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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창세기> 제1장의 대략적인 내용

<<성경>>의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은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셨다. 하느님은 처음에 빛과 물과 땅이 있으라 말했고, 그 후에는 식물과 하늘이 있으라 말했다. 그 후에도 하느님은 역시 말씀으로 새와 들짐승과 물고기를 창조했다. 이것이 <창세기> 제1장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배철현 교수는 <창세기> 1장 1절의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의 문장을 "처음이라는 순간을 통해 신이 혼돈 상태의 우주에서 쓸데 없는 것들을 처내기 시작했다"로 바꾸어 번역했었다. 여기서 방점을 찍어야 할 것은 '처음'과 '처내기 시작했다'란 말이다. 사실 카오스(혼돈)에서 코스모스(질서)로, '없음'에서 '있음'으로의 질적인 변화는 '처음'이라는 특별한 순간을 통해 가능하다. 여기서 '처음'이란 이전과 질적으로 전혀 다른 상태로 진입하기 위한 '경계의 찰나'이다. 습관처럼 흘러가던 이전의 양적인 시간과 달리 충격적이고도 압도적이어서 전율하게 하는 질적인 시간이고, 동시에 문지방, 현관이다. '현(玄)'자가 가물가물하다는 말이다. 그래 아직은 손에 뭔가 잡히지 않지만, 가물가물하게 뭔가 보인다.

그리고 <창세기>에서 '창조하다'의 히브리어는 '바라(bara)'라 한다. '바라'라는 동사의 피상적이며 거친 의미는 "(빵이나 고기의 쓸데없는 부위를) 칼로 잘라내다'라고 한다. 그러니까 '창조하다'의 의미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요리사나 사제가 신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재물의 쓸데없는 것을 과감하게 제거해 신이 원하는 제물을 만드는 것처럼, 창조란 자신의 삶에 있어서 핵심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자신의 삶의 깊은 관조를 통해 부수적인 것, 쓸데 없는 것, 남의 눈치, 체면을 제거하는 거룩한 행위이다. chaos(한덩어리)를 처낸 것이 cosmos이다. 질서는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창조는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카오스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창세기> 제1장 5절을 보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가 나온다. 아침이 먼저가 아니고, 저녁이 먼저이다. 저녁은 아침의 어머니이며, 아침은 저녁이 선물해준 소중한 시간이다. 저녁이 없다면 아침은 없다. 혼돈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질서가 나오는 이치이다. 다시 말하면 어머니인 저녁이 있어, 아침이 있는 것이다. <창세기>는 "저녁이 됐다. 그리고 아침이 됐다. 첫째 날"같은 정형화된 문구로 이루어져 있다. 신은 7일 동안 매일 다른 것을 창조했다. 그에게 하루는 어제와 구별된 '처음이자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저녁은 신이 나에게 선물한 하루의 마지막이다. 그 저녁이 있어 내일 아침이 다시 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아침이 먼저 등장하고 그 다음 저녁이 나오는데, 창세기의 배치는 다르다. 순서를 바꾸었다. 저녁은 다음 날 아침을 탄생시키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저녁은 잠을 통해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겠다는 쉼과 다짐의 시간이다. 이런 말이 생각난다. 뒷면이 먼저 결정되어야 앞면이 결정된다.

<창세기> 제1장 27절에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였다"가 나온다. 피터슨에 의하면, 인간은 촘촘하게 엮여 있는 사회적 환경에서 진화해 왔다. 우리가 살아온 환경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물이나 대상, 혹은 환경이 아니라 바로 인격체였다. 그 인격체는 거의 10억 년 동안 수컷이나 암컷이었다. 생명체는 다세포 생물로 진화되기 전에 먼저 암수로 구분되었다는 말이다. 인간 정신의 가장 기본적인 범주는 성별이었다.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는 범주는 번식 활동만큼 역사가 길다. 인간은 태곳적부터 남녀의 구조가 다르다는 점과 생명을 낳기 위해서 남녀가 함께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관점에서 모든 것을 해석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혼돈(chaos)는 상징적으로 여성성이다. 모든 생명체가 어머니에게서 잉태된 것처럼, 우리가 지금 아는 모든 것이 원래는 미지의 세계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여성성으로 상징되는 혼돈은 성 선택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예를 들어 인간 여성은 세심하게 배우자를 고른다. 남성 대부분은 여성의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예를 들어 다수의 통계 자료들에 따르면, 소개팅 사이트에서 여성들은 등록된 남성의 85%를 평균 이하로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여성이 남성보다 두 배나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여성은 절반의 남성에게 '너는 안 돼!'라고 말하는 셈이다.

피터슨에 따르면, 다른 어떤 진화적 요인보다 '너는 안 돼!'라고 거부하는 여성의 성향이 인간의 진화를 이끌었다고 본다. 그 덕분에 인간은 직립 보행을 하게 되었고, 큰 뇌를 갖게 되었으며, 창의적이고 근면해졌으며, 경쟁심과 공격성, 지배욕을 지닌 생명체로 진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뇌의 이원적 구조는 현실을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방식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근본적인 현실일 수 있음을 뜻한다. 러시아 신경 심리학자인 엘코논 골드버그는 피질의 반구적 구조는 새로운 것(미지의 세계 혹은 혼돈)과 습관화(이미 알려진 세계 혹은 질서)의 근본적인 분할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명료하게 주장한 바 있다.

<창세기> 제2장 7절을 보면, "그때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하느님은 에덴으로 알려진 폐쇄된 공간을 먼저 창조했다. 하느님은 아담을 그곳에 두었고, 열매를 맺는 온갖 종류의 나무를 창조했다. 그 중에 특히 두 나무가 두드러졌다. 하나는 생명의 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다. 하느님은 아담에게 열매를 마음껏 먹어도 괜찮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절대 먹지 말라고 했다. 그 후 하느님은 아담의 짝으로 하와(이브)를 창조했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인간을 ‘아담’ 이라고 불렀다. ‘아담’은 히브리어로 ‘붉은 흙’이란 뜻이다. 그들은 인간이, 다른 동물이나 식물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정해진 시간을 마친 후에, 다시 땅으로 돌아가 흙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태초에 하느님이 먼지를 모아 구성된 흙을 빚어 만든 인간이란 모형을 만들었다. 그 모형은 아직 인간이 아니다. 하느님은 그 모형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었다. 그 생명의 숨을 히브리어로 ‘니쉬마쓰 하임’nishmath hayyim이라 한다. 이 것은 ‘숨’을 의미하는 ‘니쉬마’와 ‘생명’을 의미하는 ‘하임’으로 구성되었다. ‘생명’을 의미하는 ‘하임’이란 히브리 단어는 복수형이다. 그러므로 ‘숨’ 하나하나는 매 순간 생명을 연장하는 도구다. 인간이 하루에 이만삼천번 숨을 쉬니, 그와 동일 한 숫자의 삶을 사는 것이다. 숨과 숨 사이의 찰나가 인생이며, 이 셀 수 없는 찰나 또한 인생이다.

어쨌든 아담과 이브가 에덴(혹은 파라다이스)에 처음 놓였을 때 세상에 대한 의식도 없고 자의식도 없었다는 점을 나는 말하고 싶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 인류 최초의 부모는 발가벗고 있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우리들의 원초적인 부모는 뱀의 유혹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아담과 이브는 열매를 먹었고,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 그리고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 그 중 첫 번째가 자신들이 발가벗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글이 너무 길어진다. 그러니 <창세기> 3장 이야기는 내일로 넘긴다. 특히 뱀의 등장과 그후 아담과 이브의 깨달음에 대해 내일 이야기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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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_빅힌표 #우리마을대학_인문운동연구소 #창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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