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0.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6월 4일)

며칠 전 지인의 SNS 담벼락에서 다음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가장 넉넉한 사람은 자기한테 주어진 몫에 대하여 불평불만이 없는 사람이고, 가장 강한 사람은 타오르는 욕망을 스스로 자제할 수 있는 사람이며, 가장 겸손한 사람은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하여 감사하는 사람이다." 이 문장이 눈에 쉽게 띈 것은 최근의 나의 화두가 "나를 소모하지 않는 현명한 태도"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답은 겸손을 기르는 것이다. 소란을 피우지 않고도 과도하게 애쓰지 않고도 감정을 소모하지 않고도, 겸손한 사람은 조용하고 강력하게 자신의 맡은 일을 잘 해낸다는 거다.
겸손한 사람들의 '과소평가 받는 즐거움'은 주변 사람들에게 기대하지 않던 성과를 보여줘서 놀라게 하는 데만 한정되지 않는다. 과소평가는 '지속 가능성'의 관점에서도 매우 유효하다. 모든 사람이 최고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높은 보수나 지위는 여러 면서 우리들의 삶에 쾌적함을 주겠지만, 불행하게도 그만큼 많은 것들이 우리들에게 요구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해결책이 없는 문제들 속에서 관리자의 임무를 떠맡은 우리는 이제 우리가 잘하던 일이 아니라, 다른 일로 평가받게 된다. 그 반대가 자신이 원하는 만큼 직업적 성취를 이루고, 그 위치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이다. 특별히 소란을 떨지 않고서도 그는 자신이 맡은 일을 잘 해낸다. 과도하게 애쓰지 않고, 에너지를 모두 소진하지도 않는다. 그저 뒤로 물러서 있으면서 다른 이의 삶이 앞에 나서는 것을 돕는다. 이런 사람은 늘 친절하고 계산적이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편안하게 대할 수 있고, 일과 관련된 솔직한 얘기도 털어놓을 수 있어, 그는 누구보다 사람들로부터 다양한 정보와 힌트를 얻기도 한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 로부터 신뢰를 얻었기 때문이다. 신뢰는 항상 두 개의 기둥을 바탕으로 한다. 바로 정직과 능력이다. 정직이란 마음에 거짓이나 꾸밈이 없으며 다른 사람을 악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이들에 대해 좋게 생각하며, 그들의 관심사를 존중한다는 뜻이다. 여기에 능력이 보태 져야 한다. 만일 내가 그를 신뢰한다면, 그는 내가 기대하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정직하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이 겸손해지는 거다. 사람들은 나서는 사람보다 겸손한 사람을 더 믿는다. 자신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고, 모든 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큰소리치는 사람은 오히려 의심을 사기 쉽다. 그런 사람이 보여주는 것은 신뢰가 아니라,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낮추는 태도로 자신의 단점을 말하고 경쟁자를 칭찬하는 사람을 더 믿을 만하다고 여긴다. 자신의 상처나 흠을 진솔하게 보여주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신뢰를 쌓는 방법이 된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 오히려 그런 사람은 재수가 없다. 반대로 자신의 상처 입은 내면을 볼 수 있게 허락한 사람들은 인간적이고 공감이 가는 사람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정리하면, 그저 잘난 체하는 태도를 버리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며 자연스럽게 자신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렇게 하면 신뢰를 얻을 수 있다.
"험블브래그(humblebrag)"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겸손'을 뜻하는 humble과 자랑을 뜻하는 brag를 합친 단어로, 겸손한 척하면서 은근히 자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 코미디언이자 작가인 헤리스 위틀스(Harris Wittels)가 만든 용어이다. 일종의 '겸손 떠벌리기'이다. 인정 받고자 하는 욕구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어느 정도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뭔가를 해내고, 인상적인 경험을 했다면,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싶어 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겸손을 떠벌리는 것은 오히려 허풍보다 더 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다. 사람들은 성과를 이룬 일에 대해 불평을 떠뜨리면 거만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내 세미나는 또 수강생들로 가득 참. 수강료를 올렸는데도 말이야. 나는 이렇게 북적대는 강의가 싫은데"라고 SNS에 올리는 거다. "잘못된 겸손의 기술"(헤리스 위틀스)이다.
진짜 겸손은 처음부터 끝까지 소박하게 절제하고 그 겸손이 효과를 발휘하기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다. 진정한 겸손은 '남을 존중하는 마음' 그리고 '자신을 낮추는 태도', 이 두 가지를 담고 있다. 그래 <겸손은 힘들다.> 이 말은 내가 틈나는 대로 듣는 Youtube의 김어준 방송 제목이기도 하다.
진짜 겸손은 강해 보이려고, 능력 있어 보이려고 자신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 거다. 과장된 포장은 결국 벗겨지기 마련이다. 그저 단단한 땅위에서 자신이 가진 보폭과 자신의 속도대로 걸어가는 거다. 우리는 자신의 속도로 살아야 건강하다. "삶이란 스스로의 속도로 자신만의 풍경을 얻는 과정이다. 그제야 마음이 번잡할 때마다 내가 산책을 나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빠른 세상에서 내게 휴식을 주는 게 ‘걷는 속도’로 바라본 풍경이었던 것이다. (…) 우리에겐 고유의 리듬이 있다. 분명한 건 속도를 늦춰야 비로소 보이는 ‘사각 지대’가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필요가 아닌 내 필요에 종종 보폭을 맞춰야 한다." (백영옥)
아니다/이정록
채찍 휘두르라고
말 엉덩이가 포동포동한 게 아니다.
번쩍 잡아채라고
토끼 귀가 쫑긋한 게 아니다.
아니다.
꿀밤 맞으려고
내 머리가 단단한 게 아니다.
오늘 아침은 '여유(餘裕)'에 대해 사유를 해 본다. 여유의 사전적 의미는 "물질적, 공간적, 시간적으로 넉넉하여 남음이 있는 상태" 또는 "느긋하고 차분하게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마음의 상태, 또는 대범하고 너그럽게 일을 처리하는 마음의 상태"이다. 반대말은 '결핍'. '모자람, 분주함', '초조함' 등이다. 여유는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지거나 시간이 많다고 해서 생기는 것은 아니다. 여유라는 개념은 자신의 의식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유의 반대말인 결핍은 현재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에 원인이 있다. 그리고 시간적, 정신적 여유를 가지려면 자신이 지금 무엇에 쫓기고 있는 지부터 알아차리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의 방식대로 잘 풀리지 않으면 마음이 조급해 진다.
노자는<<도덕경>>제 48장에서 "위학일익(爲學日益), 위도일손(爲道日損)"라는 말을 한다. '배움의 목표는 날마다 새로운 것을 채우는 것이다. 도의 목표는 날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라는 뜨이다. '도'에 힘쓰는 사람은 날마다 덜어낸다. 여기서 '도'가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라면, 나이 들면서 조금씩 버리고 덜어내는 것이 사람 답게 잘 사는 길이라는 말로 들린다. 그 '도'로 비우고 덜어내 텅 빈 고요함에 이르고 싶다. 그러면 물 흐르듯 일상이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뿐 포장하지 않으며, 순리에 따를 뿐 자기 주관이나 욕심을 고집하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 그의 모든 행위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항상 자유롭고 여유로울 것이다. 샘을 자꾸 비워야 맑고 깨끗한 물이 샘 솟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만약 비우지 않고, 가득 채우고 있으면 그 샘은 썩어간다. 그리고 초조해 하지 말고, 조급증을 덜어내고 싶다. 오히려 마음을 비우고, 자중하며 일상을 행복하게 향유하고 싶다. 하루 하루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삶의 속도를 줄이고, 내 일상을 좀 더 향유하고 싶다. 아침에 읽은 김기석 목사의 글이다. "분주함이 사회적 신분에 대한 표징으로 인식되는 세상에서 한가로움은 덕이 아니라 게으름으로 받아들여지기 일쑤이다. 가속의 시간에 적응하며 사는 이들은 아름다운 풍경이나 예술품 앞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아니, 오래 머물지 못한다. 시급히 처리해야 할 일에 몰두하는 동안 향유의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향유’(frui)와 ‘사용’(uti)을 구분한다. 사용이 대상을 자기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것이라면 향유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것이다. 향유는 가장 온전한 사랑함이다. 향유의 능력을 잃어버리는 순간 타자들과 허물없이 순수한 사귐은 불가능 해진다. 사용할 것을 많이 소유하는 것을 성공의 가늠자로 삼을 때 사람은 욕망의 종살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보는 행위도 여러 층위가 있다. 의지와 욕망이 개입되지 않았지만 눈에 그냥 보이는 현상이 있는가 하면, 보려는 의지가 개입된 지각 활동도 있다. 어떤 경우든 본다는 것은 눈을 통해 들어온 시각 정보를 과거의 경험과 기억과 관련시켜 취사선택하여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널리 알려진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안다’는 말도 같은 사실을 가리킨다. 시각 정보에 갇히지 않고 그 정보 너머의 세계를 보는 것을 일러 통찰이라 한다. 세상을 보는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 3 가지를 제안한다.
1. 거리를 산책하다 보면, 길 모퉁이 핀 꽃들을 만난다. 그것들은 자기의 꽃 시절을 한껏 만끽하고 있다. 자기 연민이나 비애 따위는 없었다. 뿌리 내릴 약간의 흙과 물기를 만나 생명의 진수를 드러내는 그 생명력이 경이롭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를 보면,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라고 했다. 오래 보고 자세히 본다는 것은 시간을 들이는 거다. 시간의 향기가 그 속에서 배어드는 거다. 그럴 때 무언 가에 대해 경탄할 수 있고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다. 이런 감탄을 촉발한 것은 ‘자세히 봄’이다. 할 일에 몰두하느라 빠르게 걷는 이들은 기적들 사이를 앞 못 보는 사람들처럼 스쳐 지나간다.
2. 빛이 없으면 볼 수도 없다. 내면의 빛이 어두워서 우리는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눈으로 세상과 자기 자신을 본다. 타인의 시선을 내면화하고 살 때 기쁨과 감사는 가뭇없이 스러진다. 그것은 일종의 속박 상태이기 때문이다. 금방 사라질 감정 말고, 평생 계속될 인생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일시적 감정보다 더 큰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잘 난 거랑 잘 사는 거랑 다르다. 못난 놈이라도 잘난 것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나 여기 살아 있다", "나 보고 다른 못난 놈들 힘내라", 이러는 게 진짜 잘 사는 거다. 잘 난 건 타고나야 되지만, 잘 사는 건 자신이 할 나름이다. '기분은 선택할 수 없어도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 (마티아스 뇔케, <<나를 소모하지 않는 현명한 태도에 관하여>>) 타인의 시선에 맞춰 나를 애써 나를 포장하면서 내 삶을 평가절하할 이유는 없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감정 소모하느라 내 가치를 잃어버리지 말자. 자기 중심을 잘 잡으면 인생은 훨씬 더 편안해질 수 있다.
3. 가끔 인생의 한계상황에 직면할 때가 있다. 죽음, 죄책감, 고통, 우연 등 우리가 도무지 제어할 수 없는 일에 사로잡힐 때, 사람은 누구나 깊은 당혹감을 느낀다. 그 당혹감은 우리 삶의 토대를 흔들지만 때로는 새로운 삶의 문턱이 되기도 한다. 그들이 고통을 통해 눈이 밝아진 이들이다. 그들은 타자의 눈에서 티끌을 빼겠다고 나서지 않고, 그들의 숨겨진 눈물을 본다. 눈이 맑고 밝은 이들은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자기와 다른 이들에게 거침없이 혐오감을 드러내고 모멸감을 안겨주는 이들은 자신이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딱한 일이다. 늘 하는 말이지만,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고통은 추락이 아니라, 재탄생의 순간이고 새로운 여행의 시작이다. 가톨릭에서는 이 고통을 펠릭스 쿨파, '행운의 추락'이라고 표현한다. 상처가 구원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고통을 겪고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신과 가장 가까워진다. 아플 때 에고의 껍질이 부서지기 때문이다. 상처 받은 자에게 사람들은 기도를 부탁한다. 다른 누구보다도 그 사람의 기도가 신에게 가 닿을 만큼 절실하고 강력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삶이 우리를 밖으로부터 안으로 불러들이는 방법이 상처이다. 우리의 삶이 상처보다 크기 때문이다. 모든 상처에는 목적이 있다. 어쩌면 우리가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우리를 치료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상처라고 생각하고 여긴 것은 진정한 나를 찾는 여정과 다르지 않을 때가 있다. 삶의 그물망 안에서 그 고통의 구간은 축복의 구간과 이어져 있을 수 있다. 축복이라는 영어 blessing은 프랑스어 blesser에서 왔다. 프랑스어 blesser는 '상처 입다'란 뜻이다. 어원이 같다. "축복을 셀 땐 상처를 빼고 세지 말아야 한다."(류시화) 멋진 문장이다.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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