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나는 『주역』이 주장하는 "극즉반(極即反)"이라는 말을 믿는다. '세상에 모든 것은 극점에 이르면 반드시 돌아간다.' 코로나-19가 그 극점이라 본다.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인데, 창 밖에 비가 내린다. 어제 온 종일 그렇게 흐리더니, 밤 사이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나 보다. 코로나-19가 충격을 준 이후, 많은 이들이 나와 사회 그리고 세상에 대해 되돌아 볼 기회를 갖고 있는 듯 하다. 지난 주, 우리는 새통사에서 코로나-19가 일깨워 주는 문제들에 대해 on-off mix 강의와 토론 모임을 했다. 크 게 세 분야로 나누어 고민했다.
- 차이(差異)란 무엇인가?
- 실제(real) vs 실체(reality)에서 실체(實體)란 무엇인가?
- 방향성(方向性)은?
나에게 관심을 주었던 몇 가지를 공유한다. 우선 '차이는 힘이다'라는 과학 공식이었다. "E=hv"이다. 차이는 차원이 다른 것이라는 말이다. 들뢰즈의 표현에 의하면, '차이의 반복'이 새로운 판을 만든다는 말인 것 같다. 지난 글들은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우리의 실체를 보면, "우리는 ~ 뜻(energy)을 펼치는 존재"라는 정의에 관심이 갔다. 특히 뜻을 에너지로 해석했다. 나는 그걸 의지(意志)로 읽었다. 나는 내 에너지를 어디에 많이 쓰고 있는가? 자문도 해 보았다. 그 에너지의 분배가 실제와 실체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그 다음은 "세상은 게스탈트(Gestalt)다"라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살짝 "합리(合理)는 각각의 모두를 보살필 수 있는 것"이라 했는데, 이건 좀 더 따져야 할 일이지만, 그 맥락(contexte)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게스탈트는 독일어인데, 우리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지각할 때 떠오르는 어쩐 형태이다. 게스탈트 심리학에서 쓰이는 용어이다. 게스탈트 심리학이란 개체는 대상을 지각할 때, 그것들을 부분들의 집합으로 서가 아니라, 하나의 의미 있는 전체, 즉 게스탈트를 만들어 지각한다는 것이다. 한국 말로 하면, '완결성의 법칙'으로 해석한다. 이는 불완전한 자극을 서로 연결시켜 완전한 형태로 만들려고 하는 인간의 본능적 경향을 의미한다. 주의할 것은 게스탈트 심리학의 명제에서 부분의 합이 전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각각의 부분이 합쳐지면 부분의 특징은 사라지고, 전체로 서의 전혀 다른 형태, 즉 게스탈트가 만들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순석 부장은 이런 도표를 보여 주었다. 센스와 지식 사이에서 센스가 높고, 지식이 낮으면 '사기꾼'이고, 센스도 낮고, 지식도 낮으면 "바보"이고, 센스는 낮은데, 지식이 높으면 '꼰대"이고, 센스도 높고 지식도 높아야 "수퍼 스타"라고 했다.
또 이야기가 길어진다. 여기서 멈추고, 시 다음으로 사유를 미루겠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는, "열풍을 깔아 앉히고/아침을 식히려 비가 내랍니다"로 시작되는, <여름 비>이다. 우리 사회가 지금 너무 뜨겁다. 극에 달했다. 이번 주에 내리는 비들로 열기가 가라 앉았으면 한다. 전도(顚倒)된 가치가 다시 전도되길 기원한다. 이미 우리 사회는 가치전도 현상이 극에 달해 있다. '가치전도'는 수단과 목적 중에서 수단이 중요해지면서 수단이 목적이 되는 현상을 말한다. 가끔 읽게 되는 김용택 교장 선생님의 오늘 아침 참교육 이야기의 제목이 "가치전도 된 사회에서 살아남기"이다.
공부를 자아성장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에 가기 위해서 한다. 사람이 인격이 아니라, 그 사람의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로 평가한다. 예수를 가장 많이 닮아야 할 성직자들이 예수가 가장 싫어하는 행동을 한다. 과정이 무시되고 결과가 중시된다. 매춘을 하든, 도둑질을 하든, 돈만 벌면 존경받는 사회이다. 그러나 나는 『주역』이 주장하는 "극즉반(極即反)"이라는 말을 믿는다. '세상에 모든 것은 극점에 이르면 반드시 돌아간다.' 코로나-19가 그 극점이라 본다. 비도 마찬가지이다. 물이 올라가 내려오는 거 아닌가? 아침 사진은 남원에 있는 시립김병종미술관에서 김병종 교수님의 작품을 찍은 것이다. '상선약수'라는 말이 끌렸다. 물같이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이다.
여름 비/김덕성
열풍을 깔아 앉히고
아침을 식히려 비가 내립니다.
님이 보낸
사랑의 빗방울처럼
정겹게 내리면서
반갑게 다가와
뜨거운 살결을
식히는
달콤한 청량제
누구는 비를
눈물이라고 말을 하지만
생수라
말하고 싶어요.
내 손바닥에 내린 빗방울 하나
따르르 구르며
그리움을
실고 와 전하는
님의 편지니까요.
계속해서 지난 주 <새통사>에서 있었던 강의 내용 이야기를 이어간다. 세상은 Chaos다. 예측하려 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이해한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1인당 한계 수익이 감소하는 지점에 우리는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이젠 성장의 시대는 가고 마이너스 성장 시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가격 경쟁력 이외의 부가 가치 창출 방법이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래 실천을 위한 새로운 판을 짜기 위한 tranformation이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읽었다.
방향성(方向性) 이야기로 이어졌다. 세 가지를 말했다. 준비된 대응의 빠른 실행, 실시간의 상황 공유, 새로운 대응의 빠른 생성. 2017년에 나온 존스톤의 『인포메이션』이라는 책의 내용을 읽어주었다. "인간의 활동 대부분이 자연적 행위자들과 에너지가 가는 길이 아닌 다른 경로로 이 자연력과 에너지를 '유도'하는데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가 아직 원시 유기체 혹은 심지어 고등 유기체의 몸에 있는 조직 요소들이 생리-화학적 과정을 유도할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이상하지 않는가?" 쉽게 말해, 우리는 반자연적으로 살고 있다는 말 아닌가? 그 다음 내용은 이해를 했지만, 딱 부러지게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해한 것은 유기체적인 "개성의 경제"가 실현되는 도시를 위해서 디지털에 기반을 두고, 실패를 허용하는 실험 공간을 만들고 다양성이 원활하게 소통하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런 걸 인문학은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행복의 기준은 저마다 다르지만 모두 행복한 삶을 꿈꾼다. 그러나 학교에 입학한 순간부터 시작된 경쟁과 적자생존의 논리는 사회생활에서도 이어졌고 지금껏 우리들의 하루하루를 만들어 가고 있다. 그러면서 가치가 전도되기 시작했다.
물론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치열하게 사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경쟁을 통해 내 안에 잠자고 있던 가능성이 십분 발현되기도 하고 발전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경쟁을 통한 성취를 최우선시하는 사회에서는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누릴 여유가 허락되지 않는다.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의 국민의식을 조사한 자료를 살펴보면 행복하기 위해 거창한 무언 가가 필요한 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며 '남 보란 듯이' 살지도 않는다. 물질보다는 마음의 여유를, 전체보다는 개인의 가치를 존중한다. 남보다 빨리 갈 필요도 없다. 조금 느릴지라도 꿈을 향해 살아갈 수 있는 삶, 경쟁에 밀릴까 조급해 하지 않아도 되고 꿈을 이루기 위해 남을 밟지 않아도 되는 삶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 아닐까?
다만, 인간으로 도달할 수 없지만, 천상의 세계, 신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매일같이 자신 앞에 놓인 작은 산(작은 임무, 다른 이를 나처럼 사랑하는 일)을 정복해야만 했다. 일상에서 그런 자신의 임무에 충실해야만 한다. 그리고 자만심을 경계해야 한다. 평소 자신이 이해한 조그만 지식을 최고라고 착각하며, 그 지식이 세상 지식의 전부이며 다른 지식의 기준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자만심이다. 우리가 소크라테스를 가장 현명하다고 하는 이유는 그가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항상 새로운 것을 배우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아도취를 경계해야 한다. 자신이 가장 잘 생겼다는 편견으로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주장은 오류이다.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스스로 아름답다고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스스로 영웅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영웅은 완벽한 영웅이 되고자 매순간 수련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양성으로 다름을 받아들이고, 같이 살아야 한다.
인도의 르타(rta)는 우주와 그 안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의 근원이다. 이 르타가 인간이 사는 공동체에 적용되면 다르마이고, 그리고 그것이 개인에게 적용되면 카르마이다. 다르마와 카르마는 중국으로 들어가 '법(法)'과 '업(業)'으로 번역됐다. 어떤 상황에서도 욕심을 버리고 의로움에 헌신하는 다르마! 한 사회가 순리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 있다. 그 사회의 약자를 인식하고 그들을 헤아리는 마음인 '연민'이다. 그래야 '법'이 서고, '법'이 서야 사회가 순리대로 작동한다.
'다르마'는 인간의 옳음이다. '옳음'이란 자신의 양심이 자신에게 해가 되더라도 그것을 용기 있게 행동으로 옮기는 내적인 훈련이자 원칙이다. 이 양심인 옳음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터무니없고 자신에게 손해를 입힐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 속에 숨어 있는 옳은 양심을 행하는 것이 다르마, '법(法)'이다. 이 법이 오늘의 화두인 '자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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