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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사랑은 식탁을 타고 온다.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사랑은 식탁을 타고 온다.'

어제는 모처럼 비가 오지 않고 날이 맑았다. 나는 하루 종일 에어컨 밑에서 책을 읽으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보내다가, 오늘 아침 시를 만났다. 그림이 그려진다. 숨쉬기가 힘든 한 어른이 약국에 왔다. 손님은 꼭 약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답답한 마음 속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약사는 그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어른 이야기를 다 받아 주는 것이다. 일상에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다 받아 주는 것, 그보다 더 좋은 약이 있을까?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는 소중한 줄 모를 때라고 그 숨쉬기 힘들다는 손님은 이야기한다. "소중헌 줄 모를 때가 질로 좋은 때여라/그때 챙기고 생각허고 애껴줘야 해/한번 상하면 돌리기가 만만치 않다는 걸/넘치고 썽썽할 땐 모다 모른단 말이오." 지난 글들은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그런 마음으로 어제는 점심은 우리 동네에서 제일 건강하고 맛있는 갈비탕의 국물로 즐겼고, 저녁에는 곱창 구이에 감자와 와인을 곁들여 즐겼다. "안 아플 때, 많이 먹는 거지. 실컷 먹어." 나는 '사랑은 식탁을 타고 온다'는 말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식탁은 단순히 배고픔을 채워주는 물리적인 공간이지만, 동시에 함께 밥 먹는 사람들의 사랑과 정을 나누고 교육이 이루어지는 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쉽게 분노하고, 폭력이 난무하는 이유는 사랑과 유대가 넘쳐흐르는 식사 공간의 증발과 식탁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정서적 접촉 기회가 부족한 결과라고 본다.

근본적으로,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는다는 것은 친근함을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다. 맛있고, 보기 좋은 요리로 배를 채우다 보면 쌍방 간에 여유가 생길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열려 있는 ‘틈’을 발견하게 되어, 서로가 서로를 잘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말에 ‘한솥밥 친구'라는 말이 있다. 이를 영어로 말하면 ‘companion’이고, 여기서 회사라는 뜻의 company가 나온다 프랑스어로 말하면 ‘compagne’이다. 이 말들의 어원을 분석해 보면, ‘동무, 동반자'란 뜻이지만 ‘같이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에서 나온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들은 모두 다 ‘함께 먹는 즐거움을 나누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먹는 즐거움을 공유하는 것은 곧 삶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오늘 아침 사진은 어느 식당 앞 화단에서 찍은 것이다. 꽃 이름이 '꽃범의 꼬리 꽃'이다. 나는 산책하다 새로운 꽃을 만나면, 스마트폰으로 꽃의 이름을 알아본다. 그 이름은 꽃이 피는 모습이 마치 법의 꼬리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화서(花序)'란 말이 있다. 꽃이 줄기에 달리는 방식으로, '꽃차례'라고 한다. '유한화서(有限花序)'와 '무한화서(無限花序)' 두가지이다. '유한화서'는 성장이 제한되며 위에서 아래로, 속에서 밖으로 꽃이 핀다. 반대로 '무한화서'는 성장이 제한 없이 밑에서 위로, 밖에서 속으로 꽃이 핀다. '유한화서'는 원심성을, '무한화서'는 구심성을 보이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무한화서는 밖에서 속으로 꽃을 피우며, 제한 없이 밑에서 위로 성장하며 무한으로 나아간다. 구심성을 지킨다. 꽃에서 배운다.

인간의 욕망은 원심력의 속성이 있고, 인간의 본성은 중력때문에 구심성의 속성이 있다. 그러니까 우리의 욕망은 점점 더 커지고 높아지려 한다. 그러니 우리는 원심력을 타고 자신의 본성이 이탈하려는 욕망을 중심 쪽으로 끌어내려야 한다. 그래야 균형이 이루어진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절제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늘 내면을 들여다 보는 성찰이다. 그런 사람이 무한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본다. 오늘도 좀 절제하고 나를 관조하며,주어진 휴일의 삶을 즐길 생각이다. 있을 때 잘 하고, 성할 때 실컷 숨 쉬면서. 약속한 대로, 김누리 교수의 주장은 시를 읽은 후로 미룬다.


젤로 좋은 때는, 숨/김청미

게으름 피지 말고 부지런히 내쉬면 되지라
그것이 뭣이 어렵다고 그라고 엄살이오
워메 이 양반이 어째 말을 이라고 험하게 해부까
나라고 그리 안 해봤겄소
그것이 암상토 안 할 때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쉽지라
가슴이 쑤시고 씀벅거림서부터 요상시럽게 안 되야
시상사가 다 그렇지만
소중헌 줄 모를 때가 질로 좋은 때여라
그때 챙기고 생각허고 애껴줘야 해
한번 상하면 돌리기가 만만치 않다는 걸
넘치고 썽썽할 땐 모다 모른단 말이오
요로케 되고 본께
숨 한번 지대로 쉬는 것이
시상에 질로 가볍고 무거운 것이여

"독일은 텐샷(ten shot) 사회인데 반해, 한국은 원샷(one shot) 사회이다"

68혁명이 없는 한국의 상황, 그 세번 째 특징은 우리 사회가 권위주의 사회라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특히 학교 현장에서 벌어지는 살인적인 경쟁은 승자독식의 논리와 연결되어 권위주의 문화를 더욱 강화하는 요인으로 작용 하고 있다. 김누리 교수에 의하면, 독일의 경우는 학교에서 경쟁을 시키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경쟁 이데올로기가 극단 화되면 또 다시 나치즘 같은 야만을 낳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나치즘의 핵심은 아리안 족이 가장 우수하고 유대족이 가장 열등하다는 식의 차별 의식과 우열 사고의 바탕에는 경쟁의식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독일인들은 아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아이들을 최대한 경쟁 시켜서는 안 된다고 본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는 시험 보는 날짜를 미리 알려 주지 않는다고 한다. 평소 실력으로 평가하자는 것이다. 미리 시험 날짜를 알려주면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스트레스를 줄 수도 있다고 우려하기 때문이다.

물론 스포츠에서는 경쟁을 한다. 독일에서는 삶과 스포츠를 분리해서 본다고 한다. 스포츠는 당연히 경쟁을 하지만, 삶에서 스포츠의 경쟁 방식을 따르는 것은 야만이라고 아도르노는 말했다. 왜냐하면 스포츠에서 중요한 것은 성과이지만, 삶에서 중요한 것은 행복이기 때문이다. 교육을 영어로 말하면, 'education'이다. 이 말은 밖으로(e-) 끌어낸다(duc-)는 말의 합성어이다. 고유한 재능은 사람 안에 이미 다 들어 있고, 그걸 끌어내는 게 교육이지, "지식을 처넣는" 것이 교육이 아니다. 그건 "반교육"이다. 독일의 교육 문법을 보면, 치열한 경쟁을 시켜야 우수한 인재를 기를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우리의 뿌리깊은 편견이다. 편견을 낳는 원인은 대개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이다. 세상에 대한 지식과 경험 부족, 상상력 부족, 오만과 자만심, 공감 능력의 부족, 삶의 내, 외부 균형 상실이다. 우리가 경쟁에 대해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경쟁은 야만"이라 말했다. 그런 차원에서 독일은 학교에서 경쟁을 없앴다는 것이다. 김교수는 독일의 두 가지 예를 소개한다. 하나는 우리 같은 대학 입시가 없다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고등학교 졸업 시험이 있는데, 그걸 "아비투어"라 한다. 이 '아비투어'는 대학에 가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거의 대부분이 다 합격한다고 한다. 이 '아비투어'에 붙은 학생은 모두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를, 원하는 때에 갈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대학에 원하는 때에 갈 수 있다는 점이다. 다음 해에 갈 수도 있고, 5-10년 후에 갈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독일 대학에서는 대학과 전공을 옮기는 것도 어렵지 않다고 한다. 다만 정원보다 많은 학과 학생들이 지원하는 학과를 '정원 제한' 학과라 하는데, 추첨 방식을 택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20% 이내에서 '아비투스' 성적을 반영하고, 같은 비중으로 반영하는 것이 대기 기간이다. 정원 제한 학과에 입학하기 위해 몇 년을 기다려 왔는지를 비중 있게 고려한다고 한다. 의대의 경우, 인내심을 갖고 기다린 끝에 입학한 아이들 중에서 더 훌륭한 의사가 많이 나온다는 흥미로운 연구들이 있다고 한다. 정말이지 치열한 경쟁을 시켜야 우수한 인제를 기를 수 있다는 것은 우리들의 뿌리 깊은 선입견이다.

그건 사회 정의적 측면의 접근이기도 하다. 독일 사회는 그 구성원에게 최대한 많은 기회를 제공하려고 하는 반면, 우리 사회는 그 구성원에게 최소한의 기회마저 박탈하려고 한다. 김누리 교수가 소개한 "독일은 텐샷(5en shot) 사회인데 반해, 한국은 원샷(1 shot) 사회이다"의 독일 교수의 말이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독일인들에게는 10 번의 기회가 주어지는데, 한국인에게는 한 번의 기회밖에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일 사회가 성숙한 사회가 된 것은 그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최대한 자신의 재능을 실현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라 본다. 반면 우리 사회는 너무도 많은 재능들이 발현되지 못한 채 사장되는 사회이다. 더 심각한 것은 우리 사회가 기회를 박탈하는 시회일 뿐만 아니라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을 차별하는 사회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차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차별과 격차가 존재하는 현실이 우리가 지극히 기형적인 사회에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는 이 거다. 현재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라는 정상적이지 않은 사회가 된 것은 우리가 소위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과 성찰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정치적 상상력이 지금부터는 많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과 상상력의 지평이 확장되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들 중 하나이다.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20-50 클럽'에 들어 있다. 경제 규모는 세계 10위 권에 드는 나라이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불 이상, 인구가 5천명만 명 이상인 나를 이렇게 부른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지금 정치 민주화는 이루었는데, 사회, 경제 그리고 문화 민주화의 몸살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이 번 한주도 이런 이야기를 계속 공유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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