따라 주어지는 속성이 크다는 점도 문제다. 다만 대개 그렇듯 급격한 변화는 부작용을 낳기 쉽다. 체면 따위는 중요치 않다는 인식이 팽배하고 명분보다 실리를 좇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면서, ‘이름’을 중시하는 삶이 지니는 가치마저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되고 있다. 요즈음 보이는 일부 정치인들의 모습에서 그것들을 본다.
5.
체면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초개처럼 버리던 시대, 사대부로서 궁형의 치욕을 안고 목숨을 부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사마천이 죽음을 피하고 궁형을 택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이름’ 때문이었다. 사마천으로서는 죽음 자체보다 더 두려운 것이 명분 없는 죽음이었다. 투항한 장수를 위해 말 한마디 잘못 꺼냈다가 죽는다면, 절의를 위한 죽음으로 인정 되기는 커녕 그저 아홉 마리 소에서 털 하나 없어지듯 아무런 이름도 없이 허망하게 죽는 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연명한 시간을 사마천은 이름을 남기는 일에 바쳤다.
백이 숙제처럼 훌륭한 이들은 비참하게 죽어가고 도척같은 천하의 악인은 승승장구 천수를 누리는 부조리를 해결하는 길 역시 이름에 있었다. 공자라는 천리마의 꼬리에 붙음으로써 안연의 이름이 사라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처럼, 이제는 그렇게 잊히고 말 이름들에 자신이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겠다는 다짐이 <<사기>>의 완성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와 함께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 본인의 이름도 지금까지 남았다. 나의 이름이 어떻게 남을 까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삶들이 활개 치는 세상에서, '체면'을 넘어 ‘이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6.
<<장자>> 외편 <거협>에 수천명의 도둑을 거느린 도척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부하가 도척(盜跖)에게 "도둑에게도 도가 있습니까?"라고 묻자 도척이 말했다. "어찌 도(道)가 없겠느냐? 집안에 무엇이 감춰져 있는지 아는 것이 성(聖)이고, 물건을 훔칠 때 앞장서는 것이 용(勇)이고, 훔친 후 마지막에 나오는 것이 의(義)이고, 훔친 물건을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 인(仁)이며, 그날의 일이 잘 될지 안 될지를 아는 것이 지(智)이다. 이 다섯 가지를 갖추지 않고서 대도가 된 자는 아직 이 세상에 없다."
도척(盜跖)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전설적인 도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도척 으로 활동할 때는 무려 9000여 명의 부하를 이끌면서 제후를 공격하고 약탈할 정도로 기세가 막강했다고 한다. 심지어 사람의 간을 먹었다는 얘기가 전해질 정도로 무자비한 도적이었다. 이를 두고 사마천은 "인육 먹은 도척 같은 놈이 집에서 편안하게 죽고, 백이 숙제 같은 선인은 굶어 죽었다"라면서 악인은 천수를 누리고 백이 숙제 같은 선인은 비참한 최후를 맞는 현실을 꼬집었다. 악(惡)을 제대로 심판하지 못한 세상에 대한 탄식이었다.
무자비한 성격에다가 막강한 힘을 지닌 도척이 세상에 끼친 해악은 그만큼 컸을 것이다. 그런 도척이 도(道)를 논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그는 도둑질을 할 때에도 지켜야 할 원칙으로 성(聖), 용(勇), 의(義), 지(智), 인(仁)의 다섯 가지 도(道)를 제시했는데, 이를 '도척지도(盜跖之道)'라고 했다.
▪ 성(聖)은 훔칠 집의 모든 물건을 파악하는 능력
▪ 용(勇)은 위험을 무릅쓰고 가장 먼저 집에 들어가는 용기
▪ 의(義)는 마지막까지 남아서 도둑질의 책임을 다하는 것
▪ 지(智)는 성공과 실패를 미리 예측하는 지혜
▪ 인(仁)은 훔친 것을 공평하게 나누는 것
그러나 이는 도척이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도둑도 최소한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아닌가? 문제는 세상이 혼탁할수록 이런 주장이 횡행한다는데 있다. 혼돈이 가중되고 미몽에 빠진 이들이 늘어나면, 도척이 강변했던 주장들이 현실처럼 받아들여지기 십상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일부 '도척'은 '도'마저 없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우리 사회는 무엇이 정의인지 조차 알 수 없는 혼돈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일방의 주장에 사로잡힌 아스팔트 위의 아우성은 우리 공동체의 근간까지 위협하고 있다. 악인은 천수를 누리고, 선인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탄식했던 사마천이 오늘의 우리 사회를 보고 무엇이라고 했을까?
7.
주요 사상가들은 반복해서 임금들에게 '겸양(謙讓, 교만하지 않고 상대방의 안쓰러움을 공감하는 것)의 덕'을 강조해 왔다. 왜냐하면 단기적으로는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임금들의 실덕(失德)과 패덕(悖德)이 나라를 기울게 만들고 망하게 했기 때문이 아닐까? 오늘 <인문 일지>의 인물인 주왕(紂王)의 사례가 잘 보여준다. 폭군의 상징과도 같은 걸주(桀紂)라고 할 때의 그 주왕이다. 사마천의 <<사기>> 의 <은본기>를 보면 주왕은 젊어서 누구보다 심신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주(紂)는 바탕이 명석하고 머리가 잘 돌아갔으며 재주와 힘이 남들보다 훨씬 뛰어나서 맨손으로 맹수들과 맞섰다. 지혜는 간언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였으며 말재주는 자기 허물을 교묘하게 꾸밀 수 있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난 임금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겸양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신하들에게 능력을 자랑해 천하에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려고 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겼다." 오히려 술과 음악을 지나치게 좋아했고 달기(妲己)를 아껴 달기의 말이라면 다 들어주었다는 것은 부차적 요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겸양하지 않은 리더가 보여주는 전형적인 문제점은 간언하는 신하를 용납하지 않고 아첨하는 신하를 가까이한다는 것이다. 훗날 주나라 문왕은 충신들을 그냥 죽여 없애는 주왕을 바라보며 혼자 탄식을 했다. 아첨꾼 숭후호(崇侯虎)는 이를 놓치지 않고 주왕에게 고자질했다. 당연히 주왕은 서백 문왕을 잡아들여 유리(羑里)라는 곳에 가두었다.
아첨이 조정에 자리 잡으면 이제 간신들이 설칠 차례다. 아첨하는 신하는 임금에게 총애나 조금 얻고자 하는 신하들이지만 간신들은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겸양할 줄 모르는 임금의 눈과 귀를 가린다. 보고를 숨기거나 왜곡하거나 방향을 틀어 임금이 실상을 알 수 없도록 만든다. 이미 조정에 충신과 직언을 할 수 있는 신하는 거의 사라져버렸다.
'겸양'을 잃어버린 주왕은 세상 흐름조차 놓아버리고 주색에 빠져들었다. 서백 문왕이 꾸준히 세력을 넓혀갔다. 조이(祖伊)라는 신하가 용기를 내어 주왕에게 실상을 아뢰었다. "지금 우리 백성들 가운데 (왕의) 멸망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모두 말하기를 '하늘은 어찌하여 천벌을 내리지 않으며 대명(大命-새로운 천명)은 어찌하여 이르지 않는가?'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제 왕께서는 이를 어찌 하시겠습니까?"
이에 대한 주왕의 답은 한심하기 그지없다. "내가 태어나서 왕이 될 수 있었던 명(命)은 하늘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오죽했으면 조이가 조정을 나와 "주(紂)에게는 간언이 불가능 하다"고 말 했겠는가? 왕이란 말도 빼 버렸다. 주왕은 얼마 후에 무왕에게 패해 상나라를 잃었다.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늘 겸양을 모르는 교만한 임금이 나라를 해치고 자기 몸도 잃는 경우를 많이 접하게 된다. 지금이라고 크게 다를까 싶다. 국민들이 힘들어하는 까닭이다. <논어등반학교장> 이한우의 <시사IN> 칼럼에서 얻은 생각이다. 누가 자꾸 연상되어 공유하는 거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인간은 자아실현의 과정을 통해 궁극적으로 행복에 이를 수 있다. (1) | 2025.03.10 |
|---|---|
| 나는 무엇과 더불어 향기로워질까 (0) | 2025.03.10 |
|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0) | 2025.03.09 |
| '도는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다.' (1) | 2025.03.09 |
| 잘 할 수 있는 일보다 매일 할 수 있는 일을, 큰 일이 아니라, 작은 일부터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하다. (0) | 2025.0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