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컨택트 사회는 단절이 아니라 연결될 타인을 좀 더 세심하게 가리겠다는 것이다.
코로나-19 이후 모든 기업들은 라이프 트렌드를 진지하게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그동안 기업들은 소비자, 기술 동향만 보았다. 이젠 산업, 소비, 인문, 라이프 스타일 전반을 엮어서 보아야 한다. 여기서 인문학의 중요성이 나오는 것이다. 앞선 기업들은 이미 지속가능성, 젠더 뉴트럴 등의 전략을 짰다. 데다가 앞으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중요하다. 어제부터 공유하고 있는 <날카로운 상상력 연구소>의 김용섭 소장은 " 이런 이슈들이 거짓말처럼 코앞에 닥쳐왔죠. 생색을 내자면, 저의 메시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기업들은 이미 준비를 마쳤어요. 잘하고 있습니다"고 말하였다.
김 소장은 인문학 뿐만 아니라, "‘미래를 알아야 한다’는 절박감과 함께 신문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면을 키워드로 연결해서 읽는 ‘통섭력'과 농업, 자동차, 미술 등 다양한 전문 잡지를 깊이 있게 읽어온 독해력은, 전 세계에 점점이 흩뿌려진 미래의 단서를 한데 모으는데 유효했다"고 계속 말하였다.
문제는 디지털 리터러시이다. 리터러시는 한국 말로 하면, 문해력이다. 전통적으로 이 말은 글자를 읽고 쓸 줄 아는 문자 해독 능력을 뜻했다. 그러나 오늘날 문해력이라 하면, 이를 넘어 ICT에 의한 초연결 정보화 시대가 요구하는 인간 역량의 핵심이 되었다. 문자, 카톡, 문서, 기사, 책 등의 텍스트 정보든, 음성, 음악 등의 소리 정보든, 그림, 사진 등의 이미지 정보든, 방송, 영화 등의 영상 정보든, 모든 정보를 읽어내는 능력을 말한다.
문제는 문해력이 부족한 사람은 더 질 좋은 정보에 접근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내가 아침마다 쓰는 글을 읽지 못하거나, 대충 읽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은 문해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문해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아니다. 나도 내가 모르는 분야는 뭔 말인지 잘 모른다. 그래 우리는 끊임 사고의 지평을 넓히려고 배워야 한다.
문해력이 떨어질수록 일자리를 잃고 실업자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뿐만 아니라 생활의 질의 격차도 이로부터 시작된다. 젊은 시절에 일정한 문해력을 갖추었다 해서 평생 유지되지 않는다. 단순한 텍스트를 읽는 수준은 어릴 때 학습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이에 따른 성숙에 알맞게 필요한 정보의 양과 질을 확장하는 일이나 시대 변화에 맞추어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일은 결코 학교 공부에서 끝나지 않는다. 꾸준한 학습을 통해 자기가 알고 실천하는 일들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문해력은 서서히 바닥까지 떨어진다.
예를들어, 70대 노인도 스마트폰 활용을 잘하면 언컨택트의 수혜를 입겠지만, 젊어도 적응 못하면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그래 한편으로 걱정도 된다. ‘안 보고 싶으면 안 본다'는 ‘언컨택트'의 간편 설정이 다음 세대의 상호작용 능력을 저하시키진 않을까? 대면은 친밀하고 소셜은 친밀하지 않은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이다. 처음부터 소셜로 만나 마음을 나눈 사람은 오프라인 친구보다 정서적으로 더 친밀하다. 옛날의 환경 의제로 지금 환경을 해석하면 안 된다. ‘언컨택트'는 오히려 상호 존중, 수평, 예의에 기반한 ‘만남'을 촉구한다. 상호작용에서 예의는 기본이고, 예의의 출발은 인권이다. 예의의 출발을 나이나 권력으로 두고 ‘공경'을 강제하는 분들이 오히려 상호작용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
사실 우리는 위험사회, 피로 사회에 이어 요즘엔 감정사회에 살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다양한 사람을 접해야 감정조절 능력이 키워진다는 생각하면, 언컨텍트 사회에서는 감정 조절 능력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 이 문제에 대해 김 소장은 이렇게 대답한다. "감정도 여러 가지죠. 풍부한 감정 표현도 있지만,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표현이 더 많아요. 명절 때 친척들이 자꾸 ‘결혼했냐, 취업했냐?' 물으면 피하잖아요. 반복적으로 감정을 상하게 하면, 그 만남은 줄여나가죠. 그래서 젊은이들이 친척, 선후배, 회사 모임 말고 취향 공동체를 찾는 것이다. 자기와 코드가 맞는 사람들과 예의 갖춰서 접점을 늘리려 한다."
언컨택트 사회는 단절이 아니라 연결될 타인을 좀 더 세심하게 가리겠다는 것이다. 나쁜 경험을 줄이고 좋은 경험을 더 쌓겠다는 거다. 중요한 건 만남의 선택권이다. 회식이 싫은 게 아니라 선택권이 없다는 걸 못 견디는 거다. 예전엔 선택권이 없었고 지금은 선택권을 요구하는 것은 전통적인 톱다운 방식의 문화를 버리고 자발적으로 재조립한 느슨한 공동체에서 수평 문화를 즐기겠다는 것이다. 그게 또 긱노동(Gig work, 스마트기기를 기반으로 한 공유경제, O2O-On line to Off line - 서비스 등 디지털 플랫폼을 중개로 한 단기노동), 비혼, 저출산 문화로 연결되는 것 같다. 공동체 안에서 안전을 확보 받던 인간이 ‘튼튼한 개인'으로 독립 선언을 한 셈이다. 위대한 개인으로 다시 태어난 거다. 집단의 구성원에게 요구되던 취업, 결혼, 출산이 다 선택권 안으로 들어온 거다.
세상에 제일 시시한 게 결론을 아는 소설을 읽는 거다. 그런데 기성세대는 몇 살에 결혼하고 집 사고, 애 낳고, 이런 정답을 청년들에게 강요했다. 그들이 멈추고 가만히 추적해 보니 "정해진 대로 살라"고 주장하던 사람들이 막상 행복해 보이지 않다 점이다. 여기서 모두 다 ‘내 길은 내가 갈 게'의 결단이 시작된 거다. 변화는 ‘할지 말지’가 아니다. 일단 시작된 변화는 기성세대도 긴 호흡으로 지켜봐야 한다. 사회 문화적인 변화를 긴 호흡으로 관찰하는 동안, 혹시 전염병이라는 변수를 감지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연구자들은 다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신호를 읽었다고 한다. 지난 100년간, 아니 20년간만 봐도 전염병이 더 자주 발생했었다. 광우병, 돼지 독감 등 가축 질병이 끊임없이 뉴스를 장식했었다. 사람도 가축도 좁은 공간에 밀집해 있으면 위험성이 증폭된다.
문제는 한군데 문제 생기면 다 폐쇄해야 한다는 점이다. 90년대부터 전 세계가 글로벌화되면서 공장 네트워크가 가동됐다. 생산 연결망만 촘촘해 진 게 아니다. 한 도시에서 어떤 스타일이 뜨면 순식간에 글로벌 트렌드로 유행이 퍼져 나갔다. 시간 차가 거의 없었다. 여행 인구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도시를 키우고 자연을 파괴하면서 인간과 야생 동물 사이의 거리가 확 좁혀졌다. 야생과의 거리 지키기를 무시한 건 인간이다. 인간이 야생의 영역에 쳐들어간 거다. 1900년만 해도 인간이 사는 땅은 14% 정도였는데, 지금은 거의 77% 정도라 한다. 인간은 야생을 개발해 단일 경작지로 사용하고, 숲을 밀어버리고 소를 키워 소고기를 생산한다. 전염병의 70% 이상이 인수공통전염인 걸 보면 그렇다. 코로나-19 이후에도 이런 바이러스는 계속 나올 것이다. 그러니까 비대면으로의 변화는 필연이다.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지 못해서 소외되는 ‘언컨택트 디바이디드’는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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