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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반응과 대응은 다르다.

2977.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10월 10일)

오늘 아침 <인문 일지>의 화두는 '쾌(快)'이다. 우선 '쾌적(快適)"이라는 단어를 구글에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쾌적하다'를 가리킨다. 이 뜻은 '기분이 상쾌하고 즐겁다'였다. 그러니까 '쾌적'은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기분의 문제이다. ''상쾌라는 단어의 뜻을 찾아 보았다. 역시, '상쾌(爽快)하다'를 가리킨다. '기분이나 느낌 등이 시원하고 산뜻하다(feeling cool and fresh)'로 정의하였다. '산뜻하다'는 '기분이나 느낌이 깨끗하고 시원하다' 설명되었다.

'희로애락(喜怒哀樂)'에서 '희'는 기쁨이고, '락'은 즐거움이다. 둘 다 '쾌(快)'의 감정이지만, '락(樂)'은 감각적 차원의 쾌감이다. 이 쾌감은 고통이나 불편을 동반하지 않은 순수한 감정이다. 이 감정은 동물도 느낀다. '희'는 고통이나 불편이 동반된 쾌감이며, 정신적인 것이다. 이 기쁨이라는 감정은 순수한 쾌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불쾌감을 거치고 난 후의 쾌감이다. 그러니까 기쁨의 '희'에서 불쾌감은 만족의 지속을 위해 불쾌를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이를 우리는 '자발적 불쾌'라 한다. 이 '자발적 불쾌'가 있을 때 '쾌'는 깊어지고 길어진다. 즐거움은 쉽게 휘발되지만 기쁨은 오래 지속되는 이유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은 낯선 사람들과 도시라는 인위적인 공간을 만들어, 자신의 행복과 안전을 담보하는 도시 안에서 사는 동물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래 우리는 자기를 절제하여, 자신의 몸과 마음을 최적의 상태로 훈련시켜, 말과 행위를 통해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쾌적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즉 다른 사람의 기분이 상쾌하고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몸가짐의 정교함과 섬세함을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여야 한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주변의 사람들과 사물에 대하는 태도로 발현된다. 주변 사람들에 감동을 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자신의 기분에 따라 되는 대로 반응하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상황에서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예컨대, "요가 수련자의 마음은 자, 비, 희, 사의 실천을 통해 기쁘거나 슬프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상관없이, 언제나 쾌적하다." (파탄잘리, <요가수트라>) 사실 어떤 사건이 기쁘고, 슬프고, 혹은 행복하거나 불행한 것은 없다. 이런 감정들은 그 사건에 대해 나의 반응일 뿐이다.

반응에 방점을 찍는다. 반응과 대응은 다르다. 참을 인(忍)자를 풀면, '가슴에 칼을 얹고 있다'이다. 따라서 칼을 참지 못하는 자를 먼저 찌른다. 참아야 한다. 충동을 참아야 한다.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대응하는 거다. 충동을 행동으로 바꾸는 사람이 짐승이 아닌 진짜 사람이다. 충동은 짐승들이 하는 거다. 진화가 충동-운동-행동, 이렇게 3 단계로 이루어진다.

박문호 박사의 강의에서 '진짜' 흥미로웠던 것은 그가 밝힌 "생명 진화의 3단계"였다.
 
▪ '감지-반응' 단계: 박테리아 수준
▪ '감각-운동' 단계: 동물 수준
▪ '지각-행동' 단계: 인간
 
동물은 반응을 하고, 인간은 행동을 한다. 생명 현상은 외부자극에 대한 반응이다. 반응을 잘못하면 생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뇌과학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한다.
▪ 1단계: 비의식적 인식: 여기서 인식은 '안다'는 말이다. 박테리아나 벌레, 곤충들의 뇌이다.
▪ 2단계 주지적 의식: 지각, 개념, 의미가 나온다.
▪ 3단계 자기 주지적 의식: 여기서 감정과 자아(self) 스키마가 나온다. 스키마는 기억된 개념, 상황을 파악하게 하는 비의식적 표상으로 정의된다. 쉽게 말하면, 어떤 상황에서 별다른 의식 없이도 행동이 연결되는 상태를 말한다. 스키마는 상황을 만나면 발현되는 감정과 자아이다. 감정과 자아의 출현을 이해하게 되었다.
 
인간은 느낌의 세계에는 불안과 공포가 있다. 그 차이는 공포는 대상이 있고, 불안은 대상이 없다. 불안은 막연하다. 반면 공포는 강도가 강한데 대상이 사라지면 해결된다. 그런데 불안 다음과 같이 4가지 속성이 있다. 불안은 언제 일어날지 모르고, 언제 끝날지 모르고, 얼마나 지속될 지 모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른다. 이 불안은 불확실성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확실성을 줄이려 출현한 것이 자아(self)이다. 그래 인간은 자기 주지적 의식을 하는 거다. 박문호 박사의 유튜브에서 배운 거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불안을 없애려면,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한 삶은 자신의 관심사를 끊임없이 공부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끊임없이 좋아하는 것을 공부하고 있으면 불안하지 않다. 내 실력이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다고 느끼면 불안하지 않다. 그러나 성장이 목적이 되는 것은 싫다. 그냥 성장하며 사는 거다. 목적 없는 삶을 살아내는 거다. 그것이 나에게는 노자적 삶이다.
 
노자가 말하는 도(道)는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세다. 만져지지 않는 것이 만져지는 것보다 더 세다. 도는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것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있다. 그래서 가장 보이지 않는 것이고, 가장 만져지지 않는 것이다, 가장 높아서 가장 세다. 따라서 노자는 '도'를 억지로 개념화하여 '크다(大)'고 하였는데, 이 '크다'는 말은 '전체'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즉 전체 우주의 존재 원칙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 전체는 가만히 있는 정지된 어떤 존재가 아니라, 부단한 운동 속에 있다고 보았다. 또 하나 빠뜨리는 곳이 없는 부단한 운동의 방향은 먼 곳을 향하여 있는데, 이는 어떤 극한을 향하여 간다는 뜻으로 보았다. 사물의 발전은 극점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그 극점에 이르러 다시 그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간다는 거다. 이것이 노자가 보는 전체 자연의 운행 모습이었다. '대(大)→서(逝)→원(遠)→반(反)'은 전체 운행의, 즉 도의 운행을 나타내는 전략 아래 동원된 유기적 의미 연관 고리들이다.
 
그래서 이 세상 어떤 것도 '도'의 지배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일상에서 수행할 수 있는 득도(得道)의 길은 보이고 만져지는 것에 가까운 것과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것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할 때,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영역에 가까운 쪽의 것을 선택하면 된다. 한 마디로 말하면 '도'에 가까운 쪽을 선택하면 된다. 예컨대, 구체적인 것보다 추상적인 것을 선택하여야 한다. 모순적인 상황에서 도에 먼 쪽의 것이 보내는 유혹을 이겨내고, 가까운 쪽을 선택할 때 우리는 항상 용기가 필요하다. 
 
이 용기를 발휘하여 도에 가까운 쪽을 선택하는 승리를 한 번 경험하면서 우리는 점점 우주적 삶의 경지로 이동한다. 결국 우주적 삶은 모순적 상황에 처한 매우 미미하고 고독한 주체가 용기를 발휘하는 그 찰나적 순간에서만 피어난다. 이 용기가 여기 멈춰 있는 나를 저기로 건너가게 한다. 이것이 깨달음이다. 노자는 이런 상황을 "습명(襲明)"이라 했다. 그러면서 기존의 자기는 여지없이 깨지고 알지 못했던 곳으로 도달해간다. 여기 있는 자기를 아직 알려지지 않은 저곳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우주적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미미한 자신에게 '그렇다면 나는?'이라는 질문을 계속 해대면서 일상에서 작은 승리를 경험 시키는 일이 바로 우주적 삶이다.

"습명"은 자연스러운 깨달음, 직관적으로 사물의 본질을 깨우치는 것이다. 습자는 '엄습할 습'자로 어떤 깨달음이 부지불식간에 훅 하고 다가온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다. 한밤중 소리 없이 안방으로 엄습해 들어오는 고양이처럼 말이다. 화두를 붙들고 낑낑거린다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머리를 비우면 자연스럽게 깨달음이 찾아온다. 그래서 모든 깨달음은 본질적으로 "습명"이다. 보리수 밑에서 석가모니가 얻은 깨달음도 "습명"이고, 광야에서 예수가 찾은 깨달음도 "습명"이다. 

최근 동아시아가 세계의 중심이 되었고, 특히 한국의 문화 위상이 세계를 리드하고 있었던 것은 우리의 인문(人文) 전통이라 본다. 특히 조선의 인문적 전통이 이제 꽃을 피우는 것 같았다. 여기서 말하는 인문은 언어, 역사, 문학, 철학, 종교 등의 세계를 말한다. 이 인문 세계가 추구했던 것들은 다음과 같다. 빨리 다시 회복해야 한다. 그러나 현 정부에는 기댈 수 없다. 
▪ 인문 정신은 세끼 먹는 것을 뛰어넘어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찾고자 하는 인간의 부단한 노력을 하는 거다. 인간과 짐승은 다르다. 짐승은 감각과 본능적인 충동 반응이라 할 수 있는 운동의 결합으로 활동이 이루어진다면, 인간은 지각과 충동을 제어하는 행동의 관계로 삶이 이루어진다는 거다. 고양이는 배부르면 졸고 있지만, 인간은 졸려도 새로운 지각의 창문을 열고 생각한다.
▪ 동물과 하등 차이가 없는 인류가 시간과 공간을 확장시킨 문명을 구축한 것은 '생각하는 힘'에서 나오는 지각 능력과 상상력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 힘은 종교의 천재들 또한 철학자들이 키워준 거다. 인간의 한계상황을 돌파하여 고단한 우리의 삶에 한 줄기 빛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생각하는 힘’에 의해서다. 그 '생각하는 힘'이 감각의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지각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다.
▪ 인문학은 무한과 영원을 향한 영혼의 등대로 '희망의 학문'이다. 벌거벗은 몸을 거울에 비추어보라. 볼록한 배, 가는 다리, 퀭한 눈동자. 생물학적인 존재로서는 어느 것 하나도 볼품이 없다. 그러나 소멸해가는 존재일지라도 자신만의 왕국임을 자부하며 자기완성의 길을 멈추지 않도록 돕는 것이 인문학이다. 먼지에 불과한 존재일지 언정 천지와 우주와의 합일을 꿈꾸고 바라게 하는 것이 인문학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세계 속에서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는 이유는 인문 정신의 쇠퇴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웃의 고통을 내면 화하지 못하는 불치의 병이 전염되고 있기 때문이다. 경쟁의 파고 속으로 밀어 넣는데 어떻게 이웃과 내가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인문학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말은 없다. 전쟁은 국가와 자본이 공모한 학문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돌이켜 살펴보는 마음의 힘이 욕망에 막혔기 때문이다.
▪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의 인문학이 피폐해진다면 인간은 언젠가 기계의 노예가 될 것이다. 인문학의 죽음은 인류의 파멸로 이어질 수 있다. 관계의 망을 따뜻하게 보살피며, 과학과 기술의 한계를 직시하고, 부조리와 야만을 재판하며, 자본의 자기 파멸적 행위를 멈추게 하는 것이 인문학이다.


늦게 출가해 경전 외는 승려가 발견한 구절/류시화

어떤 꽃도
거짓으로 꽃을 피우지 않는다
어떤 새도
절반의 마음으로 날개 짓 하지 않는다
어떤 번개도
건성으로 파열하지 않는다
어떤 강도
마음에 없이 바다로 향하지 않는다
어떤 바다도
절실함 없이 파도 치지 않는다
이 길에 온 존재 쏟아붓지 않는 것은 없다
자신이 속한 세상과
일체가 되기 위해
다 걸어야 한다
아무런 작은 기회라도
온몸을 던지는 씨앗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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