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8.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10월 11일)

인생은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즐거 우려면 기쁨을 일상에서 선책하고 잘 배치하여야 한다. 인생은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 문장에서 나는 "낙(樂)보다는 "희(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희로애락(喜怒哀樂)'에서 '희'는 기쁨이고, '락'은 즐거움이다. 둘 다 '쾌(快)'의 감정이지만, '락(樂)'은 감각적 차원의 쾌감이다. 이 쾌감은 고통이나 불편을 동반하지 않은 순수한 감정이다. 이 감정은 동물도 느낀다.
'희'는 고통이나 불편이 동반된 쾌감이며, 정신적인 것이다. 이 기쁨이라는 감정은 순수한 쾌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불쾌감을 거치고 난 후의 쾌감이다. 그러니까 기쁨의 '희'에서 불쾌감은 만족의 지속을 위해 불쾌를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이를 우리는 '자발적 불쾌'라 한다. 이 '자발적 불쾌'가 있을 때 '쾌'는 깊어지고 길어진다. 즐거움은 쉽게 휘발되지만 기쁨은 오래 지속되는 이유이다.
기쁨과 즐거움이 차이가 있는가? 사전을 찾아 본다. 기쁨은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의 즐거운 마음이나 느낌'이라면, 즐거움은 '마음에 거슬림이 없이 흐뭇하고 기쁜 느낌이나 마음'이라고 정의한다. 비슷한 것 같은데, 즐거움은 '어떤 상태'라면, 기쁨은 '어떤 행위의 결과'인 것 같다. 그러니까 없다가 얻게 되었을 때 오는 것은 기쁨이고, 늘 있는 것은 즐거움인 것 같다. 그러니까 기쁨이 즐거움보다 더 강한 감정인 것 같다. 늘 있는 사람은, 없다가 그것을 얻게 되었 때 느끼는 감정을 모를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말한다. 40대는 외모의 평준화가, 50대는 지식의 평준화가, 60대는 재산의 평준화가, 70대는 영성, 정신 세계의 평준화가, 80대는 건강의 평준화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정말일까? 정말이라면, 왜 그럴까? 많이 가진 자의 즐거움이 적게 가진 자의 기쁨에 못 미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많이 아는 자의 만족이, 못 배운 사람의 감사에 못 미친다. 만족은 '물의 고임'이라면, 감사는 '물의 흐름'일 것이다. 이렇게 '+'와 '-'하면, 마지막 계산은 비슷하고, 모두 닮아 가기 때문 같다. 그러니 살다 보면 별 인생 없다. 현재를 즐기는 것이 남을 뿐이다.
만족(滿足)이라는 한자의 뜻을 살펴보면, 만(滿)은 ‘가득하다’, ‘차오르다'라는 뜻이고, 족(足)은 그냥 '발'이라는 뜻인데, 어째서 만족에 굳이 발 족(足)자를 쓸까?
발목까지 차올랐을 때 멈추는 것이 바로 '완벽한 행복'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만족(滿足)‘이라는 한자를 보면서 행복은 욕심을 최소화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고 보니 발목까지만 따뜻한 물이 차올라도 온몸이 나른해지고, 발만 시원해도 온몸의 땀구멍으로 열기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경험을 한 일이 떠오른다. 지금껏 종종 목까지 차오르고 머리 끝까지 채워져야 행복할 것이라는 욕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말이 나온 김에, 내가 늘 외우는 문장을 공유한다. '바라는 것이 이루어졌을 때 라야 흡족해 하는 것이 만족이라면, 자족은 어떠한 형편이든지 긍정하는 삶의 태도이다.' 그러니까 행복의 비결은 자족(自足)이다. 요즈음 우리 대부분이 스스로 가난하다고 느끼는 것은 끼니를 걱정하는 절대 가난 때문이 아니라, '상대적 빈곤'으로 무엇이나 남처럼 가지려 하는 마음 때문에 생겨난다. 흔히 말하듯 '필요'보다 '욕심'에서 생기는 가난이다. 이럴 때 분수를 알고 자족할 줄 알면 빈곤감이 없어지고 자기에게 있는 것만으로도 부자처럼 느끼며 살 수 있다.
너무 따지지 말자. 다음은 류시화 시인의 페이스 담벼락에 읽은 이야기이다. "어느 영화관에서의 일이다. 본 영화가 상영되기 전에 국제 영화상을 수상한 단편영화를 보여 준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관객이 기대감을 가지고 기다리는 가운데 단편영화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스크린에 평범한 흰색 화면만 보일 뿐이었다. 1분이 지나도 흰 화면이고, 2분이 지나도 흰 화면이었다. 3분이 지나고 4분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흰색 화면만 보였다. 사람들은 생각했다. ‘이것이 상을 받은 영화라고? 스크린 전체에 단지 흰색 뿐인데? 영화가 시작되기나 한 거야?’ 그렇게 8분이 지났다. 모든 관객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누가 이 영화에 상을 주었는지 모르지만 정말 멍청하군.' 그리고 9분 만에 카메라가 천천히 아래로 이동했다. 카메라는 그때까지 천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은 병원이었다. 그리고 병상에는 스무 살 청년이 누워 있었다. 그는 전신이 마비된 상태였다. 손, 다리, 얼굴을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유일하게 기능하는 것은 그의 눈이었다. 그리고 10분 후에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이 청년은 흰색 천장을 평생 바라봐야 합니다. 당신은 단지 8분 동안 보고 지쳤습니다.’"
바로오 사도는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1서 5:16-18)라고 말하며, 이게 하느님의 뜻이라는 거다. 기쁨, 기도 그리고 감사 속에서 "영과 혼과 몸을 온전하고 흠 없이 지켜 주시기를 당부하셨다.
잭 길버트의 시 <변론 답변서>에는 “우리는 기쁨을 받아들여야 한다./쾌락 없이는 살 수 있지만 기쁨 없이는,/즐거움 없이는 살 수 없다/이 세상의 무자비한 용광로 속에서 /기쁨을 받아들이려는 고집이 있어야 한다." 이 적확한 시인의 말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기쁨’이 아니라 ‘고집스러운 기쁨’이다. 눈이 녹으면 더러워서, 비가 내리면 단풍이 하수구를 막아서, 봄의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이 모든 계절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삶은 어떤 풍경일까. 한 번 뿐인 삶을 충만하게 살고 싶다면 우리는 고집스레 기쁨을 찾아내야 한다. 우리 성당은 매 미사 마다, 오른 손을 곧게 뻗으며 신부님의 선창에 따라 모든 신자가 함께 구호를 외친다. 그게 '기쁜 마음으로(laeto animo)" 이다. 오늘도 기쁜 마음으로 하루를 잘 보낼 생각이다.
변론답변서/잭 길버트(류시화 옮김)
어디에나 슬픔
어디에나 살인...
어디선가 아이들이 굶어 죽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 굶어 죽는다
콧구멍에 파리가 드나드는 채로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삶을 향유한다
그것이 신이 원하는 것이기에
그렇지 않으면 여름 새벽 동트기 전을
그토록 아름답게 만들었을 리 없다
벵갈 호랑이의 무늬를 그토록 멋있게 빚었을 리 없다
우물가의 가난한 여인들은
마을의 누군가가 몹시 아픈데도 웃고 미소 짓는다
그들이 겪은 고통과 미래에 겪을 두려움 사이에서
함께 웃는다
콜카타의 비참한 거리에도 날마다 웃음이 있고
뭄바이의 판자촌에서도 여인들은 웃는다
만약 우리가 행복을 거부하고 만족을 부정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박탈당한 것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우리는 기쁨을 받아들여야 한다.
쾌락 없이는 살 수 있지만 기쁨 없이는,
즐거움 없이는 살 수 없다
이 세상의 무자비한 용광로 속에서
기쁨을 받아들이려는 고집이 있어야 한다
부당함을 우리 관심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 것은
악마를 찬양하는 것이다
만약 신의 기관차가 우리를 들이받으면
그 장엄한 마지막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음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오늘 공유하는 시에서 다음 구절에 방점을 찍는다. "인생은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다" 와 "우리는 우리의 삶을 향유한다"이다.
독일 소설가 프리드리히 테오도르 피셔는 ,"남자의 옷은 뭔가를 말해주지 않는다. 오직, 옷을 입고 있는 그의 태도가 말할 뿐이다. 그는 자신의 행동으로 인격을 인정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가짜가 진짜인 듯 구는 행동을 좋아하지 않으며, 심지어 경멸하고 조롱한다. 스스로 진짜가 되지 못하면 아무리 비싼 옷도 소용이 없다. 진짜 가치는 드러내는 것으로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드러내고 뽐낸다는 것은 오히려 자신감이 부족하다는 증거이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거나 존경받지 못하고 있다는 표시이다.
사치는 사람들이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 누리는 상징 중의 하나이다. 부유한 상류층은 비싸고, 사치스럽고, 특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비생산적인 일에 탐닉한다. 고급 의상은 비싸고 우아하지만 불편하다. 육체적이고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아무런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으면서 하류층의 몫을 태연하게 가져가는 부유한 상류층들이 탐욕과 어리석음, 특권에 비이성적으로 중독된 사회를 만든다. 그렇지만 이젠 자랑하는 유행은 지나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스타일이 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건은 이제 자랑이 아니라, 의미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각각의 물건에 가치를 부여하며, 그 가치는 물건에 붙어 있는 가격표와 상관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주 단순한 물건을 상당한 수준으로 향유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향유에 방점을 찍는다. 김기석 목사의 다음 글을 소환한다. "분주함이 사회적 신분에 대한 표징으로 인식되는 세상에서 한가로움은 덕이 아니라 게으름으로 받아들여지기 일쑤이다. 가속의 시간에 적응하며 사는 이들은 아름다운 풍경이나 예술품 앞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아니, 오래 머물지 못한다. 시급히 처리해야 할 일에 몰두하는 동안 향유의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향유’와 ‘사용’을 구분한다. 사용이 대상을 자기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것이라면, 향유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것이다. 향유는 가장 온전한 사랑함이다. 향유의 능력을 잃어버리는 순간 타자들과 허물없이 순수한 사귐은 불가능 해진다. 사용할 것을 많이 소유하는 것을 성공의 가늠자로 삼을 때 사람은 욕망의 종살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단지 낭비하지 않는 삶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질적으로 풍요해진 것을 넘어 과포화 상태에 이른 사람들은 남아도는 소유물을 거추장스러운 짐으로 느낀다. 그래 향유하기 위해서는 짐을 버리고 자유로움 느끼려 해야한다. 그들에게 중요하는 것은 '물질적인 소유물을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누리는 경험이다. 그런 경험이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향유할 수 있게 해준다. 여기서 향유는 '스스로 선택한 검약과 노력, 결핍을 누리고 즐긴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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