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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인간의 언어까지 왜곡 되고 있다.

318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3월 3일)

1. 
최근에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에 혼란을 겪고 있던 차에, 내 마음에 쏙 드는 비유와 글을 만났다. 답은 몽둥이질이다. 그건 합법적으로 선거에서 투표로 말하는 것이고, 무는 개는 피하는 게 최고의 길이다. 김월회 교수의 <판을 뒤엎는 자와 몽둥이질>이라는 글이다.

바둑에는 이기는 수 아니면 지는 수밖에 없다. 상대보다 실력이 없다 거나 자신이 잘못해서 패색이 짙어 졌다면 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럴 때면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돌을 던짐이 떳떳한 모습이다. 적어도 양식 있고 도덕과 법률의 가치를 믿는 이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그 순간에 지는 수 외에 또 다른 수가 있다고 주장하며 그 수를 아무렇지도 않게 실행에 옮기는 자들이 있다. 그 수는 다름 아닌 판을 뒤엎는 수다. 승패를 확정 짓기 전에 판을 뒤엎었기에 자신이 졌다는 점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판을 뒤엎는 것은 룰에 어긋나며 몰상식하고 비윤리적이라 비판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지는 것보다는 뒤엎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했기에 뒤엎는 수를 결행했고, 또 자신은 그렇게 해도 될 만한 힘을 지니고 있었기에 그리했다고 눈 껌벅 이며 말할 뿐이다. 그래서 이렇게 자기에게 힘이 있다고 하여 판을 뒤엎는 사람을 두고, '몰염치하다', '무법하다', '사악하다'고 비판하는 건 무의미하다. 그런 비판은 염치 있고 양식과 이성을 갖추고 있으며, 사회규범과 법률을 지켜야 마땅하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는 분명 뼈아픈 타격감을 안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루저'들의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고, 기껏해야 아큐(아Q)식의 '정신승리법'일 따름이라고 여기는 이들에게는 아무런 타격도 되지 못한다. 그들은 판을 뒤엎어서라도, 그 결과 자신이 속한 집단은 결딴나든 말든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만 있다면, 당당하게 그리하는 것이 지혜이고 능력이며 도덕적, 사회적으로 떳떳한 행동이라 여긴다. 그래서 양식 있는 사람들, 사람다운 사람들의 기준으로 그들을 일깨우고 꾸짖는 것은 더없이 부질없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2. 
그러면 인간의 언어까지 왜곡 되고 있다. 헌재 결정조차 이행하지 않는 자가 국민 통합을 외치고 헌재를 쓸어버리자는 자들이 법치가 무너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언어를 전복 시키는 건 인간성 자체가 뒤집어졌기 때문이다. 내란 진압은 헌법 질서를 되돌리는 일에 그치지 않고 인간성이 뒤집어진 것들의 공격으로부터 인간성을 수호하는 일이다. 

정의와 인도(인간의 도리)가 우리 헌법의 요지이다. 그러나 윤은 군대를 동원해 정치적 비판 세력을 학살하려는 부정의 하고 반 인도적인 짓을 저질렀다. 이 자와 이 자의 행위를 지지하는 자들은 우리의 역사와 헌법을 짓밟는 '반역의 무리'이다. 나치는 대량 학살과 침략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자 국민의 정신에 독을 풀었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악랄한 살인마들은, 바로 파시즘에 중독된 정신이었다. 내란을 확실하게 진압하지 못하면, 저들은 계속해서 우리 국민의 정신에 '살인약독'을 퍼뜨릴 거다. 전우용 교수의 주장이다.

피소추인 측은 헌재 최후진술에서 비상계엄은 “계엄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라고 했다. 그리고 3.1절 광화문, 여의도 탄핵 반대 집회에서도 연단에 선 연사들이 이런 말을 하니 우레 같은 박수가 터졌다고 한다. 어떻게 계엄을 하면 대국민 호소의 효과가 있어 국민이 계몽된다는 말인가?  위헌, 위법의 문제는 차지하고, 윤10의 주장대로 당시 야당의 독주로 정부가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사실상 국가 비상사태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타개하는 방법은 비상계엄밖에 없었을까? 그리고 그 계엄은 과거의 계엄과 다른 것이어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할 의도도 없고, 국회의 기능도 막을 생각도 없었고, 국민들께 단지 상황을 알리고 호소하기 위함 이었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국민에게 호소하는 방법으로서의 비상계엄, 이게 선뜻 이해가 되질 않는다는 점이다. 계엄으로 ‘어떻게’ 국민들에게 호소를 한다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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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이란 국가 비상사태에서 병력으로(군대의 힘으로, 군대의 무장력으로) 공공의 안녕질서를 회복하거나 유지하는 거다. 예를 들어 전국적으로 소요가 발생해 경찰력만으론 도저히 감당이 안 될 때, 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투입해, 질서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것이 계엄인데, 어떻게 하면 군대를 동원하면서도 국민의 기본권은 제한하지 않으면서, 야당의 패악을 호소하는 그런 계엄이 가능할까? 그래도 다음과 같은 것들이 우리의 일상이 되었을 것이다.
▪ 군인들이 매일 광화문 광장에서 수십 대의 방송용 차량을 동원해 야당의 패악질을 가두 방송한다.
▪ 군인들이 방송국을 점령해 야당의 패악질에 대한 각종 프로그램을 만들어 하루 종일 방송한다.
▪ 군인들이 야당 국회의원을 붙잡아 수방사 지하 벙커로 데리고 간 다음, 그동안 대통령을 괴롭힌 것을 자백 받아, 그 내용을 방송한다.
   .
그런데 왜 윤10은 군대를 국회에 보내 의사당 침탈을 시도했을까? 당시 의사당에서 경찰력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소요 사태가 일어났던 게 아닌데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군대가 의사당에 진입하고자 한 것이 대국민 호소용 계엄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어떻게 계엄을 하면 국민들이 계몽이 되는 것일까? 다 '개소리'계몽이다.

'계몽(啓蒙, enlightment)'이란 '어둠을 연다'는 뜻이다. 프랑스의 18세기를 우리는 '계몽주의'라 한다. 이 말은 이전의 어두운 시대를 열러 밝은 세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18 세기를 '빛의 세기(siecle des lumieres)'라 했다. 이 말을 일본 사람들이 계몽주의로 번역하고, 우리는 그것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계몽'은 무지몽매한 인간들을 가르친다는 이야기 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어둠을 연다'는 뜻으로 보는 게 옳다. 문을 열어 빛이 들어오면 당연히 방안이 밝아질 것이다. 많은 사물이 더 잘 보일 것이다. 계몽은 무지를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두운 의식을 맑게 만드는 것이다. 어둡다고 악한 것은 아니다. 어두움은 그 나름대로 밝음이 따라가지 못하는 깊이가 있다. 어두움과 밝음은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상보의 관계에 있다. 언어와 인간성의 회복이 필요하다.

3. 
루쉰이 사람을 무는 개는 물에 빠졌든 뭍에 있든 모조리 패야 한다고 한 일갈이 하나도 과격하지 않게 다가오는 이유다. 그들은 비유컨대 언제 어디서든 사람을 물어대는 개다. 무슨 도리나 정의 같은 것이 그들에게 있을 리 만무하다. 루쉰의 통찰처럼, 물에 빠진 개를 구해주면 개는 자신이 이익을 봤다고 여길 뿐 결코 회개하지 않는다. 하여 틈만 생기면 다시 사람을 물어댄다. 하여 몽둥이질이냐, 도덕적 꾸짖음 이냐는 상대에 따라 골라 써야 하는 것이다. 

한 정치인이 최근 <<국민이 먼저입니다>>라는 책에서 야당 대표에 대해 "계엄 같은 극단적 수단을 쓸 수 있다"고 쓴 사실이 알려지자, 야당 대표는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개 눈에는 뭐만 보인다"며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저는 기꺼이 국민을 지키는 개가 되겠다"며 야당 대표를 향해 "재판 잘 받으시라"고 적으며, 자신의 책 공개 후 첫 메시지를 내놨다. 그가 어떤 종류의 개인지는, 전 주인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다. ‘주인 무는 개’는 곁에 두면 안 된다고 하는 이도 있다. 국민적  갈등을 자신의 이익의 동력으로 삼는 우리 정치인들은 "사람 안에 개가 들어 있어" "개소리"를 하느라 바쁘다. 답답하다.


개의 정치적 입장/배한봉

개들이 짖는 소리를
개소리라 한다.
그것은 개들의 대화이기도 하고
개들이 달을 보고 하는 뻘짓이기도 하다.​

​사람끼리 가끔
개소리한다고 할 때가 있다.
사람 안에 개가 들었다는 말이다.

개들도 그럴 때가 있을까.
개 안에 사람이 들어
울부짖으면
사람소리 한다고 개들끼리 수군거릴까.

​그러면 그것은,
욕설일까,
정치일까,
철학의 한 유파를 형성할 수 있을까.

​벽에는 커다랗게 얼굴 사진을 새긴 포스터가
일렬횡대로 붙어 웃고 있다.

​벽보 앞을 지나가다 나는
개 짖는 소리를 듣는다.
이것은
정치적 혐오일까, 무관심일까, 참여일까.
골목 앞, 신들린 무당집 개가
아무나 지나갈 때마다
컹컹컹, 컹컹 자꾸 묻는다.


개는 개밥을 주는 사람만이 주인이다. 사람이 자신의 안전만, 자신의 먹을 것만 생각한다면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인간이 아니다.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주인"(김남주, <어떤 관료>의 일부)이듯이, 사유하지 않으면 '개'가 될 수 있다. "사람으로 태어나 남의 집 개나 말노릇하는 걸  '견마지로(犬馬之勞, 개나 말 정도의 하찮은 힘이란 뜻으로, 임금이나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것을 비유한 말)'라고 합니다. 자진해서 남의 집 개나 말 노릇 한 지식인을 개나 말로 대우하는 건, 세상을 바로잡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전우용)

4. 
이런 개소리를 막을 방법이 있을까 고민하다가 한숭희 교수의 글에서 답을 찾았다. 그래 오늘 그 이야기를 하고 마친다. 최근 보수논객 정규재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지난 3개월 동안 우리 사회가 마치 “거대한 미치광이들의 행진 같은, 아니 좀비들의 발광 비슷한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대통령 한 사람에서 시작한 좀비 현상은 계엄을 거치면서 사회 전체를 탄핵 찬성과 탄핵 반대라는 거대한 분열 구도로 나누어 놓았다. 문제는 이 현상이 헌재의 대통령 탄핵 인용 이후에도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정치 좀비화 현상'의 본질은 시민들이 모종의 편향 확증성에 현혹되고 무비판적으로 코드화 된 행동을 반복해간다는 것인데, 우리가 서부지법 난동에서 보았듯이 편향된 확증성은 정치 갈등을 넘어 폭력과 파괴로 나아간다. 그 안에서 사회적 신뢰는 추락한다. 혐오 정치가 퍼지는 방식은 마치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파되는 양상과 비슷하다. 

5. 
정치에도 '좀비 바이러스'라는 게 있다. 그것은 순진한 시민을 숙주로 해 스스로를 증식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서 그 감염 경로를 차단했던 것처럼, 정치 좀비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서도 일단은 왜곡된 정보가 전파되고 학습되는 경로를 차단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정당성의 한계가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생각의 전파를 제한하고 소통을 검열하는 것은 자칫 개인 사생활 검열과 언론통제라는 또 다른 민주주의 왜곡을 불러올 수 있다. 지난번 야당의 ‘카톡 검열’ 논쟁이 빠졌던 함정이 바로 이것이다. 실정법을 위반하지 않는 한 정치 혐오 바이러스 전파를 제도적으로 막을 방법은 마땅치 않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이다. 몸에 맞는 백신과 같은 것이다. 정보가 오염되고 혐오로 덧 칠 되더라도 그것을 학습하는 개인들이 ‘비판적 학습'이라는 백신을 미리 맞는다면 비록 감염되더라도 결코 중증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 원래 생물학적인 백신도 학습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몸세포에게 병원성 바이러스를 미리 학습시켜 실제 침투에 대비하게 만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혐오 좀비 바이러스'의 경우에도 민주주의 백신을 통해 인간의 사고력을 마비시키는 그 정보를 미리 학습하고 분석하며,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기초 능력을 키울 수 있다. 돌아보면,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백신은 너무 순했고 약발도 약했다. 이번 계엄 사태에서 본 것처럼 한 국가의 헌법과 법률이 그리 완벽한 것이 아니다. 많은 장면에서 모순과 법률 미비, 그리고 교묘한 이단 해석이 가능하다. 게다가 반헌법적 상황은 예측을 한참 벗어나며, 정상적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양상을 만든다. 좀비 같다. 이에 대처할 수 있는 보다 치밀하고 현장적이며 엄정한 논리 속에서 극우 혹은 극좌의 혐오주의와 폭력성을 이겨낼 수 있는 사고력 학습이 필요하다. 지금부터 라도 민주주의 교육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선의 방어책이라는 각오로 전 국민에 대한 민주주의 교육 비상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나는 두 가지를 제안한다.
▪ 첫째, 시도교육감은 학교에서 민주주의 특별교육을 실시할 수 있도록 그 과정을 신속히 설치하고, 학생들이 당장 대선 이후에 라도 다양한 방식으로 이번 사태를 분석과 토의할 수 있도록 학습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 또 윤 정권 들어 뒷걸음치고 있는 민주시민 교육을 큰 틀에서 부활시키고, 그 안에서 더 세밀하고 치열하며 현장 중심적인 민주시민 교육이 될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개발해야 한다.
▪ 둘째, 정치가 더 이상 단순 투표행위에 머물지 않고 수준 높은 교양과 치밀한 논리, 그리고 증거와 합리적 판단이 만나는 시민정치 공론장을 통해 일상화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자체 시민대학, 평생학습관, 도서관 등이 단순히 강연을 청취하는 장소가 아니라 과감한 주장들이 제시되고 시민들의 치열한 공방이 허용됨으로써 사회적 담론의 ‘백신’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열려야 한다. 이러한 교육에는 반드시 시민교육 전문가가 중재자로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화될 필요가 있다. 합리적 토론에 직접 참여해보는 것만큼 좋은 민주주의 백신은 없다.

6. 
바이러스 그거 참 무섭다. 지난 코로나-19 이후, 우리 사회는 바이러스로 일상이 무너지고 있다. 주변에 많은 이들 감기, 아니면 독감으로 괴로워 한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 우리 몸은 37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지만, 39조 개의 미생물도 체내에 공존하고 있다. 설령 무인도에 홀로 있더라도 이미 수많은 미생물에 감염되어 함께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미생물이 우리 몸에서 살아가려면 우리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 이들은 소화, 영양소 분해, 면역, 체중조절, 대사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암, 당뇨병, 심혈관질환뿐만 아니라, 우울, 불안 그리고 치매 예방까지 많은 도움을 준다. 결국 우리는 미생물과 공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들이 없다면 건강한 삶도 없다.

최근 이 아름다운 공존이 위협을 받고 있다. 다른 동물을 숙주로 생활하던 미생물들이 사람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서로 익숙지 않은 관계라 초기엔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한다. 사스, 메르스, 코로나19처럼 전 세계를 공포에 빠뜨린 바이러스가 대표적인 예다.

이런 변화의 주요 원인을 다음과 같이  4개를 지적할 수 있다. (1) 지구 온난화, (2) 인구 증가, (3) 이동 수단의 발달, (4) 동물 개체 수 감소가 지목된다. 문제는 이들이 가속화되고 있고, 불가역적이며, 세계 어디서든 발생할 수 있다는 데 있다. 특히 운송 수단의 발달로 이제 감염병은 불과 며칠 만에 세계 어디로든 확산할 수 있다. 이러다 보니 어떤 미생물이 언제 어디서 인류를 위협할지 예측하기가 힘들어졌다. 게다가 미국의 세계보건기구 탈퇴 선언은 불확실성을 더욱 키우고 있다. 여러모로 감염병 위협이 고조되고 있는 시기다.

개인위생은 필수다. 손 씻기와 비말 감염 차단을 위한 마스크 착용이 핵심이다. 얼마 전 기차 안에서 “외출 후 손 씻기 생활 화”라는 예방 메시지를 봤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마치 고기 없는 고깃국을 먹는 느낌이 들었다. 바이러스는 손에 묻어 있다가 눈, 코와 입을 만질 때 체내로 들어온다. 점막이 노출되어 있어 침투하기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출 후”가 아니라 “눈, 코와 입을 만지기 전” 손 씻기라고 해야 한다.

7. 
우리 사회를 '소위' 이끈다는 리더들이 '가상세계'에 살고 있다고 본다. 김월회 교수는 그걸 “존이불론(存而不論)”이라는 말로 잘 설명을 했다. '존이불론'이란 '멀쩡히 존재함에도 그에 대하여 거론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면 엄연히 존재하는 그것이 현실 속에선 없는 것이 된다. ‘사회적 유령’ 만들기라고나 할까? 가상 세계에 있는 것과 같다. 이 '존이불론'은 아Q의 ‘정신승리법’과 끈이 연결되어 있다. 중국 현대문학의 대문호 루쉰은 대표작 <<아Q정전>>에서 주인공 아Q의 '위대한' 정신승리법을 펼쳐냈다. 다음과 같은 방식이다. 아Q는 노인인 자신에게 돌팔매질을 해대는 동네 아이들을 정신승리법으로 인간 아닌 것들로 삭제해버린다. 인간이라면 노인에게 돌을 던지며 유쾌해 할 리 없으니 자신에게 돌 던진 아이들이 인간일 리 없다는 논리였다. 그러고는 인간도 아닌 것들에게 돌 맞았다고 화내는 건 온당치 않다며 툴툴 털고 일어난다. 루쉰은 근대에 들어서도 쌩쌩하게 살아남은 '존이불론'을 아Q의 정신승리법으로 탈바꿈 시켰던 것이다.

과거의 '존이불론'은 이런 식이었다. 국가에 커다란 환란이 있어도 조정의 신하들은 이를 임금 앞에서 일절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사회 속 현실에선 한창 벌어지고 있는 환란이 군주의 현실 속에선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누군가 입바른 소리를 하면 아예 그를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없는 사람으로 만든다. 살아 있음에도 사회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유령으로 치부한다. 때로는 이를 뒤집어 현실 호도의 쏠쏠한 수단으로도 활용했다. '존이불론'을 뒤집으면, 그러니까 없는 사실도 작정하고 거론하면 있는 사실로 둔갑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만 그러했음도 아니다. 정치인 등 공인의 범죄를 다루는 언론의 태도만 봐도 그러하다. 연일 대서특필하며 몰아가면 없는 죄도 있게 되고 작은 죄는 큰 죄가 된다. 반면 큰 죄라도 작심하고 다루지 않으면 작은 죄로 치부되거나 없던 죄로 둔갑한다. 사실 개인 차원에서는 '존이불론의 태도'가, '아Q의 정신승리법'이 요긴할 때도 있다. 그러나 국가 간 이해득실이 첨예하게 부딪치는 국제무대에선 그야말로 무용지물이다. 이는 돌팔매질한 아이들조차 익히 알 수 있다. 동화 속 벌거숭이 임금님은 궁궐에선 멋지게 차려 입었다고 여겨질 수 있어도 그 바깥에선 그저 천둥벌거숭이일 따름이다. 이는 돌 맞은 아Q라도 익히 알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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