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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책 읽기는 '마법의 양탄자' 타는 일이다.

2497.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10월 6일)

집 안에 쌓이는 책의 양 때문에 더 이상 책을 사지 않기로 했는데, 가을이 오니 벌써 읽고 싶은 책이 많아졌다. 연휴 기간에는 택배 하시는 분들이 쉬라고, 연휴 마지막 날에 주문한 책이 어제 왔다. 다음 책들을 이 번 가을에 읽을 생각이다.
- 한병철의 <<사사의 위기>>
- 함돈균의 <<사물의 철학>>
- 이순국의 <<다시, 시작하는 인생수업>>
- 명욱의 <술기로운 세계사>>
- 레오 버스카글리아(이은선 역)의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 찰스 두히그(강주헌 역)의 <<습관의 힘>>: 왜 우리는 후회할 줄 알면서도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가?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 바스 카스트(정인회 역)의 <<선택의 조건>>: 적을수록, 버릴수록, 느릴수록 행복이 온다.
- 바스 카스트(유영미 역)의 <<내 몸에 이로운 식사를 하고 있습니까?>>" 군살, 노화, 성인병으로부터 멀어지는 영리한 식사법

독서의 계절 가을이다. 계절이 좋으니, 밖으로 나가고 싶지만, 또한 모기도 없고, 덥지도 춥지도 않으니 밤늦도록 책 읽기 좋은 때이다. 우리는 책을 너무 많이 안 읽는다. 최진석 교수는 "책 읽고 건너 가기"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책읽기는 '마법의 양탄자' 타는 일이라는 거다. '다음'을 향해 넘어가는 일이다"이라고 했다. 우리는 '다음'으로 넘어가는 일을 하게 하는 힘을  상상력 또는 창의력이라고 본다. 그런데 그 힘은 책을 읽는 데서 나온다고 본다. 우리 인간들에게 그 '다음'으로 넘어가게 해주는 힘이 가장 높은 지혜이다. 최진석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원래 머물지 않고, 건너가는 존재이다. 멈추면 부패하고, 건너가면 산다. 양심도 건너가기를 멈추면 딱딱하게 권력화 한다. 건너가기를 잃고 자기 확신에 빠진 양심은 이제 양심이 아니라 폭력이다. 건너가기를 포기한 지식은 시체이다. 도덕도 마찬가지이다. 건너가기를 하게 하는 힘은 책을 읽는 일로 가장 잘 길러진다."

"진짜 인간은 한 곳에 멈춰 머무르지 않고, 아무 소득도 없이 보이는데도 애써 어디론 가 떠나 건너간다. 건너갈 그 곳은 익숙한 문법으로는 아직 이해되지 않아서 무섭고 이상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무모한 도전과 모험이 등장한다. 대답하는 습관을 벗고, 질문하기 시작한다.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꾸고, 닿지 않는 별을 잡으려 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진짜 인간이다. 진짜 인간이 세상의 주인이다."(최진석)

최 교수는 "지적 인식을 위해 지금까지 개발 된 것으로 독서가 최고"라 말하기도 했다. 책이나 좋은 글을 읽는 것이다. 그는 "지식과 내공을 동시에 잘 닦을 수 있는 것이 독서"라고 강조했다. 문제는 펼친 책을 끝까지 읽는 일이나 산 책을 정말로 읽는 일은 다 인내를 요구한다는 점이기 때문 같다. 시간을 들여야 한다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을 요약하거나 마음에 닿는 글을 적으면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일을 그는 '인격적인 단련'이라 했다. 나는 그냥 '사는 훈련'이라 말하고 싶다. 그 훈련은 우선 시간을 들이고, 인내심을 가지고  지적인 수고를 하는 것이다.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나르( Pascal Quinard)는 독서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아직 경험하지 않고 이해되지 않은 어떤 곳으로 데려다 주는 마법을 부린다는 뜻에서, 독서를 "마법의 양탄자"에 비유했다. 

이 가을에 나는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내 길을 가고 싶다. 오늘 공유하는 시에서 처럼, 물고기에서 배우려 한다. 시인이 본 물고기처럼, 길이 없어도, 쉬지 않고 길을 내고, 낸 길은 또 미련을 두지 않고 지우면서 말이다.
 

물고기에게 배우다/맹문재

개울가에서 아픈 몸 데리고 있다가
무심히 보는 물속
살아온 울타리에 익숙한지
물고기들은 돌덩이에 부딪히는 불상사 한번 없이
제 길을 간다
멈춰 서서 구경도 하고
눈치 보지 않고 입 벌려 배를 채우기도 하고
유유히 간다
길은 어디에도 없는데
쉬지 않고 길을 내고
낸 길은 또 미련을 두지 않고 지운다
즐기면서 길을 내고 낸 길을 버리는 물고기들에게
나는 배운다
약한 자의 발자국을 믿는다면서
슬픈 그림자를 자꾸 눕히지 않는가
물고기들이 무수히 지나갔지만
발자국 하나 남지 않은 저 무한한 광장에
나는 들어선다


그리고 많은 독서로 얻어지는 고차원적인 언어의 질적 상승은 그 사람의 인품을 상승시킨다. 독서를 많이 한 사람과 잠시라도 대화를 나누어 보면 그 사람의 지혜와 품위 있는 말에 감탄한다. 독서를 많이 한 사람의 눈빛과 입가에 온화한 미소가 퍼진다. 독서를 많이 한 사람의 팔자 주름과 처진 볼 살은 자연스런 곡선을 이루어, 음악 미뉴엣(minuet)처럼 느껴진다. 독서를 많이 한 사람이 연설할 때는 강한 포르테처럼 청중을 고조시킨다.

생각의 수준이 말의 수준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자신감과 우아함은 지적 능력에서 나온다. 우아하다는 것은 빛의 방식(a manner of lights), 즉 어떤 일을 순조롭게 잘 처리하고 완벽하게 짜여 결합되도록 하는 탁월한 재능이다. 우아함은 특별한 날에 먼지를 털고 과시하는 일련의 행동일 뿐만 아니라, 일상의 행동 방식이기도 하다. 우아함은 사람에게 풍겨 나는 아우라이다. 그 아우라는 서있고 걷는 자세와 손끝의 위치, 눈빛, 말과 행동에서 서서히 우러나와 진한 매력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물들인다.

인간이 신체적 조건은 보잘 것 없더라도 다른 동물들에 비해 강점은 가진 것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던지기'이다. 인간과 신체구조가 유사한 침팬지의 공 던지는 속도가 시속 30Km 밖에 안 된다고 한다. 그 정도는 우리 초등학생 수준 정도란다. 메이저 리그 투구의 구속은 시속 160km를 오간다.

진화론을 처음 주장했던 찰스 다윈에 따르면, 인간은 직립 보행으로 손이 자유로워지면서 독특한 던지기 능력을 얻었다. 효과적 사냥이 가능해진 건 그 덕분이다. 인간의 던지기는 팔 뿐만 아니라 어깨까지 활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때 어깨를 감싼 인대와 힘줄이 새총의 고무줄처럼 탄성에너지를 응축했다 던지는 순간 풀어 놓는다. 뿐만 아니라, 동물들과 달리 인간들에게, 인체 내에 내장된, 최고의 기술이 '읽고, 쓰기'이다. 스마트폰 같은 기술처럼, 인간 몸에 내장된 기술도 많다. 예를 들어 각종 예체능 분야 고수들의 고난도 기량을 보면 알 수 있다. 개별적으로 특화된 기술 외에 인류 범용으로 확립된 기술이 바로 '읽고 쓰는' 능력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마음을 길들이고 보다 정교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은 5만년 전으로 본다. 언어의 발명은 인류 입장에서 기적 같은 일이다. 언어는 집단 내 의사소통과 집단 구성원 간 협동을 도왔다. 인간이 개념을 통해 자문자답할 수 있게 되고 그 결과, 학습, 창작 요구를 불태울 수 있게 된 데도 언어의 역할이 컸다.

뒤이어 언어를 담은 문자가 발명되면서 인류는 또 한 번 높이 도약했다. 흥미로운 것은 말의 시대에서 글의 시대로 넘어올 때 저항이 만만찮았다는 점이다. 요즈음은 문자와 글이 물과 공기처럼 익숙하지만, 그 천하의 소크라테스가 문자에 반대했다. 소크라테스는 문자의 발명은 "학습자의 정신을 나태하게 만들 것이다. 학습자는 더 이상 자신의 기억을 사용하지, 스스로 생각하려 하기보다 문자로 쓰인 외부 자료를 보다 신뢰할 것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후 장장 4000년간 인류는 글의 혜택 속에 살고 있다.

문명(文明)이란 말 그대로 '글로 밝아진다'는 것이다. 문화, 인문학 등 문(文)자가 들어가는 곳은 다 문자, 즉 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종교, 과학 등도 마찬가지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모든 위업은 이 문자, 즉 글 위에 쌓이고 전수됐다. 게다가 인쇄술의 발명은 여기에 터보 엔진 같은 역할을 했다. 프랑스 인지 심리학자 스타니슬라스 드앤(Stanislas Dehaene)은 "종이 위 점과 선이 눈을 거쳐 인간 의식에 심상으로 떠오르고 의미로 이해되는 과정은 경이 그 자체"라 말했다. 정말 그렇다.

실제로 인간은 한눈에 단어를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만 뇌는 글꼴에서 의미를 곧바로 얻지 않는다고 한다. 문자열을 부분으로  쪼개고, 그것들을 다시 문자, 음절, 형태소 등의 위계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거친다고 한다. 이 같은 분해와 재결합이 모두 자동으로, 무의식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모를 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읽기는 뇌신경에 길을 내고 닦은 결과물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독서는 새로운 능력을 학습, 지능을 어떻게 확대하는지 명확이 보여준다. 던지기가 사냥을 위한 고도의 신체 기술이었 듯이, 읽기는 뇌 속 소프트웨어의 성능을 향상시키는 신생 기술이다. 따라서 우리는 '부의 양극화'보다 두려운 것이 '지(知)의 양극화'이다. 많은 사람이 자동화로 인한 인간의 위기와 부의 양극화를 걱정한다. 그런데 실상 그 못지않게 우려해야 할 게 '지의 양극화'이다. 오늘날처럼 대중이 짧고 쉬우며 직관적인 이미지에만 반응하면, 자칫 사고마저 얕고 단순해질 수 있으며, 이를 방치하면 획일적 대중과 창의적인 소수 간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질 수 있다. 그러면서, 현대 사회는 서사를 잃었다.

그럴 경우, 가짜 뉴스와 선동을 앞세운 포퓰리즘의 위험도 커질 것이다. 대중은 말할 것도 없고 창의적인 소수도 안심할 수 없다. 그런 양상은 이미 지식 생산 영역을 중심으로 조금씩 표면화되고 있다. 예컨대, 과학 시대의 지식은 인프라와 인력을 갖춘 곳에서 격차를 벌려간다.

독서는 인간이 딛고 심연으로 돌진해 들어갈 수도, 하늘로 날아오를 수도 있는 도약대이다. 하지만 이 마법의 기술은 얕고 가벼운 공짜 오락물을 앞세운 또 다른 기술들의 파상 공격으로 주춤거리는 중이다. 어떤 신기술도, 그 기술이 만들 새 세상도 인간이 생각하는 능력을 잃는다면 사상누각일 수밖에 없다. 인류가 꿈꾸는 미래는 '그 너머'를 생각하는 능력에 좌우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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