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9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2월 1일)
1.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벌써'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2월이 시작되었다. "지나치지 말고 오늘은" 주변의 것들 속에서 가치를 찾아 보리라. "세계는/부르는 이름 앞에서만 존재를/드러내 밝힌다"고 오세영 시인은 <2월>이라는 시에서 말했다. 긴 호흡으로 앞을 바라보면서 조급하지도 말고, 태만하지도 말며, 2월도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갈 생각이다. 2월도 특별한 일정이 없으니,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시기로 삼을 생각이다. 연휴 기간에 읽은 <<알고 보면 괜찮아>>에서 만난 황벽 희운의 짧은 시를 먼저 공유한다.
번뇌를 벗어나는 일이 예삿일이 아니니
고삐를 단단히 잡고 한바탕 공부할지어다.
우위가 한 번 뼈에 사무치지 않고서야
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 향기를 얻을 수 있으리오.
수행이란 마음이라는 안경을 닦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자각(自覺, 현실을 판단하여 자기의 입장이나 능력 따위를 스스로 깨달음, 혹은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상태)이 중요하다. 이때, 만약 평화로운 삶을 살고 싶다면 먼저 마음의 상흔(傷痕, 상처 입었던 자리에 남은 흔적, 주로 정신적 상처를 말함)을 바로 보아야 한다. 상처를 마음 속에 단단히 가둬두려고 하면 응어리를 풀 수 없다. 상흔 자리를 살펴본 뒤 에야 마음의 상처가 진주 보석처럼 빛날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시린 아픔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추울수록 매화 향기가 그윽해 지듯이 뼈아픈 공통의 자리를 발견한 뒤 에야 삶은 더욱 성숙할 수 있다.
2.
추운 겨울을 넘겨야 하는 식물은 그에 알맞은 온도를 유지 해주어야 봄에 아름다운 꽃이 핀다. 그런 현상을 '춘화현상'이라 부른다. 호주 시드니에 사는 교민이 고국을 다녀가는 길에 개나리 가지를 꺾어 다가 자기 집 앞마당에 옮겨 심었다. 이듬해 봄이 되었다. 맑은 공기와 좋은 햇볕 덕에 가지와 잎은 한국에서 보다 무성했지만, 꽃은 피지 않았다. 첫해라 그런 가 보다 여겼지만 2년째에도, 3년째에도 꽃은 피지 않았다. 그리고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한국처럼 혹한의 겨울이 없는 호주에서는 개나리꽃이 아예 피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온을 거쳐야만 꽃이 피는 것은 전문용어로 '춘화현상'이라 하는데 튤립, 히아신스, 백합, 라일락, 철쭉, 진달래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인생은 마치 춘화현상과 같다. 눈부신 인생의 꽃들은 혹한을 거친 뒤 에야 피는 법이다. 그런 가 하면 봄에 파종하는 봄보리에 비해 가을에 파종하여 겨울을 나는 가을보리의 수확이 훨씬 더 많을 뿐만 아니라 맛도 좋다. 인생의 열매는 마치 가을보리와 같아, 겨울을 거치면서 더욱 풍성하고 견실해진다. 마찬가지로 고난을 많이 헤쳐 나온 사람일수록 강인함과 향기로운 맛이 더욱 깊은 것이다. 오늘의 현실이 우리들이 짊어지고 겪어야 할 '춘화현상'이라면 감내해야 해야 한다.
3.
사람도 뼈가 사무치는 아픔을 딛고 일어서야 깊이 상장할 수 있다. "이 문에 들어온 후에는 알음알이를 내려놓으라'(평전 보안 선사)는 문장을 만났다. '알음알이'이란 사전에 '약삭빠른 수단'이라 정의되어 있다. 어떤 사실을 인지하고 그것에 대해 약삭빠르게 내는 지식이나 분별심 등을 말하는데, 물론 이타적인 것이기 보단 이기적인 것이, 보편적인 사고이기보단 다소 편협된 사고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쉽게 말하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알고 있다고 착각하거나 혹은 아는 척하는 것'이 '알음알이'이다. '수증(修證)'이 아닌 머리로만 이해하는 거다. 불교에 해오(解悟)와 증오(證悟)'라는 말이 있다. '해오'는 이치로 깨닫는 것이고, '증오'는 이치로 깨달은 것을 수행을 통해 증명해 내는 것이다.
4.
불교에서 사용하는 말로 '신해행증(信解行證)'이란 것이 있다. 그 뜻은 "믿고(信), 그것에 대해 철저히 공부하여 이해하고(解), 그것을 일상 속에서 실천하여(行), 그 믿음을 통해 얻은 개념이 실제 경험과 결합하여 정말 내 것이 되는 것(證)을 말한다." '증'은 내 것이 되어, 삶을 나 답게 주인공으로 살게 하는 경지에 올려준다는 말이다. 그러니 단순히 믿기만 하면 이루어진다는 것은 조심해야 할 허구라는 말이다. 예컨대, 다른 사람이 뭘 얻었을 때는, 그만큼 다 노력한 것이다. 이 세상에 가짜는 있어도 공짜는 없다는 말은 진리이다. 이번 생이건, 어느 생이건 보이지 않는 노력을 끝없이 해서 얻는 것이다.
5.
'알음알이'는 낮은 수준의 '해오'와 낮은 수준의 '증오'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경우이다. 이치로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사람이 약간의 수행을 통해 깨달었다고 착각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지금은 인터넷의 발달로 원하는 정보를 쉽고 빠르게 이용하는 것이 가능한 세상이 되면서, 의식 수준이 올라갔으나, 그만큼 욕망의 수준도 올라갔다. 욕망의 크기가 커진 만큼, 밝지 않은 상태, 즉 욕망에 가려 무명(無明)인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여기서 말하는 의식 수준의 높고 낮음은 지식량의 많고 적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동물적인 욕구에서 비롯된 의식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를 말한다. 문제는 '알음알이'가 과대망상(誇大妄想, 자기 스스로 실제보다 크게 과장, 과대평가하고 마치 그것을 현실인 것처럼 인식하는 정신증상)을 낳는다는 거다. 낮은 의식 수준의 사람이 약간의 지식과 약간의 체험을 통해서 자신에게 과신하게 되어, 스스로 과대망상에 걸리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과대망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여러 책을, 특히 유튜브를 찾아보게 된다. 그 내용 w에서 자신이 경험한 것과 비슷한 예가 나오면, 그것들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자신의 과대망상을 완성하는 데 사용한다.
6.
새로운 사실과 체험에 누구나 고무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런 새로운 지식과 체험이 자신만의 경험이라고 착각에서 오히려 자만을 넘어 교만하고 오만해지는 것이다. 심한 경우, 자신이 깨달었다고 착각하기도 하고 스스로 '아라한'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착각은 확실하지 않은 지식과 체험인 '알음알이'에 의해 생기는 결과이다. 이와 비슷한현상을 심리학에서는 '더닝 크루거 효과(Dunning-Kruger Effect)라고 한다. 이는 인지 편향의 하나로, 능력이 없는 사람이 잘못된 판단을 내려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지만, 능력이 없어서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7.
'알음알이'에 빠지지 않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방법을 시도해 볼 수 있다.
- 사람들 과의 관계와 활동을 통해 수렴과 발산을 한다. 생명은 근원적으로 '활동'과 '네트워크'를 좋아한다. '관계'와 '활동'이 생명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소유와 성공, 곧 돈과 물질에 관련된 것만 매달리면 꼭 막히게 되고, 끝에서는 허무할 뿐이다. 살맛이 나려면, 어떤 활동을 하고 관계를 맺는 게 중요하다. 계속 어딘가로, 누군 가로 이어져야 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길 위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길 위에서 누군가를 만난다고 할 때 그걸 연결해 주는 건 지성밖에 없다. 사업으로 사람을 만나는 건 교환관계에 들어가는 거다. 그런데 지성을 통해 누군가와 친해지면 그 공간이 바로 우리의 일상으로 들어 온다. 그 일상 속에서 소유보다는 사람, 즉 존재로 나가는 게 중요하다. 그러면 서로의 생각이 접속을 한다. 이런 접속을 통해 가치가 생성된다. 무에서 유가 나오는 것이지, 유에서 유가 나오는 것은 유통기한이 아주 짧다. 돈 놓고 돈 먹는 것은 굉장히 유용하고 효율적이지만, 그건 순식간에 다 거덜나는 경우가 많다. 보이지 않는 무에서 유가 나와야 가치가 되는 거다. 원래 보이지 않는 지혜에서 물질이 나온다. 요약하면, 사는 맛은 관계이고, 거기서 일어나는 활동의 폭이 확장될 때 일어난다. 게다가 관계와 활동 속에서 일어나는 수렴하고 발산하는 순환 가운데 내가 다르게 변하는 것이다. 이걸 우리는 성장이라 한다. 소유 욕망에 사로잡혀 집착하기보다 존재로 건너가기를 하며, 자유를 확장해 나갈 때 발산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관계와 활동이 작동된다. 그리고 우리는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와 똑같은 말만 하는 사람은 필요 없다. 그래서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 좋은 책이나 선지식(善知識), 스승을 만나야 한다. 안다는 것(知)은 어떤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며, 그렇게 인지된 것에 대해 어떻게 이해 하고 반응하느냐에 따라 앎은 '알음알이(知解)'와 지혜(智慧)로 색깔이 입혀지게 된다. '지해'는 '지견해회(知見解會)'의 준말로서 지식이나 분석력을 가리킨다. '지해'의 상대어가 지혜이다. 약삭빠른 수단으로 서의 지식이 아닌 온전하고도 완전한 내용의 지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게다가 지혜로운 이는 분석과 기획력은 물론이고, 그것을 실행하는 힘까지 겸비한 사람이다. 그런 스승을 만나야 한다. 지혜는 사람, 사물, 사건이나 상황을 깊게 이해하고 깨달어 자기 행동과 인식, 판단을 이에 맞출 수 있는 것을 뜻한다 때로는 자신의 감정적인 반응을 통제하여 이성과 지식이 행동을 결정할 수 있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슬기'라고도 한다. 이치를 빨리 깨우치고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이다. '선지식(善知識)'은 성품이 바르고 곧고 덕행을 갖추어 바른 도(도)로 가르쳐 이끌어 주는 불교 지도자를 이르는 말이다.
▪ 일상에서 스스로 공부를 하며 배워야 한다. 인간은 자신이 해야 할 임무를 잘 모른다. 그래 임무를 깨워줄 학교를 만든다. 내 아침 글쓰기도 일종의 학교이다. 인생이란 학교의 특징은 '무작위'다. 내가 예상한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 마음까지 무작위일 필요는 없다. 자신이 정한 ‘더 나은 자신’을 위한 목표를 위해 매일 훈련하며 정진하는 사람에게, 일상의 난제들은 오히려 그들을 더 고결하고 숭고하게 만드는 스승들이 된다. “누가 지혜로운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사람이다.” 일상의 난제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배울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무료로 가르쳐 준다. 그들의 가르침은, 나의 생각을 넓혀주고 부드럽게 만든다. 나의 말과 행동을 정교하게 다듬어 사람과 사물에 친절하게 응대하게 유도한다. 인생이란 학교(學校)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조금씩 더 이해하게 만들어준다. 이해(理解)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시선, 심지어 원수의 시선으로 그 난제에 대한 나의 반응을 관찰하는 냉정(冷靜)이다. 나는 난제들을 해결(解決)할 수 없지만 해소(解消)할 수 있다.
▪ 끝으로 불편하게 살며, 고행(苦行)을 하여야 한다. 인간으로서 제대로 사는 일, 잘 사는 방법은 스스로 불편을 자초하는 일과 같다. 그래서 다양한 수행의 모든 과정은 사실 '불편'한 것들로 짜여 있다. 편하고 자극적인 기능에 갇히지 않고, '불편'의 상태를 자초하면서 성숙은 시작된다. 사람들은 '근본(道)'을 지키고 있는 사람을 따른다. 근본을 지킨다는 것은 자신의 지혜로 자신의 본마음(바탕)을 터득한 것이다. 도가에서는 이런 본마음, 즉 존재의 근본 상태를 '덕(德)'이라고 표현한다. 덕이 있는 사람은 타인을 압도하는 힘을 갖는다. 타인들은 이 사람을 추종하고 싶어 한다. 중후함이 경박함을 흡수하는 이치이다. 기능적인 활동에 갇힌 사람은 편한 것을 추구하며 가벼운 잡담과 비교 욕망에 빠져서 자신의 본바탕을 놓치고 가볍게 흔들린다. 이는 가벼운 기능과 비교와 잡담에 빠져 인간으로서 가져야 하는 성스러운 어떤 본바탕을 상실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상태를 "존재자에게서 존재가 빠져 달아나 버렸다"고 말한다. 여기서 존재는 바로 존재자의 고향이자 덕이 활동하는 곳이다. '불편'을 자초하면서, '덕'이라고 불리는 본바탕을 지키는 것이 자신을 키우는 일이다. 이 '덕'의 유지가 바로 인간을 기능적 활동에서 벗어나 본래적인 인간으로 서게 만든다. 눈 앞의 편리함을 위해 공공의 책임감을 포기하거나 불편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것은 경박함이다. 이 경박함을 버리고 불편함을 감당하며 인간으로서 품격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자가 덕이 있는 자이다. 여기서 매력과 존경이 생길 뿐 아니라 비범하고 특별하며 위대한 일들도 덩달아 일어난다. 고행은 육체의 고통을 견뎌 마음의 평안을 구하는 수행이다. 몸을 괴롭게 하여 마음에 매달린 온갖 애착과 욕망을 끊어버리는 수행이다. 시인은 그 수행의 본보기를 겨울나무에게서 본다. 톱질 몇 번이면 쉽게 넘어가는 나무. 한 발짝도 움직일 줄 모르는 나무. 땔감이 되든 의자가 되든 사람이 가공하는 대로 물건이 되는 나무. 그 힘없고 하찮은 나무가 맨몸 하나로 강추위에 맞서고 있다. 찬바람 눈보라를 제 몸에 깊이 새기고 있다. 가혹한 추위를 꽃과 열매와 향기로 만드는 데에만 골몰하고 있다. 나무는 해마다 고통이 어떻게 희망으로 바뀌는지 온몸으로 보여주는 수행의 경전이다.
8.
오늘 공유하는 시는 <겨울나무>이다. 2월을 시작하는 마음이다.
겨울나무/차창룡
단순해지면 강해지는구나
꽃도 버리고 이파리도 버리고 열매도 버리고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벌거숭이로
꽃눈과 잎눈을 꼭 다물면
바람이 날씬한 가지 사이를
그냥 지나가는구나
눈이 이불이어서
남은 바람도 막아 주는구나
머리는 땅에 처박고
다리는 하늘로 치켜들고
동상에 걸린 채로
햇살을 고드름으로 만드는
저 확고부동하고 단순한 명상의 자세 앞에
겨울도 마침내 주눅이 들어
겨울도 마침내 희망이구나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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