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오늘은 새롭게 시작하는 3월 1일이다. 나는 적어도 이 날만큼은 1919년 3월 1일, 3·1 만세 운동을 기억하고 싶다. 그 당시 나라면 만세 운동에 나갔을까? 다 잘 아는 것이지만, 다시 한 번 공유한다. "일제 강범기에 있던 조선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한일 병합 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 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위키백과) 기미년에 일어났다 하여 기미운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한제국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고종 독살설이 소문으로 퍼진 것을 계기로 고종의 장례일인 1919년 3월 1일에 맞추어 한반도 전역에서 봉기한 독립운동이다. 3,1 운동을 계기로 다음 달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제헌 헌법에서는 3,1운동을 대한민국 건국의 기원으로 삼아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을 천명하였다.
그런데 오늘은 월요일이기도 하다. 나는 지난 주부터 매주 월요일 아침 글쓰기는 이야기의 힘을 보여주는 것으로 정했다. 오늘은 톨스토이가 보여 주는 이야기의 힘을 공유한다. 톨스토이는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이다. 가난한 구두장이가 모피 외투를 사러 외상값을 받으러 갔다가 허탕을 치고는 술 한잔 걸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예배당에서 벌거벗은 남자를 보고 발걸음을 재촉했다가 그만 양심의 가책이 느껴져 되돌아가 그를 집에 데려온다. 내일 먹을 빵마저 없어 걱정하고 있던 아내는 남편의 농민 외투를 걸치고 있는 낯선 사내를 보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다. 설상가상 저녁을 차려 달라는 말에 가출하려던 아내를 붙잡은 건 "자네 속에는 하느님이 없는가?"라는 물음이었다.
톨스토이는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사람 안에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무엇이 주어지지 않았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첫째와 셋째 질문의 답은 '사랑'이다. 사람들은 나의 안위만을 걱정하며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랑 하나만으로 살아간다는 게 톨스토이의 답이다.
이 답은 이 성경 구절에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매일의 삶 속에서 도움이 필요한 이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를 알아 뵙고 섬기는 것이다.
그리고 톨스토이의 또 다른 단편소설 <사랑이 있는 곳에 신도 있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이다. 주인공 마르틴은 구두를 만들고 고치는 제화공이다. 착하고 성실한 그가 절망에 빠졌다. 5년 전에 자식 두 명과 아내를 하늘나라로 보냈는데, 근래 하나 남은 막내아들까지 병으로 죽었다. 그는 매일 술로 시간을 보내며, 자신도 빨리 죽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리스도의 삶에 감동을 받은 그는 자신의 삶을 반성하며 새로운 희망을 되찾아 성경 읽기에 열중했다. 하루는 성경을 읽다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르틴, 내가 내일 찾아 갈 테니 창 밖을 보아라.” 마르틴은 그날 하루 종일 창 밖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언제쯤 오시려 나" 중얼거리며 하나님을 기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온다는 하나님은 오지 않고, 창밖에 늙은 청소부가 눈을 맞으며 청소를 하고 있었다. 마르틴은 그를 가게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따뜻한 차를 대접하였다.
청소부를 내보내고 두어 시간이 지나 창밖을 보니, 아기를 안은 여인이 눈보라 속에서 떨고 있었다. 그는 여인을 가게 안으로 맞아들여 먹을 것과 옷을 대접해 주었다. 또 시간이 흘러 거의 해가 질 무렵, 창밖을 바라보니 사과를 파는 늙은 노파가 사과를 훔친 소년을 붙잡고 야단치고 있었다. 마르틴은 밖으로 나가 소년의 죄를 뉘우치게 하고, 사과 값을 대신 갚아주며 노파가 소년을 용서토록 권유하여 원만하게 해결해 주었다.
마르틴은 날이 어두워지자,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마르틴은 성경을 읽다가 잠이 들었다. 그 때 어둠속에서 자신이 낮에 대접했던 늙은 청소부와 아기 안은 여인, 노파와 소년이 나타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르틴, 네가 오늘 만난 사람들이 바로 나이다. 너는 나를 대접한 것이다”
이후 마르틴은 꿈에서 깨어 나 펼쳐져 있는 성경을 보니,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내가 배고플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를 따뜻하게 맞아들였고, 헐벗었을 때 옷을 주었으니, 내 형제 중에 보 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극진히 대접한 것이 바로 내게 한 것과 같은 것이니라.”
오늘 공유하는 시도 사랑의 이야기이다.
사랑/김중
곱추 여자가 빗자루 몽둥이를 바싹 쥐고
절름발이 남편의 못 쓰는 다리를 후리고 있다
나가 뒈져, 이 씨앙놈의 새끼야
이런 비엉-신이 육갑 떨구 자빠졌네
만취한 그 남자
흙 묻은 목발을 들어 여자의 휜 등을 친다
부부는 서로를 오래 때리다
무너져 서럽게도 운다
아침에 그 여자 들쳐 업고 약수 뜨러 가고
저녁이면 가늘고 짧은 다리 수고했다 주물러도
돌아서 미어지며 눈물이 번지는 인생
붉은 눈을 서로 피하며
멍을 핥아 줄 저 상처들을
목발로 몽둥이로 후려치는 마음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얼마나 어렵고 독한 것인가?
같은 메시지이지만, 다음 글은 논변적이다. 예수가 카리스마 넘치는 예언자가 된 것은 언행일치(言行一致)의 삶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수는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려 했던 원칙들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 원칙은 자기 중심적인 아기심에서 벗어나 타인과 주변, 특히 옆에 있는 나그네의 처치를 생각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인식하게 된 유일한 통로는 낯선 자를 인식하고 그에게 비정상적인 만큼의 호의를 베푼 것이다. 예수는 낯선 자이다. 낯선 자에게 행동으로 컴패션을 보여줄 때, 신의 신비가 우리 눈 앞에 등장한다.
누가복음 24:13-35 엠마오로 가는 길을 읽다 보면, 그 때 예수가 살아진 것은 자신들 앞에 나타난 이 낯선 자가 '진짜' 예수라고 사칭하면서 종교 장사를 할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복음은 예수가 바로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매일매일 만나는 '낯선 자'라고 증언한다. 우리와 생각이 다른 낯선 자를 회피하고나 차별하고 우리 스스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신을 만날 수 없다. 우리는 '자아'라는 무식에서 벗어나 '무아'로 신을 대면하기 위해 '다름'을 수용하고 우리의 삶을 적극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어떤 존재를 우리는 신이라 부른다. 신의 특징은 '낯섦'과 '다름'이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자신에게 주어진 제한된 경험을 통해 형성된 파편적이고 편견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자신과 완벽하게 다른 존재와 만나는 것이 종교이다. 나와 다른 이데올로기와 종교, 세계관을 가진 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들을 통해 스스로 개벽하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신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 낯섦과 다름을 수용하고, 그 다름을 참아주는 것이 아니라 소중히 여기며 대접할 때 신은 비로소 우리에게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낸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에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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