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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이 날 만큼은 1919년 3월 1일, 3·1 만세 운동을 기억하고 싶다.

3180.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3월 1일)

오늘부터는 10개의 테마를 5개로 줄여 글의 양을 줄이기로 했다. 물론 개인적인 인문 일지는 따로 더 길게 쓸 생각이다. 이 내용은 블로그에만 업로드하고, 사람들과 소통하고 공유하는 것은 반으로 줄일 생각이다.

1.
"계엄 게이트'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지만, 3월 1일은 왔다. 나는 적어도 이 날만큼은 1919년 3월 1일, 3·1 만세 운동을 기억하고 싶다. 그 당시 나라면 만세 운동에 나갔을까? 다 잘 아는 것이지만, 다시 한 번 공유한다. "일제 강점기에 있던 조선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한일 병합 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 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위키백과) 기미년에 일어났다 하여 '기미운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대한제국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고종 독살설이 소문으로 퍼진 것을 계기로 고종의 장례일인 1919년 3월 1일에 맞추어 한반도 전역에서 봉기한 독립운동이다. 3,1 운동을 계기로 다음 달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제헌 헌법에서는 3,1  운동을 대한민국 건국의 기원으로 삼아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을 천명하였다. 

2.
 다음은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내용이다. 우리 현대사를 잘 모르는 대중을 일부 기득권들이 <건국 전쟁>이라는 영화를 만들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에 역사의 혼란을 일으키는 일부 세력들이 언론과 함께 그랬다. 그런데 우리 일반 대중은 잘 모르고 관심도 없는 듯하다. 우리 모두 꼼꼼하게 읽고 잘 알아야 한다. 모르면 당한다. 왜 그들은 우리를 현혹시키는 것일까? 소위 '뉴라이트'라고 하는 기득권들이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그렇게 대중을 의식화 시키는 거다. 그럴수록 더 똑똑하게 앞뒤 관계를 알아야 한다. 우선 미국의 예를 든다.

▪ 7월 4일은 미국의 ‘Independence Day'(독립일, 또는 독립기념일)인데, 1776년 이날, 아메리카 대륙의 영국 식민지 13개 주 대표가 모여 독립을 ‘선언’했던 날이다. 그때는 '선언' 뿐이었다. 
▪ 정말 미국 식민지 연합군이 영국군에 승리한 날은 1783년 9월 3일, 
▪ 미국 헌법이 모든 주의 승인을 얻은 날은 1787년 9월 17일, 
▪ 연방정부가 수립되고 조지 워싱턴이 연방 대통령에 취임한 날은 1789년 4월 30일이다.
‘독립 선언(Independence Day)’으로부터 정부 수립까지 13년이 걸린 셈이다. 이 일련의 USA 탄생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날은 7월 4일 ‘독립기념일’인 것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를 보면, 1919년 3월 1일, 우리 민족 대표들이 모여 독립을 선언했던 날이다. 
▪ 일본이 패망하여 우리가 광복한 날은 1945년 8월 15일, 
▪ 헌법이 제정된 날은 1948년 7월 17일, 
▪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날은 1948년 8월 15일이다. 
1919년 3월 1일 ‘독립 선언’으로부터 정부 수립까지 29년이 걸린 셈이다. 이 일련의 대한민국 탄생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날은 3월 1일 ‘독립 선언 일’인 것이다.

그리고 1920년 초,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두 개의 국경일을 제정했다. 하나는 ‘건국 기원절’이고 다른 하나는 ‘독립 선언일’이다. 건국기원절이 개천절이고 독립선언일이 '삼일절'이다. 그런데 1949년 국경일을 제정할 때 개천절, 삼일절에 광복절과 제헌절을 추가했다. '건국절'은 없었다. 한글날은 2005년에 국경일이 됐다. 여기까지 팩트이다.

1920년 ‘제1회 독립선언 기념 축하 식’에서 안창호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이 날은 가장 신성한 날이요, 자유와 평등과 정의의 생일이오. 이 날은 한 두 개인이 만든 것이 아니요 이천만이 만들었고, 소리로만 만든 것이 아니요, 순결한 남녀의 피로 만든 날이오.” 안창호 선생의 말 대로, 대한민국은 이천만이 함께 만든 나라요, 순결한 피로 만든 나라이다. '국부'니 '국모'니 하는 건 왕조시대의 유물이다. 이승만이 국부면 국모는 누구인가? 프란체스카인가, 김건희인가? 우리 의 건국 서사(敍事)에서 우리나라의 '삼일절'은 미국의 ‘독립 기념일’과 똑같은 날이다. 다른 국경일은 개천절, 광복절, 제헌절 등 ‘의미’를 쓰면서, 삼일절만 ‘날짜’로 쓴 것은, 독립선언과 임시정부 수립이 같은 날 이루어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삼일절은 ‘독립운동 기념일’이 아니라 ‘독립 기념일’입니다. 건국절을 따로 제정하자고 주장하는 건, 국경일이자 대한민국의 기원 일인 '삼일절'을 모독하는 짓이다. 
 

3.
어제는 동네 가족들과 울산까지 가서, 간장 게장 먹고 돌아왔다. 거의 1Km 이내의 동네에서 늘 지내다가 멀리 다녀왔다. 오지 않는 봄을 찾아 남도 여행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식사 시간을 놓쳐, 배가 고파 잊었지만 먹고 난 후 안도현 시인의 <스며드는 것>이라는 시가 소환되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지난 후였다.

스며드는 것/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는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 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자비(慈悲)'라는 글자에서 뒤 글자는 슬픔(悲)이다. 사랑하는 일이 왜 슬픈 것일까? 타인의 슬픔을 감정이입하기 때문이다. 함께 아파할 수 있는 그  마음이야 말로 사랑의 핵심이라는 걸, '자비'라는 말이 보여 준다. 이 시를 읽고 더 이상 간장게장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는 이도 있었다. 그 사람의 속에 들어앉은 것은 꽃게를 달게 발라먹는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배 속에 수많은 알을 품고 있는 꽃게 어머니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나도 대전으로 올라오면서 차 안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등판에서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제 몸의 새끼가 다칠까 꿈틀거리며 버둥거리는 그 마음은, 생명의 깊은 본능 같은 게 아니겠는가? 우리가 다 죽어 가는 꽃게가 되었을 때 에야, 저 힘없고 낮은 목소리 속에 숨은 뜨거운 사랑을 들을 수 있다. 두려워하는 자식들을 다독이며, 자장가를 부르는 최후의 어머니를 볼 수 있다. 나날이 수 많은 생명들을 죽여 입 속에 넣어 가며 살아가는 우리 인간이, 어찌 일일이 가엾은 소와 돼지와 닭의 아픔을 감정이입 할 수 있으랴마는, 아주 가끔씩은 이런 통증을 느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사람이지 않겠는가?

4.
그리고 차 안에서 이런 생각도 했다. 우리 자신을 몸무게나 나이, 키로 정의하지 말고, 방에 걸린 그림, 연주할 수 있는 악기, 평생 읽어온 책으로 규정해보자. 우리들의 손에 들려 있는 스마트폰을 좀 놓자. 대신 책을 들자. 우리 자신을 바꾸지 않고 보존하는 것으로 생의 위기를 묵묵히 견디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 나이 먹으면서 겪는 상실을 ‘잃는 것’이 아닌 ‘얻는 것’, 즉 자유로 연결하는 힘 말이다. 스티브 잡스가 말한 ‘connecting 
 dots’(점을 연결하라!)는 실용서의 단골 인용 문구지만, 이 말을 책 속에 존재하는 스승들의 가르침으로 바꾸어 보자. 스피노자, 루소, 에픽테토스의 철학은 이때 삶의 가장 위대한 실용이 될 수 있다.

나는 자주 '내가 원하는 것들로부터 나를 지켜주소서(Protect me from what I want)'라고 기도하곤 한다. '나'는 잠시라도 제대로 보살피지 않으면, 출세에 혹하고, 돈에도 혹하며, 미인에게도 혹해 버리기 일쑤이다. '나'라는 존재는 한번 유혹에 휩쓸리면 다시 돌아오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吾)를 잘 못 간직했다가 나(吾)를 잃은 자'였던 정약용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그는 욕심과 야망에 이끌려 진정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과거를 부끄러워했었다. 정말 '나 자신을 지킨다'는 것은 쉽지 않다. 정말 늘 깨어 있지 않으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 정약용은 자신의 방 이름을 "수오실(守吾室)"이라 지었는가 보다. '나를 지키는 방'이란 말이다. 이 이름은 정약용의 형 정약전의 서재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굳이 나를 지킬 필요가 있는가? 항상 나 자신에게 '나'는 찰싹 달라붙어 있는데 말이다. 정약용은 형님의 서재에 붙인 이름에 대해, '유배 생활을 하다 보니 그 깊은 뜻을 깨달었다 한다. 그 길은 손에 책을 놓지 않고, 생각들을 글로 써야 한다.

대학 시절 트라피스트 수사 토머스 머튼의 책을 읽고 감명받아 도미니크 수도회에 들어간 미국 작가 리 호이나키는 정년 보장된 교수직을 버리고 '경제 우선주의와 화폐 중심 사회의 틀에서 얼마나 벗어나서 살 수 있는지 실험하기 위해' 시골로 가서 자급자족하는 농부가 된다. 또한 스스로 주변 인물을 자처해 동료들이 교수로 있는 대학의 청소부로 일한다. 간디와 소로의 영향을 받은 그는 술담배를 전혀 하지 않은 채식주의자였으며, 자발적으로 간소한 삶을 실천했다. 그러한 삶이 사회적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사람들은 그에게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런 식으로 한다고 세상을 바꿀 수 있겠는가?" 호이나키는 대답했다. "내가 이 삶의 방식을 고집하는 것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나를 바꾸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나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세상도 나를 바꿀 수 없다."

5. 
실제로 스티브 잡스의 삶을 보면, 그는 어머니가 미혼모(=비혼모)였기 때문에 다른 가정에 입양되었다. 그는 대학을 자퇴하고 흥미 없는 필수과목 수강을 그만두고, 흥미로워 보이는 수업에 이따금씩 들어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호기심과 직관에 따라 우연히 했던 일 가운데 많은 것들이 나중에는 값진 경험으로 드러났다." 예를 들어, 그는 대학에서 서예 교육을 받았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PC에 훌륭한 활자술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점을 연결했다.

스티브 잡스가 말했던 "창의력은 연결하는 능력이다(Creativity is connecting things)"는 말을 나는 늘 기억하고 있다. 누군가의 아이디어에 자기 것을 결합해 탁월한 새 아이디어를 만들어냈던 스티브 잡스의 멋진 생각이라 보기 때문이다. "현재의 모든 순간의 점들은 어떤 식으로 든 당신의 미래와 연결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모든 점, 즉 경험은 미래와 연결된다. 즉 지금의 점(경험)이 미래의 어떤 시점에는  서로 연결되는 것을 믿어야 한다. 아무 것에도 쓸모없다고 생각한 그 순간들은 기어코 삶 곳곳에 영향력을 끼친다. 지금의 모든 점들은 기어코 미래의 어떤 선과 맞닿아 있다는 거다. 이를 나는 다음과 압축하여 늘 기억하고 다닌다. "conectiong the dots" 결코 앞을 내다 보며 점들을 이을 수는 없다. 몰두하다가 뒤돌아보면, 점들이 이어진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 making the dots 를 위한 길을 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 현재 경험의 소중함을 간직한다.
- 점은 진하게 찍어야 한다.
- 자신의 시선을 끄는 것에 빠진다. 거기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에 대해 열광한다. 그러면 미의식과 안목이 생기고, 그것들이 점점 더 세련 되어진다.
- 단순한 점 잇기로는 행복하지 않다.
- 성적이 스펙보다 중요한 건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는 것이다. 

6.
좋은 삶을 살려면, 고독과 교류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립이 아닌 연결", "고독이 아닌 교류" 사이의 균형이다. ‘오고 가고, 맺고 끊는 중용’의 기술을 배우는 것 말이다. 사찰에서의 ‘동안거’나, 성당에서의 ‘피정’은 번잡함에서 벗어나 마음이 차분해질 수 있는 좋은 방편이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건, 우리의 선입견처럼 고독이 절간 같은 환경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도시인의 출퇴근도 성찰의 순례길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건 외부가 아닌 내면의 소음을 끄는 것이다. 시끄러운 카페나 번잡한 식당에서도 우리는 고독할 수 있다. 외부의 소음을 차단하고, 오직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먹는 것에 집중해 충만해지는 ‘고독한 미식가’처럼 말이다. 바람에도 꼿꼿한 나무는 죽은 나무다. 이어령 선생은 <<마지막 수업>>에서 "나무는 끝없이 바람에 흔들리지만 곧 자신만의 중심으로 서 있다"고 말했다. 한겨울 파도는 어떤 가? 파도의 운동 역시 끝내 수평으로 돌아가기 위한 끝없는 눌림과 풀림의 과정이 아닐까? 세상 많은 것은 중심으로 다가서기 전 흔들린다. 흔들리는 내면의 수평을 찾아 지금 이곳에서 고요해지는 방법이 있다. 잠시 휴대폰을 끄고 명상하는 것이다. 백영옥 소설가로부터 배운 거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