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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나를 소모하지 않는 현명한 태도

274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6월 10일)

오늘은 단오절이다. 음력 5월 5일로 1년 중 양기(陽氣)가 가장 왕성한 날로 여겨진다. 단오의 단(端)은 첫 번째를 의미하고 오(午)는 다섯을 의미하는 오(五)의 뜻으로 통하므로 매달 초하루부터 헤아려 다섯째 되는 날을 말한다. 예로부터 음양사상에서는 홀수를 양(陽)의 수라 하고, 짝수를 음(陰)의 수라 했는데 양의 수를 상서로운 수로 여겼다. 그래서 양수가 겹치는 날인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 9월 9일은 모두 홀수의 월일이 겹치는 날로 길일로 여겼다. 우리 조상들은 이런 날이면 어떤 일을 해도 탈이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며 그 중에서 단오는 일 년 중 인간이 태양신을 가까이 접할 수 있을 정도로 양기가 가장 왕성한 날이라 하여 큰 명절로 여겨왔다. 모내기를 끝낸 후 풍년을 기원하는 '기풍제'로서 '수릿날'  '천중절' '중노절' 등으로 불린다. 1518(중종 13년) 년부터  설날, 추석과 함께 3대 명절의 하나로 지켜왔다. 단오절엔  씨름, 그네뛰기, 풍등, 부채 만들기, 수리취떡  먹기 및 창포물에 머리감기 등이 있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들을 조용히 이끄는 리더들이 있다. 이들의 성공은  의지의 결과가 아니라, 그때의 상황이나 문화 그리고 부하 직원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소박한 특징이 있는 이러한 리더들은 두 종류가 있다.
1. 다른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경험한 삶의 양식을 제시하고, 다른 사람이 그 방향을 따라 주기를 원한다. 이들은 결코 뽐내거나 우쭐해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쫓아가야 할 기준을 제시할 뿐이다.
2. 자신이 앞으로 나서기 보다 다른 사람이 무대에 설 수 있게 해준다. 일하는 방법은 다양한 사람이 함께 일하는 것이므로 각자의 특징을 고려하며, 그들의 능력을 보완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공동의 과제를 내세운다. 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재능을 가진 다양한 존재들이 필요하다.

이런 소박하고 내성적인 리더들은 직원들에게 관심이 많으며, 그들의 생각에 주목한다. 그들의 말에 관심을 기울이며 집중해서 경청한다.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기 전에, 상대가 충분히 말할 수 있도록 한다. "내성적인 리더에게 사회적 지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거나 낯선 것이다. 그들은 자기 도취적인 성향이 있는 지배적 알파 유형들과는 다른 원천에서 권위를 이끌어 낸다."(실비아 뢰겐) 따라서 이런 리더가 말을 하면, 그건 충분히 숙고한 결과이다. 그리고 그 말에는 항상 핵심이 담겨 있다.

겸손이 현재 트렌드라는 사람들이 많다. 힘을 뽐내고 과시하던 영웅적인 시대는 이제 지나갔으며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서로의 거리를 지키면서 협력적인 관계를 선호한다. 광채와 매혹 따위는 이제 효과가 없다. 기업을 움직인 대표는 겸손하게 등장하는 것을 더 좋아하고, 떠받들거나 사치스럽게 보이는 것을 피하고자 한다. 

겸손한 사람은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게임을 하지 않으며, 남보다 뛰어 나려고 하지 않을 때 더 편안함을 느낀다. 자신을 예외로 두지 않으며, 모두에게 적용되는 원칙을 묵묵히 따른다. 자신을 찾아온 사람을 기다리게 하지 않고, 약속을 정확하게 지키며, 다른 사람들보다 오래 이야기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자신이 완벽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약점을 거리낌 없이 인정하며, 부족한 점을 솔직하게 말한다. 이런 인정은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긴장을 해소시켜 준다. 리더가 실수를 인정하는 것을 큰 문제로 여기지 않으며, 부하 직원들 역시 속일 게 적어지는 것이다. 그럼 뭔가 잘못 돌아가는 일이 생길 때 그 원인을 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리더가 좋은 선례를 보일 경우 '실수를 빠르게 인정하고 바로잡는 문화'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들 같지만, 이것들을 실천하면 나를 소모하지 않는 현명한 태도가 만들어지는 거다. 언젠가 리더의 세 가지 큰 재앙을 소개한 글을 만난 적이 있다. 
▪ 德薄位尊(덕박위존): 덕은 없는데 높은 지위에 앉다. 
▪ 知小謀大(지소모대): 아는 것은 없는데 사심은 엄청나다.
▪ 力小任重(역소임중): 능력은 없는데 큰 일을 도모한다.

어떤 리더가 그릇의 크기가 작고, 능력이나 지식도 없는데, 개인적 욕심만 커서 높은 자리 차지하고 막무가내로 큰 사업을 도모할 때 큰 재앙이 따른다는 거다. 재앙은 덕이 없음, 지식이 없음, 능력이 없음이 한 리더에게 겹쳐서 나타날 때 더 커진다.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덕 없음, 무지, 무능력 때문에 자리와 역량이 디커플링되었을 때 생기는 리더십 문제를 경고한다. 이런 리더가 리더의 자리를 장악하고 있다면 그 조직이나 그 국가는 반드시 큰 재앙에 도달함을 경고하고 있다. 반대로 덕과 지혜가 있고, 능력을 키우기 위해 지속적으로 학습해가며 자신을 낮추는 리더가 이에 걸 맞는 임무를 수행하는 상황이라면 복의 근원이 된다.

<<주역>> 독법에서 가장 먼저 설명해야 하는 것이 '위(位)'라 한다. 즉 '자리'이다. <<주역>>은 효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경우를 ‘득위(得位)’라 하고 잘못된 자리에 가 있는 경우를 ‘실위(失位)’라고 한다. '득위'는 아름답지만 '실위'는 위태롭다. <<주역>>의 핵심은 관계론이다.  '길흉화복'의 근원은 잘못된 자리에서 비롯된다고 봤다. 내가 있는 '자리', 즉 '난 누구, 여긴 어디'를 묵상하며 알아야 하는 것이다. 단순히 어떤 '직위(職位)'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우주 속에서 나의 위치까지 확장되는 용어이다. 한문으로 하면 '위(位)'이다. 

<<주역>>에 따르면, 제자리를 찾는 것을 '득위', 그렇지 못한 것을 '실위'라 했다. 득위는 만사형통이지만, 실위는 만사 불행의 근원이다. 잘못된 자리는 본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불행하게 한다. 고 신영복 교수는 자신의 책,  <<담론>>에서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처하는 경우 십중팔구 불행하게 된다. 제 한 몸만 불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에 빠트리고 일을 그르친다”고 하시면서, 우리들에게 자기 자신보다 조금 모자라는 자리, ‘70%의 자리’를 권한다. 이게 '득위'의 비결이라 한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 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 주장을 '그릇 론'이라 한다. “30 정도의 여유, 30 정도의 여백이 창조의 공간이 된다.” 반대로 70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0의 능력을 요구 받는 자리에 가면 어떻게 될까? “그 경우 부족한 30을 함량 미달의 불량품으로 채우거나 권위로 채우거나 거짓으로 채울 수밖에 없다.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그 자리도 파탄 난다.” 또한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자리와 관련해 특히 주의해야 하는 것은 권력의 자리에 앉아서 그 자리의 권능을 자기 개인의 능력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집터보다 집이 크면 그 터의 기(氣)가 건물에 눌린다. 집과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집이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집에 눌린다. 그 사람의 됨됨이보다 조금 작은 듯한 집이 좋다. 동아시아 철학의 관계론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자기의 능력을 키우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먼저 자기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걸 강조한다. 개인의 능력은 개인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인이 발 딛고 있는 위치(난 누구, 여긴 어디)와 관계 속에 생성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역>>에 따르면, '중(中)'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제일 위에 있거나 제일 앞에 있는 것을 선호하는 경쟁 사회의 원리와는 다르다. 위의 자리에서 중간(中)은 무난한 자리이기도 하고, 앞과 뒤에 많은 사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중간은 그물코처럼 앞뒤로 많은 관계를 맺고 있는 자리라는 거다. 그만큼 영향을 많이 받고, 영향을 많이 미치게 되는 자리이다. 실질적으로 선두가 전체 국면을 주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선두는 겨우 자기 한 몸 간수에 여력이 있을 수 없는 고단한 처지이다. 그와 반대로 맨 꼴찌는 마음 편한 자리이기는 하지만, 그곳은 무엇을 도모하거나 실천하기에는 너무나 후미진 공간이다. 더불어 관계 맺기가 어려운 위치이다. 

절반과 동반/신영복

피아노의 건반은 우리에게 반음의 의미를 가르칩니다.
반은 절반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동반을 의미합니다.
모든 관계의 비결은 바로 이 반(半)과 반(伴)의 여백에 있습니다.
'절반의 비탄'은 '절반의 환희'와 같은 것이며,
'절반의 패배'는 '절반의 승리'와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절반의 경계에서 스스로를 절제할 수만 있다면
설령 그것이 환희와 비탄, 승리와 패배라는 대적(對敵)의 언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동반의 자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동반’의 의미에 주목하여, 절반이 승리하면 남은 절반은 패배할 수밖에 없는 대립과 갈등의 관계에서 벗어나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더 나은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갈 수 있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남과 북, 여와 야 등 모든 갈등과 대립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 희망의 반대편에서 절망에 빠져 있는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할 때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 한쪽이 이기고 다른 한쪽이 지는 관계가 아니라 협력과 조화의 관계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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