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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그 집 앞 능소화/이현승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우리 동네 초등학교는 동네 한 가운데에 있다. 그리고 고도가 상대적으로 높다. 그러니 담벼락이 쓸데 없이 높을 수밖에 없다. 언제 심었는지 모르지만, 그 담벼락에 여름이 시작되려 하면, 능소화가 너무 많이 핀다.

난 능소화를 보면 슬픈 마음이 먼저 떠오른다. 궁궐에 소화라는 궁녀가 있었다. 그녀는 임금에게 눈에 띄어 하루 아침에 빈(嬪, 후궁)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자 다른 궁녀들의 시샘과 음모로 이어져 두번 다시 임금을 볼 수 없게 된다. 그녀는 기다림에 지쳐 병이 들어 죽은 후, 궁 담장에 묻어 달라는 유언대로 묻혔다. 그 자리에서 자란 덩굴이 능소화란다. 기다리다 지쳐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담을 뛰어 넘는다. 능소화의 '능(凌)'자는 ‘능가하다, 깔보다’라는 뜻이고, '소(宵)'자는 ‘하늘 소‘자이다. 그러니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덩굴의 기운 때문에 능소화라고 한다. 슬프다.

이 꽃은 과거 시험에 장원 급제하여 말을 타고 금의환양(錦衣換陽)할 때 머리에 쓰던 화관으로 장식했다고 해서 '어사화(御使花)'라고도 부른다. 봄꽃들 다 지고 뜨거운 여름에 당당히 피는 꽃이 능소화이다.조심할 것은 꽃에 반해 꽃을 따다 가지고 놀면,  꽃의 충이 들어가 실명(失明)을 할 수도 있단다.

그 집 앞 능소화/이현승

1.
이를테면 제 집 앞뜰에 능소화를 심은 사람의 마음이 그러했을 것이다. 여름날에, 우리는 후두둑 지는 소나기를 피해 어느 집 담장 아래서 다리쉼을 하고, 모든 적막을 뚫고 한바탕의 소요가 휩쓸고 갈 때, 어사화같은 능소화 꽃 휘어져 휘몰아쳐지고 있을 때,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그 집의 좋은 향기에 가만히 코를 맡기고 잠시 즐겁다. 능소화 꽃 휘어진 줄기 흔들리면, 나는 알고 있다. 방금 내가 꿈처럼, 혹 무엇처럼 잠시 다녀온 듯도 한 세상을.

2.
말 걸어 오지 않는 세상을 향한 말 걸기.
언뜻언뜻 바람을 틈타고 와
확, 뿜어져 나오는 향기란
아무것도 예비할 수 없었던 도난사고처럼
툭, 어깨 치며 떠난 자에게서 후발되는 것.
뒤숭숭한 꿈자리처럼
파편적으로만 나타나는 기억 속에서
징후로만 읽혀지는 것.
그러나, 감추어진 것을 향한 나의 짐작은 두렵다.
다 익었다는 것 속엔 무언가가 감추어져 있다.
열매도 없는 화초의 지독한 향기.
급소를 중심으로 썩어 가는 맹독성
혼기 지난 여인처럼
꽃은 향기 속에 늘 부패의 경고를 담는다.

모든 향기의 끝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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