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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석과불식’

고 신영복 교수의 다음 글은 나를 이제까지 키워준 힘이었다. 언제든지 꺼내 읽곤 한다. 그의 글을 다시 불러왔다.

"동서고금의 수많은 언어 중에서 내가 가장 아끼는 희망의 언어는 ‘석과불식’(碩果不食, 씨과일은 먹지 않고 땅에 심는다)‘이다. 주역(周易)의 효사(爻辭)에 있는 말이다. 적어도 내게는 절망을 희망으로 일구어 내는 보석 같은 금언이다. 석과불식의 뜻은 ‘석과는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석과는 가지 끝에 남아 있는 최후의 ‘씨 과실’이다. 초겨울 삭풍 속의 씨과실은 역경과 고난의 상징이다. 고난과 역경에 대한 희망의 언어가 바로 석과불식이다. 씨과실을 먹지 않고(不食) 땅에 심는 것이다. 땅에 심어 새싹으로 키워내고 다시 나무로, 숲으로 만들어 가는 일이다. 이것은 절망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길어 올린 옛사람들의 오래된 지혜이고 의지이다. 그런 점에서 석과불식은 단지 한 알의 씨앗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지키고 키워야 할 희망에 관한 철학이다."

그는 석과불식에서 정치의 원칙을 찾아 내었다. 그러나 나는 우리들의 삶의 원칙이라고 본다. 고 신영복 교수는 석과불식에서 우리가 읽어야 할 교훈을 다음과 같이 크게 3가지로 보았다. 첫째 엽락(葉落), 둘째 체로(體露), 셋째 분본(糞本)이다.

(1) ‘엽락(葉落)’은 잎사귀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거품과 환상을 걷어내는 일이다. 거품과 환상은 우리를 한없이 목마르게 한다. 진실을 외면하게 하고 스스로를 욕망의 노예로 만든다. (…) 더 많은 소비와 더 많은 소유는 끝이 없을 뿐 아니라 좋은 사람, 평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길도 못 된다. 먼저 잎사귀를 떨어뜨려야 하는 엽락의 엄중함이 이와 같다.

(2) ‘체로(體露)’는 잎사귀를 떨어뜨리고 나무의 뼈대를 직시하는 일이다. 뼈 대란 그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이를테면 정치적 자주(自主), 경제적 자립(自立), 문화적 자부(自負)이다. 정치적 자주는 우리의 삶에 대한 주체적 결정권의 문제이다. 경제적 자립은 위기를 반복하고 있는 세계경제 질서 속에서 그 파고를 견딜 수 있는 경제적 토대를 만들어 놓고 있는가를 직시하는 것이다. 경제적 자립기반이 튼튼할 때 비로소 정치적 자주가 가능한 것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문화적 자부는 우리의 문화가 우리들의 삶 그 자체에 대한 성찰과 자부심을 안겨주는 것인가를 직시하는 것이다. 자부심 이야말로 역경을 견디는 힘이기 때문이다. 나는 자주, 자립, 자부, 즉 '3자(自)'를 늘 기억한다.

엽락과 체로의 교훈은 한마디로 환상과 거품에 가려져 있는 정치, 경제, 사회문화의 구조를 직시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삶의 근본을 마주하는 것이다. 포획되고 길들여진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깨닫는 일이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과 불편한 진실을 대면하는 일이다.

엽락과 체로에서 나무는 자기 삶의 순서에서 해야 할 일을 행하는 것이다. 나뭇잎을 떨어뜨리는 것은 겨울에 부족한 햇살과 수분 그리고 영양분을 가지와 줄기에 집중하여 간결한 알맞음으로 살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체로는 마침내 생을 헐벗은 가슴으로 존재를 우주 허공에 내던지는 멋진 포즈가 된다. 햇살과 바람은, 나뭇잎의 수식에 가려지지 않고 몸뚱이와 직면하여 대화를 나눈다. 체로금풍(體露金風)이란 말이 있다. 여기서 금풍은 오행의 금(金)에 해당하는 것이 가을이기에 금품은 가을바람인 셈이다. 금풍에 제 몸을 드러내는 일은 축복이다. 살아서 모든 것을 가리고 숨기고 남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채 살아가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가려져 상상만 했던 것들의 실체와 진실을 읽으며 내면을 단단하고 튼길하게 키우는 때가 체로이다.

(3) ‘분본(糞本)’은 나무의 뿌리(本)를 거름(糞)하는 일이다. 엽락(葉落)과 체로의 어려움도 어려움이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이 바로 분본이다. 무엇이 본(本)이며, 무엇이 뿌리인가에 관한 반성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과 역사를 지탱하는 뿌리는 과연 무엇인가. 놀랍게도 뿌리가 바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까맣게 망각하고 있었던 언어, ‘사람’이 모든 것의 뿌리이다.

다르게 말하면, 본분(糞本)은 뿌리(本)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뿌리가 접히지 않고 바르게 펴질 때 나무가 잘 자라고 아름답게 꽃피듯이 사람이 억압되지 않을 때 우람한 나무처럼 사회는 그 역량이 극대화되고 사람들은 아름답게 꽃핀다. (…) 우리의 현실은 사람을 키우기보다는 수많은 사람을 잉여인간으로 낭비하고 있으며 심지어 사람을 다른 어떤 것의 수단으로 삼고 있기까지 하다. 이제는 사람만이 아니라 무엇이든 키우는 일 자체가 불편하고 불필요한 것이 되어 있다. 직접 만들거나 키우지 않고, 우리는 모든 것을 구입한다. 필요할 때에만, 그리고 잠시 동안만 구입한다. 사람도 예외가 아님은 물론이다.

석과불식이라는 말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삶의 지혜가 이어진다. 깊은 통찰력이다. 7월을 마감하는 날 이 글을 다시 읽고, 공유하게 되어 마음이 평화롭다. 먼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잊지 말고 챙겨야 할 몇 가지 채비가 있다.

(1) ‘길’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길은 도로와 다르다. 도로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속도와 효율이 그 본질이다. 그에 반하여 길은 그 자체가 곧 삶이다. 더디더라도 삶 그 자체를 아름답게 만들어 가고자 하는 긴 호흡과 느긋한 걸음걸이가 길의 마음이다. 목표의 올바름을 선(善)이라 하고 그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美)라 한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盡善盡美)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영위하는 모든 삶이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것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2) 그 다음으로 필요한 것이 동반자이다. 고생길도 함께할 수 있는 길동무가 있어야 한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대단히 불행하다. 신뢰집단이 없기 때문이다. 비단 정치 영역 뿐만 아니라 신뢰집단이 없기는 경제, 문화, 교육, 종교, 언론, 사법 등 사회의 모든 분야도 다르지 않다. 신뢰할 수 있는 동반자가 없다면 길은 더욱 아득하고 암담할 수밖에 없다.

(3) 그리고 먼 길은 ‘여럿이 함께’ 가야 한다. 여러 사람이 함께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다양성을 승인하는 공존(共存)의 터전을 만들어야 한다. 모든 사람의 모든 입장과 이유는 존중되어야 한다. 그 사람의 생각은 그가 살아온 삶의 결론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삶 속에는 우리가 함께 통과해 온 현대사의 애환이 고스란히 공유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소통할 수 있고 또 소통해야 하는 것이다.

(4) 마지막으로 변화(變化)이다. 진정한 화(和)는 화(化)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막히면 변화해야 하고, 변화하면 소통하게 되고, 소통하면 그 생명이 오래간다”(窮則變 變則通 通則久) 변화의 의지가 없는 모든 대화는 소통이 아니며, 또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 소통이란 진정한 소통이 아니다. 상대방을 타자화하고 자기를 관철하려는 동일성 논리이며 본질적으로 ‘소탕’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참으로 멀고도 험하다. 더구나 함께할 동반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동반자는 나 자신이 먼저 좋은 동반자가 될 때 비로소 나타나는 법이다. 그것이 바로 원칙과 근본을 지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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