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6월 8일)

협상의 버팀목이 베트나(BATNA)이다. 이 말은 '최선의 대안(the Best Alternative to a Negotiated Agreement)의 약어이다. 협상을 통한 합의가 불가능할 경우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이다. 흔히 협상의 기술을 다음 문장으로 요약한다., “협상은 마음에 안 드는 여자와 춤추는 방법이다. 대안(BATNA) 없인 나서지 마라.”
삶이란 매 순간 선택의 문제이고, 선택할 자유가 누구에게나 있지만, 선택한 결과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동양은 인생을 전체 속 개별로 해석하지만, 서양은 개별이 모여 전체가 되는 방식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동양과 서양은 협상이라는 말이 주는 어감이 다르다. 특히 대항해 시절 부를 축적한 영미 계열은 계약문화가 발달하여 협상 문화에 익숙하다. 근대의 시작은 그들 로부터 발생하였고, 아직도 그들이 세계질서를 지배하여, 협상은 문화뿐만 아니라 절차와 학문이 잘 만들어져 있다. 협상이라는 단어를 구글에서 검색하면 2,660만 개가 나오며, 영어로 검색하면 1.1억 개가 나온다. 요즈음에는 그만큼 ‘협상’이 일상화 되었다. 협상에는 수 많은 이론도 있지만, 근본 개념 중 하나가 BATNA*이다. 어쩌면 BATNA는 협상의 시작이자 마무리다.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와 춤을 추면서 BATNA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협상을 할 때면, 우리의 BATNA를 찾아야 한다. 없다면 만들어야 한다. 가치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지 남이 만들어 주지 않는다. 윤일원이라는 분에게서 배운 내용을 언젠가 요약해 둔 것이다.
우리는 일상의 삶 속에서도 종종 협상이 필요한 상황과 마주친다. 연봉 협상, 근무 환경, 업무의 역할과 범위, 성과에 대한 보상 등에 대해 협상을 한다. 그리고 업무와 관련되어 동료나 고객과 협상해야 하는 일도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겸손한 태도는 나쁜 게 아니다. 자의식을 가지고 등장하지만 과하지 않고, 물러 터지지 않으면서 외람되지도 않으며, 당당하면서 위협이지지 않아야 한다. 그러니까 나서지 않으면서 정중하게 일을 처리하는 겸손한 사람은 협상을 할 때도 유리하다.
그리고 영리한 협상은 자신만이 아니라 상대도 결과에 만족해야 한다. 따라서 훌륭한 협상가는 의기양양하지 않는다. 그리고 협상에서 겸손한 태도는 단지 상대를 존중하고 정중하게 대하는 것만이 아니며, 유용한 카드로써도 그 힘을 발휘한다. 그것은 적절한 타이밍을 기다릴 줄 아는 것이며, 혹시 모를 비상 수단을 쥐고 있는 것이다. 이 때 내미는 것이 합리적인 대안, BATNA이다. 그것은 협상의 초기부터 내놓고 싶지는 않았던 차선의 제안과 같은 패를 의미한다.
뚜껑론/신필영
열릴 때 열리더라도
꼭 다물고 참아야지
수십 번 부글거리며 속속들이 익는 시간
제대로
맛들 때까지
느긋이 기다려야지
오래 덮어둬야
약이 되는 누룩곰팡이
꽃피고 지는 소리 그냥 못 들은 체
발효된
절망의 이름
너를 다시 쳐다본다
박태웅이라는 IT칼럼니스트는 "협상할 줄 아는 사회를 위해 딜(deal)을 가르쳐야 한다"는 담론을 말한 적이 있다. 협상하는 사회를 위해, 학교나 가정애서 아이들에게 딜(Deal)을 가르쳐야 한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왜 우리는 두 진영으로 나뉘어 그렇게 물어뜯으며 싸우는지 몰랐다. 그런데, 딜(deal)을 가르치는 실질적인 교육을 생각해 보지 못했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장면이 있다. 딜을 하는 장면이다. 심지어는 서너 살 먹은 어린 아이 하고도 내가 이것을 할 테니 너는 저것을 해줄 테니 하며 묻고는 “딜”이라는 대사와 함께 주먹을 마주친다. 세상에는 상대가 있다는 것, 혼자 다 가질 수는 없다는 것, 주고받아야 한다는 것을 어릴 적부터 생활로 익히는 것이다.
박 이사장은 우리의 초등학교 도덕교과서의 성격과 목표는 다음과 같다고 소개했다. 읽기도 어렵다. “도덕적인 인간과 정의로운 시민이라는 중첩된 인간상을 지향점으로 삼아 21세기 한국인으로서 갖추고 있어야 할 인성의 기본 요소인 핵심 가치를 확고하게 내면화하고, 학생의 경험 세계에서 출발하여 자신을 둘러싼 현상을 탐구하고 내면의 도덕성을 성찰함과 동시에, 스스로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과정을 추구하는 ‘도덕함’의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는 교과이다.” 도덕함, 참 어려운 말이다.
'도덕함'에 대해선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도덕과에서 추구하는 도덕함은 학문적 탐구로서의 윤리학 공부나 윤리 사상사에 관한 지적 이해를 넘어서서, 한 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는 도덕 현상에 대한 민감성에 기반을 둔 관심과 분석, 그 도덕 현상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개인 내면에서 작동하는 도덕성에 관한 성찰과 실천 과정 자체를 의미하는 개념이다.”
박 이사장의 말처럼, 나도 추상적인 표현들이라 쉽게 이해하긴 어렵다. ‘내면의 도덕성을 성찰하고, 스스로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과정을 추구하는 도덕함의 시간과 공간’이라거나, ‘개인 내면에서 작동하는 도덕성에 관한 성찰과 실천과정 자체’라는 서술은 개인의 내면을 향하는 우리 도덕 교과서의 지향점을 보여준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조선시대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박 이사장의 말을 들어본다. "‘타협을 하느니 도끼로 목을 쳐 달라’는 선비의 굳은 절개는 지금도 추앙되는 높은 가치다. 이런 것들이 내면 지향의 교육과 만나 ‘갈등 사회'의 토대를 이룬다"는 것이다. 동의한다.
현재 우리 한국인의 문해능력은 세계 최하위 수준에 가깝다. 특히 한국의 성인 문해력이 더 심각하다. 2013년 OECD에서 PIAAC(성인대상 국민 역량 평가)를 했다. 그 결과 한국의 16-24세는 상위권에 있었지만, 55-64세는 세계 최하위 수준이었다. 25세를 기점으로 수준이 내리막을 탄다. 질 낮은 대학 교육과 너무 많은 노동시간 등으로 독서를 하지 않기 때문 같다. 민주주의는 말과 글로 하는 것인 만큼, 문해력이 떨어지면 사회를 민주적으로 이끌 수 없다. 문해력이 부족하면 복잡한 문제를 협력해서 해결하는 능력이나 빨라진 세상 변화에 맞추어 새로운 것을 수용하는 감수성도 함께 떨어진다.
문해력과 마찬가지로, 청취력도 비슷한 수준일 것이다. 상대의 얘기를 제대로 경청한 뒤 토론하고 그래서 합의안을 찾는 것, 타협하는 법이 우리의 (입시) 교육에는 빠져 있다. "도덕적 개인은 가르치되 합리적인 시민을 가르치지 않는 것, 신독(愼獨)하되 협업하지 않는 것, 현대 한국사회의 공교육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다. 공교육을 대학까지 정상적으로 다 마쳐도 계약서 한 장을 제대로 못쓰고, 취업을 위해 애는 쓰지만 노동법은 읽어본 적도 없고, 딜은 영화에서나 본 적이 있는 교육은 명백히 고장이 나 있다." 박이사장의 지적인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이 뉴런처럼 촘촘히 연결된 초연결의 사회에서 이런 결점은 치명적인 걸림돌이다. 도끼를 치우고, 상소문을 던져버리고, 초연결사회를 사는 현대 시민의 옷을 입어야 한다. 상대의 말을 깊이 경청하고, 서로에게 도움이 될 안을 마련해 손을 맞잡는 경험을 어릴 적부터 가르쳐야 한다."
그리스의 광장인 '아고라', 이것이 로마로 오면 '포럼(Forum)'이 된다. 이곳에서는
▪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 정제되고 절제된 자신의 생각을 잘 개진하고,
▪ 최선의 생각에 승복하는 문화가 있었다.
자신의 주장이 편협한 편견이란 사실을 모르고 말을 쏟아내는 ‘정치 지도자'를 꿈꾸는 사람들이 미디어를 통해, 국민의 정서를 점점 각박하게 만든다. 오히려 침묵했으면 한다. 침묵은 자신의 언행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에 대한 감사 표시이고, 언행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준비 단계이다.
그런데 당시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철학이 소크라테스를 죽인다. 어떻게? 소크라테스는 다수결원칙을 선이라고 착각하는 왜곡된 민주주의인 중우정치(衆愚政治, 이성보다 일시적 충동에 의하여 좌우되는 어리석은 대중들의 정치를 말한다. 고대 그리스 민주 정치의 타락한 형태를 이르던 말로서 민주 정치를 멸시하는 뜻)와 인기주의의 희생양이 되어 법정에서 독배를 마시고 순교 당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거침없는 말과 행동을 용기(勇氣)라고 착각하고, 그런 집단행동을 민주주의(民主主義)의 발판이라고 호도(糊塗, 풀을 바른다는 뜻으로 명확하게 결말을 내지 않고 일시적으로 감추거나 흐지부지 덮어 버린다는 뜻)한다.
따라서 지중해 인들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대신할 새로운 사상을 모색한다. 그 때 등장한 인물이 마케도니아 출신의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더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와 인간의 삶을 두 개로 구분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아름다움과 추함은 서로 섞일 수 없는 독립적이며 개별적인 개체가 아니라, 이런 구분은 생각에서만 존재하는 허상이라고 믿었다. 인간의 삶을 조절하는 중요한 가치와 해악의 구분은 모호하다. 선과 악의 경계는 희미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구분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여기서 나를 평화롭게 하는 통찰을 얻었다.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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