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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섭리(攝理)

2495.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 10 4)

어제까지 추석 연휴라 차분하고 조용한 시간들을 보냈다. 그러면서 어제는 신형철의 , <<인생의 역사>> 나오는 <욥기> 일부분을 읽다가, 장자를 소환했다. 장자는 "이상적인 인간(聖人, 성인)이 도달한 세 가지 경지"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아직 사물이 생겨나기 전의 상태를 아는 사람:  이는 지극하고 완전한 경지로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 사람이. 모든 분별이 사라지고, 존재와 비존재의 구분마저 없어져 버리고, 말이나 어떤 수단으로 표현할 도리가 없는 궁극의 경지, 논리나 개념이나 관념이 들어갈 틈이 없는 절대 초월의 경지, 이른바 '없음(non-being)'의 경지 도달한 자이.
  • 사물이 생겨나긴 했으나 거기에 경계가 없던 상태를 아는 사람: 사물 자체는 존재하나 아직도 거기에 경계가 생기지 않은 경지, 분화하지 않아서 '하나'인 상태, 이른바 '있음 자체(, Being-self)'인 경지 도달한 자이다.
  • 사물에 구별은 있으나 아직 옳고 그름이 없던 상태를 아는 사람: 사물이 개체(個體)로 분화해서 각각 구분이 있으나 아직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는 경지 도달한 이다.

 

옛사람들은 그런 경지에서 살았는데, 오늘을 사는 우리는 원숭이들처럼 일방적이고 독선적인 아집에 사로잡혀, 밤낮 옳고 그름만 따져 ''가 허물어지고 애착이 생겨나 아옹다옹하고 있다. 우리는 사물의 실상을 꿰뚫어 보고 그 근원적인 상태로 거슬러 올라가 진정으로 자유스럽고 풍성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거다. 그러면 도대체 '절대 (絶對 )'의 상태에서 어떻게 사물이 생겨, 거기에 다시 구별이 생기고, 시비가 생기는 지경에 이르렀는가? 그것은 소문이 거문고를 타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했다. 소문이 거문고를 타는 것은 원초의 정적(靜寂)에 음률을 더하는 것이어서 본래의 하나됨이 허물어져 기호(記號)와 경계(境界)가 생기고 대립과 분별이 생겼다는 것이다. 거문고를 타지 않는다는 것은 다시 원초의 정적, 원초의 하나됨으로 회복되는 것이고 이룸이 허물어 짐이니 하는 따위의 경계나 분별이 있을 수 없는 경지라는 것이다.

 

이것은 노자의 <<도덕경>>에서 "다듬지 않은 통나무를 쪼개면 그릇이 됩니다(樸散則爲器, 박산측위기)"'는 생각과 궤를 같이 한다. 본래 비()분화된 ''가 분화될 때, 세상의 여러가지 구체적 사물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원초의 세계가 분화의 세계로 바뀔 때, 거기에 대립하고 얽히는 세계, '소외'의 세계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가르지 않는다(不割)"고 하고, "멈출 줄 안다(知止)"고 하였다. 멈출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이분법을 넘어선 하나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 세계는 대립하는 것들을 함께 껴안을 때 '갓난 아기'의 상태, 무극의 상태, 통나무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도덕경>> 28장과 제32)

 

다시 장자로 돌아 온다. 그는 원초적인 하나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 '사람을 현혹하는 현란한 빛'을 없애고, 이것저것을 분별하는 시비를 넘어 모든 것을 포용하는 '보편적인 것()'에 안주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를 "이우제용(而寓諸庸)"이라 표현했다. '모든 것을 자연의 섭리에 맡긴다. 그러기에 이것이냐 저것이냐 구별하려 하지 않고 '보편적인 것()에 머문다' 말이다. 여기서 '' '보편적인 것' '불변의 자연'을 말한다. '' '머무르다'는 거다. 그러니까 말은 '자기의 지혜를 내세우지 않고 모든 것을 자연의 섭리에 맡기라'는 거다.

 

어제도, 섭리라는 말을 생각하며, 맨발 걷기를 하였다.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고, 벌써 싸늘함이 느껴진다. 순응 해야지 어쩌겠는가? 춘하추동의 순환과 생로병사의 변화를 어떻게 거역한단 말인가? 운명에 거역하면 질질 끌려가지만 순응하면 업혀간다는 말도 있다. 기왕 갈 바에는 질질 끌려가는 것보다는 업혀서 가는 게 좋다. 순응과 받아들임이다. 그게 걷는 일이다. 그것도 맨발로.

 

 

내 일상의 종교/이재무

 

나이가 들면서 무서운 적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핸드폰에 기록된 여자들

전화번호를 지워버린 일이다

술이 과하면 전화하는 못된 버릇 때문에 얼마나 나는 나를

함부로 드러냈던가 하루에 두 시간 한강변 걷는 것을 생활의 지표로

삼은 것도 건강 때문만은 아니다 한 시대 내 인생의 나침반이었던

위대한 스승께서 사소하고 하찮은 외로움 때문에

자신이 아프게 걸어온 생을 스스로 부정한 것을 목도한 이후

나는 걷는 일에 더욱 열중하였다 외로움은 만인의 병 한가로우면

타락을 꿈꾸는 정신 발광하는 짐승을 몸 안에 가둬

순치시키기 위해 나는 오늘도 한강에 나가 걷는 일에 몰두한다

내 일상의 종교는 걷는 일이다

 

 

'섭리(攝理)'라는 말 프랑스어로는 '프로비덩스(providence)'이다. 사전에서는 '자연계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와 법칙'이라 정의하며, 세상과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하느님의 뜻으로도 쓰인다. 우리 인간들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데카르트(Descartes)의 말을 신봉해왔다. 자신이 생각과 발견한 이성으로 인생과 우주의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다고 착각했다. 우주, 자연, 그리고 인생을, 생각지도 못한 것들, 상상하지도 못해, 설명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섭리'라는 말이 어려운 것 같다. 자연의 이치(理致)를 귀담아 들어야 알아채는 것 같다. 인간의 이성과 논리만 가지고 하느님이 두시는 바둑의 포석을 알기 어렵다. 신의 섭리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 그래 인간들은 어떻게 해 서든지 신의 섭리를 슬쩍 커닝이라도 하려고 신탁과 점술을 필요로 한다. 아무리 미신이라고 두들겨 패도 점술이 없어지지 않고 존재하는 이유이다.

 

배철현 교수는 자신의 <묵상>에서 '섭리'를 성서에 나오는 '욥 이야기"로 설명한 적이 있다. 성서에 등장한 욥은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 권력, 그리고 명성을 쥔 ‘알파 인간’이었다. 심지어 그는 주위사람들을 챙겨주고 배려하는 겸손한 인간이었다. 그를 묘사하는 획기적인 문구가 있다. 그는 ‘타인에게 정직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3인칭의 눈으로 봐도 완벽한 인간’이었다. 신은 그런 욥을 사탄을 동원하여 시험하기로 결정했다. 동방최고의 부자였던 욥은 하루아침에 자연재해로 재산을 잃어버린다. 그 뿐만 아니라 10명의 자식도 사고로 죽는다. 심지어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온몸은 악성 종기로 덮여 그 가려움을 달래기 위해 기왓장으로 몸을 긁는 불쌍한 인간으로 전락한다. 그러자 욥은 나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고,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느냐고 절규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을 위로하는 척하면서, 하는 말은 다음과 같이 크게 가지였다.

  • 하느님은 없는 자를 처벌하지 않는다. 그러니 너에게도 죄가 있음에 틀림없다.
  • 비록 죄인이라도 하느님께 복종하면 용서받는다. 그러니 불경스러운 저항을 중단하라.

 

그러면서, 그의 삶에 대한 태도와 신앙을 나무랐다. 그들은 욥이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런 어려움을 자초했다는 거다. 신은 인간이 잘하면 복을 주고, 잘못하는 벌을 주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 신은 인간의 꼭두각시일 뿐이다. 그들과 욥은 옥신각신하여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고 노력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이 때 신이 등장한다. 삶은 우여곡절이다. 삶을 가치가 있게 만들기 위한 유일한 조치가 잔인하지만,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혹독한 시련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갑작스런 죽음이나, 혹은 자신이 몹쓸 병에 걸린 경우, 우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내가 그 시련을 대하는 태도다. 우리가 자신이 처한 어려움을 회피하거나 남을 탓하지 않는다면, 신은 우리에게 말을 건다. 신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를 ‘깊이’ 응시하고 그런 시련의 이유를 찾으려는 사람에게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침묵의 소리’로 말을 건다. 즉 질문을 한다. 신은 질문하는 주체이지 대답하는 주체가 아니다.  신은 우리에게 ' 있는 것과' ' 있는 ' 대해 집요하게 묻고 묻는다.

 

인간에게 위안이 있다면, 그것은 질문(質問)이다. 질문에 답이 없을 수도 있다. 해답을 찾아가는 더 깊은 질문이 남을 뿐이다. 질문은 자신을 삶을 더 높고 넓고 깊은 경지에서 바라보라는 명령이다. 이 질문을 자신의 마음속에 깊이 품은 사람은, 이미 그 질문이 해답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문제는 질문을 경청하기 위해서는 머리에 달린 두 귀가 아니라 마음의 귀를 정성스럽게 기울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인생이란 질문의 이치를 조금 파악할 수 있다.

 

침묵하던 욥의 처음이자 마지막 말이 이렇다. "주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42 5-6) 그는 그저 신이 나타나주기 만을 기다렸고, 그리 되었으니 됐다는 듯이 행동한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 때문에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불행의 이유를 없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다. 그러나 아이가 어처구니 없는 확률(우연) 결과로 죽었다는 사실이 초래하는 숨막히는 허무를 감당하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일에 내가 이해할 없는 어떤 거대한 섭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편이 살아 있는 자를 겨우 숨쉬게 있다. 신은 그때 비로소 탄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섭리(攝理)가 그런 것이 아닐까?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