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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허심(虛心)으로 가는 네 가지 방법

2738.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6월 2일)

지난 주에는 안면도에서 강의가 있었다. 갈 때는 쉬지 않고, 보령 대천을 거쳐 새로 생긴 해저 터널을 건너 수지 않고 갔지만, 강의를 마치고, 대전에 올 때는 해찰(海察)을 했다. 바다를 실컷 보고 왔다는 거다. 원래 '해찰'은 "쓸데 없는 다른 짓을 하다'는 말이다. 그 해찰이 아니라, 바다를 보는 '해찰'을 하면서, 많이 내려 놨다.

바다는 받아래요/정용원

낮에는 해님의 사랑을 받아요
별 밤에는 달님과의 속삭임도 받아요
바람의 심술도 받아요  구름의 눈물도 다 받아요
갈매기의 칭얼거림도 받아요
고기랑 해조랑 조개의 청도 받아요
밝음도 어둠도 다 받아요
그래서 바다는 받아래요

겸허(謙虛)하게 살기를 위해서는 허심(虛心)이 중요하다. 그게 '도'와 함께 하는 삶이다. 이를 "동어대통(同於大通)"이라 한다. 이는 자존심은 버리고 자존감을 키우는 거다. 자존감은 타인의 평가나 시선에 사관 없이 자기 스스로를 존중하는 감정이지만. 자존심은 남보다 내가 더 잘났다고 여기는 상대적 우월감이다. 자존감은 절대적 지평을 갖고 있지만 자존심은 그렇지 않다. 스티브 잡스는 "나를 나아가게 하는 유일한 힘이 나에 대한 믿음, 그리고 내가 한 일을 '사랑'하는 것"이라 했다. 겸손과 겸허는 다르다. 겸손(humility)은 남을 높여 자기를 낮추고 내세우지 않는 태도에 초점을 두고 있다. 겸손은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 겸허는 스스로를 낮추고 비우는 태도이다. 겸허(modesty)는 잘난 척 하지 않고 자기를 비우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의미가 있다. 겸손은 구체적 행동을 표현할 때, 겸허는 마음가짐을 얘기할 때 주로 쓰인다. 겸손한 자세와 겸허한 마음을 갖추면 된다. 그리고 겸손은 선한 마음이 없어도 충분히 가식적 표현이 가능하나, 겸허는 양심과 관련되어 있다.

일상이 복잡하고 얽혀 있다 할지라도, 지금-여기서  편안한 상태를 얻을 수 있는 ‘동어대통(同於大通, 위대한 도와 하나가 됨)’의 길과 ‘어떻게 사는 것이 온전해지는 삶의 길인가’ 질문을 해 본다. 장자는 북명의 ‘곤'이라는 물고기가 ‘붕'이라는 큰 새로 변신하여 남명을 향한 사유 여정에서 도달한 목적지가 ‘나 없음’(無己, I'm nobody)라는 것과 ‘나 없는 마음’(虛心, I'm nothing) 앞에 현현하는 세계가 곧 ‘제물(濟物)의 세계'라는 것이었다. 만물제동(萬物濟同, 만물은 도의 관점에서 보면 등가이다)인  ‘제물의 세계’는 긴 것은 긴 대로, 짧은 것은 짧은 대로 ‘있는 그대로의 평등한 세계’라는 것이다. 따질 것 없다.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말이다. 다만 나는 나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하고 피할 뿐이다. 다시 말하면, 나를 존중하지 않는 이를 곁에 두지 않겠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상대를 존중할 수 없다면 따로 관계를 돈독히 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나 허심은 늘 유지한다.
 
이런 만물제동, 즉 평등은 허심에서 비롯되며, 허심에 도달하기 위한 공부인 좌망(坐忘)과 심재(心齋)는 더하기 공부가 아닌 걷어내는 공부, 즉 해체 시키는 공부이다. 이 길은 다음과 같이 네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성심에서 사심으로 가지 않고, 허심으로 가는 네 가지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1. 장자의 "피시방생지설"을 따르는 거다. 

장자가 말하는 ‘피시방생지설’(彼是方生之說)'에서, 피차, 즉 주체와 객체라는 말은 기준으로 삼는 시각에 따라 좌우된다는 거다. 그런데 장자는 ‘피차’(彼此)라는 말 대신에 ‘피시’(彼是)라는 말을 사용했다. ‘시’(是)는 ‘이것’이라는 뜻과 함께 ‘옳다’는 의미도 있다. 즉 피시의 구분에는 이미 시비 판단의 계기가 전제 되어 있다. ‘나의 쪽’이 옳다는 판단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는 ‘자아’ 문제와 뿌리 깊게 연관되어 있으며, 우리 인식의 기본적인 틀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컨대 누구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거다. 그러나 이런 의식 자체는 비난 받을 일도 비난할 일도 아니다. 모두가 거의 그러니까. 따라서 ‘누구나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전제하면, 시비가 훨씬 더 줄고 평화로워질 가능성이 높다. 

흥미로운 것은 주변을 둘러 보면, 시비가 벌어지며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는 성심(成心)을 사심(師心)으로 삼는다. 사심은 성심의 스승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비를 없애려면 허심으로 상대해야 할 것이다. 장자는 ‘어리석은 자는 성심을 스승으로 삼는다. 성심이 없는데도 시비가 붙었다는 것은 오늘 월나라로 간 자가 어제 도착했다는 것과 같다. 이는 없는 것을 있다고 여긴 것이라  했다. 장자에 따르면 이것과 저것, 옳음과 그름만이 동시적인 사태로 생기하는 것이 아니다. 생과 사, 가와 불가처럼 짝을 짓는 것은 모두 그렇다는 것이다. 장자는 ‘바야흐로 생이 있으니 바야흐로 죽음이 있고, 바야흐로 죽음이 있으니 바야흐로 삶이 있다’고 했다. 

이를 정용선은 <<장자, 나를 해체하고 세상을 해체하다>>에서, 이를 위해,  ‘피차의 이분법적 의식'을 걷어내라'고 했다. ‘이것’과 ‘저것’을 나누는 ‘피차’(彼此)는 ‘나’를 세우는 성심(成心)으로부터 비롯되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나’를 주체로 세우고, 상대를 대상화 하는 한, ‘나’와 ‘너’를 나누어 양 방을 모두 실체 화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피차는 이쪽(차,此=이것)과 저쪽(피,彼=저것)인데, 이것과 저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각이나 입장에 따라 다르게 정해지면서 동시 적으로 발생하는 사태라는 알아차리는 것이 피차의 이분법적 의식을 걷어내는 일이다. 

2. 장자의 "화시비(和是非)"를 실행하고 따르는 거다.

장자는 시비를 중단하라 거나 소멸시키라고 하지 않고, 화(和)하라고 한다. 단(斷)도 멸(滅)도 아니고, 시비의 긍정도 부정도 아닌 화를 주장한다. '화 하라'는 것은 시비를 잠재워버리거나 잘라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기 앎'에 기초한 시비의 근거가 서로 허구적인 것임을 깨달아서 스스로 풀어지도록(해소되도록)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시비"는 시비 하지만 시비가 없는 것이고, 시비가 없으면서도 각자의 시비가 모두 인정되는 것, 즉 양행(兩行)이다. 이런 "화시비"를 위해서는 자아의 판단을 최소화하고, 자연의 조화에 맡겨 분별지를 쉬게 해야 하는데 이것이 자연의 균형에 맡기는 것, 이를 "휴천균(休天鈞)"이다. "천균"은 자연 상태에서 유지되는 균형 감각을 지닌 조화로운 마음이다. "휴천균(休天鈞)", 즉 '천균에 머문다는 것'은 '옳다 그르다는 지식의 작용을 그치고, 저절로 그러한 자연의 경지에서 마음을 쉬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시비는 사라지고 마음은 지극히 조화를 얻게 된다.  비슷한 말이 '양행'이다. 대립 되는 두 가지 입장을 모두 바라보고 두 입장을 모두 인정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말한다.  양쪽을 모두 수용하는 전체적 사고라 할 수 있다. 둘 다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마음이다.

‘시비를 화(和)하라' 우리가 ‘나’만 ‘자신이 옳다’는 의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다, 그렇다면 누가 옳은가, 아무도 옳지 않다. 그러면 누가 그른가, 아무도 그르지 않다는 것이다. 각기 각자의 방식으로 옳은 것이다. 장자는 이것을 ‘각자의 옳음에서 비롯하여 각기(各基)의 근거로 시비 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하는 인식의 기초인 ‘우리의 앎’은 과연 신뢰할 만한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각과 지성(분별지)은 부분성과 편파성으로 인해 사물의 전체를 한꺼번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볼 수 없고, 들리지 않는 것은 들을 수 없다. 그러나 볼 수 없거나 들을 수 없다고 존재하지 않거나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누군 가를 볼 때에 그 사람의 이마와 뒤통수를 동시에 볼 수 없고, 숲과 나무를 동시에 볼 수 없다. 우리의 감성과 지성은 태생적으로 편파적이고 부분적이다. 한계가 있다. 서 있는 건물을 보면서 동시에 무너지는 건물을 볼 수 없다. 양면을 모두 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서로 의지해 있고, 이웃해 있다. 밤과 낮은 연속되어 있으나 동시에 볼 수 없다. 이처럼 제한적인 지식에 근거하여 시비가 발생하는데, 장자는 이를 원숭이들의 '조삼모사'에 비유한다. 때문에 모든 시비와 갈등의 고조는 ‘자신만이 옳다’고 여기는 생각에서 발생한다.

3. "도추에 서서 조지어천(照之於天)하라!"를 것을 따르는 거다.

생사, 가와 불가, 시비는 모두 상대를 전제해야 성립할 수 있는 관계의 네트워크인데, 결국 상대하여 발생하는 것은 연관에 의하여 성립하는 것이고, 이 연관 역시 고정적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자는 피차와 시비의 이분법적 대립의 근거를 해체한 '도추(道樞)에 서서 조지어천하라'고 권한다. 

여기서 '도추'는 문을 여닫는 ‘지도리'이다. '지도리'는 열림과 닫힘에 모두 다 관계 하나 어느 하나 만을 옹호하지 않는다. 열림과 닫힘의 근원이면서도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나 모든 움직임을 그 안에 담고 있으면서 여닫히는 문의 움직임에 제한 없이 반응하나 열림이나 닫힘에 매이지 않는다. '도추'는 텅 비어 있으면서 모든 것에 응하는 허심의 은유이다. '도추'에 서면 시비를 가르는 기준점이 해소되기 때문에 개별 자의 무궁한 시비에 자유롭게 응할 수 있다. 시비에 대한 ‘자아’의 편중이 없기 때문에 상황에 따른 시비를 ‘탁부득이(託不得已)’라는 상황의 원리에 따라 판단할 수 있다. 즉 시비 하려는 마음이 없이 ‘시비의 근거가 없는 시비’를 "천균"에 따라 정할 수 있다. 이것과 저것도 동시적이고, 시비 역시 동시적으로 이 둘 모두를 상관적으로 포용하면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이것과 저것, 가와 불가, 생과 사를 함께 보아야 한다. 이것이 '도추'의 관점이고, '조지어천'이며, 밝게 비추는 허심이다.

4. "각득기의(各得基宜)를 말하면서 상정(相正)을 따지지 말고 자정(自正)을 하라!"는 것을 따르는 거다.

 "각득기의"라는 말은 <<장자>>의 핵심이다. 여기서 '각득기의는 각자 자신의 모습에 충실하며, 좋고 나쁨, 옳고 그름, 우열을 가릴 필요 없이 자신대로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장자의 기본 입장은 인간은 자연물이고 자연에 속해 있다고 본다. 자연은 다만 균형을 잡을 뿐, 시비 하지 않는다. 균형을 잡는 것을 "천예(天倪, 자연의 작용, 하늘의 맷돌(天硏), 하늘의 균형대(天鈞)"라고 한다. "천예"의 조화 속에 사는 각 존재 자들은 각각 자기 방식에 마땅한 길을 가고 있다. 각자 생존의 방식, 실존의 방식, 사고의 방식이 다 있다. 모든 인간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한다. 그런데 만약에 옳다고 생각한다고 안 할 때 조차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다고 생각한다.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는데 누가 누군 가를 바꾸려 한다는 것, 이게 상정(相正)이다. 상대를 똑바로 하겠다는 건데 그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게 때문에 제대로 된 존재자 간의 관계 성은 상정(相正)이 아니라 상존(相存), 서로를 존중하면서 스스로 올바르게 될 것, 이게 자정(自正)이다. 거기에 맡겨라. 이게 장자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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