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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우리는 너무 많이 떼 져서 다닌다.

우리가 지향하는 건강한 사회는 상처 입은 모든 이가 함께 존중 받는 곳이어야 한다. 고아나 독거노인처럼 소외된 이들도 완전한 자기 자신으로 존엄한 위치에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경쟁이 일상이 된 오늘날, 가족과 둘러앉은 밥상마저 쓸쓸함을 채워 주기보다 서러움을 불러 올 때가 많다. 도시에서는 상대적인 박탈감을 떨쳐 내기가 참 어렵다. 그렇다고 다 버리고 산 속으로 갈 수도 없다.

인간은 원래가 소통하고 인정받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과의 행복을 완성해야 한다. 그래 우리는 자신과 고독한 시간을 가질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외부에서 추구할 때, 우리는 길을 잃고 헤맨다. 그리고 진정한 관계가 아니라, 단지 주고받는 관계로 변할 뿐이다. 세상은 자신에게 익숙해 지기 전에 빠르게 바뀐다. 이 직장에 계속 다녀야 할지? 이 장사, 이 업종을 계속 해야 할지? 전전긍긍한다. 나 자신의 힘을 발견하기도 전에 세상은 변한다. 이런 말이 있다. '세상을 다 얻을지라도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어디서 왔는지조차 모른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람들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자기 자신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순간을 온전히 느낌으로써 만이 우리는 세상에 이미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과 연결된다. 느낌과 앎은 다르다. "나우니스(nowness 현재성)'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시간의 흐름을 초월한 현재가 이어지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시간을 말한다. 순간을 경험한다는 말이다. 석가모니가 보리수나무 아래서 경험한 것과같다. 그런 순간을 경험한다면 모든 사람이 자기 세상을 견고하게 유지할 수 있다. 그 순간 자신의 내면과 아주 친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현대인은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반면 너무 적게 느낀다. 그래 감각의 지평을 확장해야 한다. 듣고, 냄새 맡고, 만지고 하며 느낄 수 있지만 정작 이렇게 느끼는 감각은 천천히 약해져 간다. 우리는 너무 많은 지식을 얻는다. 그만큼 느낌의 힘으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세상의 답은 하나만이 아니다. 결과의 답도 있지만, 과정의 답도 있다. 살면서, 과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균형이다.

느낌의 힘을 우리는 감성(感性)이라고 한다. 사전에서 감성은 "자극이나 자극의 변화를 느끼는 성질"이라고 말한다. 이성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외부의 대상을 오관(五官, 오감각)으로 감각하고, 지각하여 펴상을 형성하는 인간의 인식능력을 말하는 철학적 용어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감성은 감각하는 힘이다. 감각하는 것을 우리는 정확히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못한다. 다만 느끼는 것이다. 그것을 표현하려면, 감각된 것을 분류해야 한다, 그걸 우리는 지각이라고 한다.

자동차로 보면 감성은 가속 페달이고, 이성은 브레이크에 해당한다. 그런데 차를 운전해 보면, 가속 페달을 밟지 않고, 브레이크를 사용하면 동네에서 차를 몰면 차가 잘 나가지 못한다. 가끔씩 고속도로에서 가속페달을 밟아주어 야만 차가 잘 나가듯이, 우리의 이성도 마찬가지이다. 감성의 제어 역할이 이성인데, 감성이 메마르면 이성 역시 할 일이 없어진다.

고독과 외로움은 다르다. 고독은 만족감을, 외로움은 목마름으로 이어진다. 우린 가끔 이성적인 사고를 하겠다는 이유로 세상에 닿을 수 있는 모든 감각의 촉수를 거둬들이고 있다. 이성도 감각의 조화 속에서 더 사려 깊어질 수 있다.  생각을 멈추고, 침묵하면, 내 안의 생명력이 살아난다. 속도의 관성을 끊기가 쉽지는 않다. 그래 가급적 우리는 느리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결론을 내리기 전에, 서둘러 해석하기 전에 직접 보고 느끼기를 바란다.  

고독과 외로움은 다르다. 고독은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거다. 고독(solitude)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해 불안해지는 외로움의 시간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최고의 시간이 된다. 그러니까  외로움(loneliness)은 혼자 있을 때 느끼는 슬픔이지만, 고독은 함께 있어도 느낄 수 있는 '혼자 있음'의 자각이다. 외로움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없지만 고독 속에서는 희망이 올라온다. 희망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주하는 것이다. 고독의 시간을 누리며, 마침내 희망으로 나아간다.

훌륭한 작가나 혁명가 등의 신념에는 당대의 불평등에 맞서는 핵심 주장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외로웠을 것이다. 새롭게 시작하는 이들의 행동은 바로 고독 속에 벼린 힘이다.  세상은 정해진 질서 속에 있지만, 새로운 생각을 일으켜 밀어붙일 때 흔들리며 나아갈 수 있다.  한 사회가 균형을 잃고 쏠려 있다면 기울어진 추를 중앙으로 가져오는 저항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저항은 시간을 두고 진단해가는 집요한 '사고의 고독이 필요하다. 그리고 동시에 한 사람 한 사람이 만진 것은 코끼리의 부분에 불과하니, 각자가 만진 부분을 교환하며 결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비교적 완전한 코끼리에 다가갈 수 있다. 그러니 내 생각을 용감하게 말하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 뜻을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바로 민주주의가 작동되는 조건이다. 이를 위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개인들이 깊이 사고해야 한다. 현재 우리 사회는  하나의 답을 주고 토론하게 하고, 약자들에게는 그 한 가지 답만을 완성하도록 강요 받는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사고하지 않는 것이 습관화되고, 답을 받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 아예 사회적인 습관으로 굳어져서 각 개인은 생각하려 들지 않는 분위기에 젖어버린다. 그런 일상은 아주 위험하다. 남의 생각에 길들여지면 안 된다. 혼자, 각자 생각해서 각자의 의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린 지금 시끄러운 일상에서 좀 이탈 해 고독이 필요한 때이고, 많은 이가 고독하게 앉아 자신과 대화하며 자신의 힘을 길러내 어야 우리 사회가 성숙할 수 있다. 우리는 너무 많이 떼 져서 다닌다. 카페에 사람들이 너무 많다.  고독은 스스로를 홀로 두며 스스로가 삶을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자각을 이루는 자리이다. 각자의 고독 속에서 반드시 스스로를 세워내는 존엄을 되찾고, ‘위대한 개인’으로 다시 태어나야 ‘위대한 사회’가 된다고 나는 본다. 자기 존엄성을 가지면, 남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나를 주인공으로 가장 나 답게 살 수 있다.  고독 속에서 나의 존엄성(la dignite)을 되찾자는 장쉰의 주장이 나는 반가웠다. 존엄성을 잃으면, 사람이 이상해 진다. 뭐, 우리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 우린 '가오'로 사는 거 아닌가? 그러려면 고독할 줄 알아야 한다. 장쉰은 "지독하게 고독하라! 혁명과 변화는 그 순간 시작된다"고 말했다. 혁명과 변화는 마음 속에서 세상과는 다른 자기의 눈이 떠지는 그것을 알아가는 데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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