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78.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1월 19일)
몇 년 째 감기를 모르고 살다가, 금년에 독감이 찾아 와, 일상의 리듬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일들을 하였지만, 글을 쓰지 못했다. 게다가 우리 사회의 변곡점이 지난 15일부터 일어나 마음을 차분하게 유지할 수가 없었다. 오늘 오후가 되니, 조금 정상이다.
1.
이젠 정치가 복원되어야 한다. 이번 비상 계엄으로 깊게 패인 국민의 상처를 치유해야 하는 것이 정치 본연의 역할이다. 정치가들은 그 본래의 역할을 알고 서로 말 조심하고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공동체를 훼손하는 행동을 조심하여야 한다. 윤이 구속되어, 불법 계엄의 우두머리와 그 동조자들이 모두 구속되었다. 사필귀정이라고 자기 만족하거나, 만시지탄(晩時之歎, 시기가 늦었음을 안타까워함)이라며 다행이라고 할 시간이 없다. 무리한 계엄이 불러온 갈등이 민주적 기본질서와 법치주의를 위협하고 우리 국민들을 불안하게 하는 세력들이 아직 많다. 현정 질서 퍼괴에는 단호하게 대응하고, 동시에 갈등과 대립의 골은 조금씩 메워가야 한다. 그러나 중립적 위치에서 관용을 이야기하는 것은 또 다른 죄를 언젠가 발생하게 한다.
2.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그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은 짓이다. 공화국 프랑스는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는다." 알베르 카뮈의 유명한 말이다. 프랑스 사회의 특징이 관용(똘레랑스)이지만, 그 의미를 잘 알고, 그 정신이 우리 사회가 갈등과 대립의 골을 메우는 방법으로 활용했으면 한다. 그러나 프랑스 사회에서 엄격하게 적용되는 엥똘레랑스(intolerance) 정신도 동시에 강조되어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관용(寬容)과 프랑스어의 '똘레랑스'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관용'은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 또는 그런 용서'라고 정의한다. 프랑스어로는 '똘레랑스(tolérance)'라고 한다. 우리가 말하는 ‘너그러움을 의미하는 관용’이 서로 간의 차이를 덮어두고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가는 ‘화합(和合)’을 강조하는 태도라면, 프랑스에서 ‘똘레랑스’는 '차이를 더 도드라지게 강조하되 서로를 인정하고 다른 의견을 억압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나는 '똘레랑스'의 개념을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으로 본다. 그래 나는 늘 이 문장을 외운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라, 단지 차이일 뿐이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면, 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다르다고 '욱'할 필요 없다. '욱'이 발전하면, 폭력도 멈추지 않는다.
3.
독재 정권 하에서 고도의 압축 성장을 이룩하며 효율성과 획일성을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다 보니 ‘다름’이 곧 ‘틀림’으로 간주되던 당시 한국 사회에서, 홍세화가 한국에 소개한 프랑스 '똘레랑스' 개념은 사람들의 생각의 지평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프랑스인들이 신봉하는 가치는 ‘톨레랑스’ 보다는 다양성, 프랑스 말로 ‘디베르시테(diversite)’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처럼, 뗄 라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는 하지만, ‘똘레랑스’는 어디까지나 ‘디베르시테(다양성)’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지, ‘톨레랑스’ 자체가 목적은 아닌 것 같다. 다양한 배경과 사상과 아이디어를 수용하기 위해서는(디베시테),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톨레랑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양성 사회를 위해서는 '똘레랑스'가 전제 되어야 한다. 아니면 획일성의 노예가 된다. 생각을 하기 보다 다른 이들의 생각에 휩쓸린다.
4.
그러나 ‘톨레랑스’를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특정 사안들, 가령 나치 추종과 인종차별, 헙범 파괴, 폭력 등의 사안에 대해서는 ‘앵톨레랑스(intolerance)’, 즉 '불관용'을 단호하게 견지한다. 즉 상위의 목표인 다양성을 저해하는 것에는 관용을 베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논리가 촘촘해, 잘 이해를 해야 한다. '불관용(엥똘레랑스)도 단호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불관용 해야 할 것들이 여럿 있다. 그런 차원에서 지난 밤 서부지법 폭동은 우리 사회의 헌정질서와 법치주의에 대한 파괴 행위이다. 이런 극우 반국가세력이 더이상 오판하지 않도록 본보기로 철저하게 불관용 정신으로 처벌하여야 한다.
5.
윤이 보여준 위헌 위법이 문제였다. 그의 이해할 수 없는 '처''와 주변의 참모들, 게다가 일부 고위 관료들과 일부 여당 의원들, 더 나아가 그의 변호인과 지지자들이 제 정신이 아니 것 같다. 이번 기회에 법의 무서움을 보여주어야 한다. 윤을 이용해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면서 '호의호식(好衣好食)'한 부역자, 윤을 앞세워 온갖 이득과 특혜를 가로챈 모리배들, '어리석은' 폭도들을 배후에서 내란을 선동하면서 폭동을 사주하고 조종한 극우 돈벌이 유튜버들과 사이비 종교 집단들을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 '앵똘레랑스', 불관용의 정신으로.
6.
"극렬 지지층을 끌어모으면 법원을 흔들 수 있다는 생각, 착각입니다. 현란한 법기술로 법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 착각입니다. 거짓으로 내란의 진실을 가릴 수 있다는 생각, 큰 착각입니다." 어제 들은 뉴스의 한 조각을 공유하고 싶다. 착각은 사유 하지 않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왜 우리는 착각(착각)하는가? 공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좀 더 어렵게 말하면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법원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오늘 새벽 같은 폭력 사태가 나온다. 착각과 무지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좀 어렵지만 말해본다. 착각은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오만에서 나온다.
7.
좀 어렵지만, 인문학 공부를 한다. 나무들이나 풀, 꽃의 이름을 기억하고 부르는 것은 그것들을 우리 자신과 무관하게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게 하려는 속셈이다. 그것들을 나와 상관 없는 3 인칭으로 내버려 두지 않으려는 의도이다. 우리는 그것들에게 이름을 하나 하나 붙이면서, 그것들에 존재감을 심어주려는 것이다. 개별 것들이 이제 자신의 이름을 가진 특별한 존재가 되는 순간이다. 인간 관계에서도 상대방의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그 존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분야에 몰입하는 인문 운동가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주변을 잘 관찰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이 관찰한 대상을 자신의 마음 속에 잘 안착 시키기 위해서는 그 대상이 안주할 수 있는 범주를 잘 구축해야 한다. 그 범주에 따라 구별하고 구분한다.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것이 인문 운동가의 공부이고 지적 활동이다. 사물을 관찰하고, 그 대상에 속할 만한 범주를 떠올려, 그 안에 자리를 잡아 준다. 그리고 그 범주 안에 속한 다른 개별적인 대상들과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추론한다. 그 추론하는 것이 공부이고, 지적인 활동이다. 이 과정을 통해 마음 속에 그 대상만이 자리할 유일무이한 개별 범주가 생긴다. 그 독특한 범주를 우리는 '개념'이라 한다. 이 범주를 마련하는 과정이 '공부'이다. 이번 불법적인 계엄과 내란 음모과 체포, 구속 등의 사건으로 우리는 책이 아닌 실제로 법의 '개념', 헌법의 '개념'을 잘 공부했다. '개념'을 영어 conception이라 한다. '~와 함께'란 의미를 지닌 con과 '장악하다, 포획하다'란 의미를 지닌 동사 capere의 합성어이다. '컨셉션'을 어원적으로 말하면, '유사한 의미로 다양한 생각의 조각들을 하나의 범주로 포획된 추상적인 생각'이다. 그러니까 '공부'란 세상을 해석하는 다양한 개념들을 많이 가지는 수련이다. '개념'은 자신이 독자적인 의미를 지닌 생각으로 발전하기 위한 정신적 태아일 뿐이다.
8.
어떤 대상을 응시할 때, 그 대상의 범주를 모른다면, 내가 아는 것이 아니다. 그 대상에 대한 범주를 공부한 적이 없어 내 마음 속에 그 범주와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내가 지니고 있는 유사한 범주에 강제로 진입시킬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경험했다 하더라도 건성으로 이해한 사실을, 자신이 오랫동안 간직해온 범주 안에 강제로 진입하려는 경향이 있다. '공부'는 컨셉션, 개념을 많이 가지려 하는 수련이다. 그 개념이 부족하여, 우리는 한 대상을 내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범주에 강제적으로 진입시키려 한다. 이 강제 진입이 '착각(錯覺)' 이다.
9.
우리 사회는 현재 SNS, 특히 유튜브가 문제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제기되는 선정적인 의혹만이 사실이다. 그 의혹이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외로움을 달래 주고 부러움을 경감해주면 굳건하게 진리가 된다. 이게 IT공화국의 역설이다. 그 사실의 진위와는 상관 없이, 대중이 그렇게 생각하면, 그것은 정의이고 진실이다. 그런 일에 휘말린 당사자는 자신이 그런 의혹에 비춰진 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번거롭게' 증명해야 한다. 우리는 좀처럼, 자신이 경험한 인간을 신뢰하지 못하고, 남들이 제기한 소문을 진리라고 착각한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판단보다는, 대중이 떠드는 그것이 정의라고 믿는다. 우리는 좀처럼, 어떤 사안에 대해 숙고하지도 않고, 숙고를 통해 자신만의 의견을 도출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10.
사람들은 자신의 거침없는 말과 행동을 용기(勇氣)라고 착각하고 그런 집단 행동을 민주주의(民主主義), 민주적 기본 질서의 발판이라고 호도한다. 대한민국은 '무절제 공화국'이 되었다.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고 편협하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을 제외하고는, 인간의 언행을 누군 가에게 점검 받아야 한다. 그 누군 가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 자신의 언행이, 자신의 최선인지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 '진짜' 민주적 기본 질서는 한없이 정제된 언행과 집단의 숙고(熟考)를 통해 만들어진 결정을 수용하고 준수하려는 과정이어야 한다. 자신의 주장이 편협한 편견이란 사실을 모르고 말을 쏟아 내는 정치인들이 미디어를 통해, 국민의 정서를 점점 각박하게 만든다. 이제 일부 정치인들은 '침묵이란 자신의 언행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에 대한 감사 표시이고, 언행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준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니면 최소한 거짓말이 무섭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절제해야 한다. 단테가 상상한 지옥은 자신의 마음 가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사후에 형벌을 받는 장소다. 그들의 죄 명은 '무절제(無節制) 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어려운 '겨울'을 사랑하면서, 다 함께 다시 서로 사랑해야 한다. 나는 한 시대를 사는 우리 동포들을 믿는다.
겨울 사랑/박노해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에게 겨울이 없다면
무엇으로 따뜻한 포옹이 가능하겠느냐
무엇으로 우리 서로 깊어질 수 있겠느냐
이 추운 떨림이 없다면
꽃은 무엇으로 피어나고
무슨 기운으로 향기를 낼 수 있겠느냐
나 언 눈 뜨고 그대를 기다릴 수 있겠느냐
눈보라 치는 겨울 밤이 없다면
추워 떠는 자의 시린 마음을 무엇으로 헤아리고
내 언 몸을 녹이는 몇 평의 따뜻한 방을 고마워 하고
자기를 버린 희망 하나 커 나올 수 있겠느냐
아 아 겨울이 온다
추운 겨울이 온다
떨리는 겨울 사랑이 온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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