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3.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10월 2일)

어제는 추석 연휴 3일차를 충만하게 보냈다. 우선 정상적으로 미사 참여를 했다. 어제의 말씀은 에제키엘 예언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법을 따라 공정과 정의의 길, 즉 공의의 길을 걸으라고 촉구한다. 특히 죄인에게도 회개(메타노이아, 생각을 바꾸는 회심)를 통하여 이러한 길이 열려 있으나,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이는 오히려 유혹에 걸려 넘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공의는 예수님이 따르신 하느님의 길을 우리도 따르는 거다. 노자 식으로 말하면, 도(우주의 존재방식)를 따르라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윤정구 교수는 더 명확하게 말해주었다. "특히 유전자 복권 당첨자(유전자 은행이 운영하는 복권에 당첨된 자, 인생을 편하게 사는 운이 억세게 좋은 사람)의 책무가 있다. 그건 정의(正義, justice)의 세상을 넘어 공의(公義, righteousness)의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하는 일이다."
그리고 두 번째 말씀에서는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2장 3-4)라고 했다. 그게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마음이었다. 그리고 복음은 "생각을 바꾸라"라는 말이 나온다. 살면서, 그 방향성이 주님의 길보다는 나 자신에게 사로잡혀 살다가 어느 순간 하느님의 길로 돌아가는(건너가는 파스카) 것이 생각을 바꾸는 메타노이아, 회개이다. 이를 방해하는 것은 자신의 완고한 아집 때문이다. 그것을 비우고(장자 식으로 말하면 오상아 또는 심재), 자신의 유연하게 하여야 회개가 가능하다. 그러려면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겸손(謙遜)은 자신을 낮추고 타인을 존중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자신보다 뛰어난 자들이 있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를 말한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한 부류는 '훈련중'인 인간이며, 다른 부류는 '훈련을 하지 않는 인간'이다. 훈련중인 인간은 자신이 되고 싶은 더 나은 자신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매일매일 조금씩 전진한다. 그들은 도달해야 할 인간상을 가지고 있기에 항상 겸손하다. 훈련은 원대한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버려야 할 자신의 나쁜 습관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인생이라는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마라톤을 훈련 없이 참가하는 것은 마라톤을 완주할 의지가 없거나, 자신이 완주할 수 있다는 허황된 꿈을 꾸는 사람일 뿐이다. 훈련이란 생각을 행동으로 인도하고 말을 사건으로 실현시키는 과정이다. 인간은 훈련을 통해 독립적이고 존재론적인 인간에서 연관적이고 상대적인 인간으로 변한다. 인간은 훈련을 통해 자신이 지니고 있는 동물적인 본능을 승화시켜 신적인 속성을 발현시킨다.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정의(justice)의 세상을 넘어 공의(righteousness)의 세상이다. 롤즈(Rawls)의 정의론은 일단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난 지의 문제는 더 이상 따지지 말고 태어난 사람들이 가장 정의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해가며 사회 정의 이론을 기초했다. 그 기초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이다.
• 기회의 평등,
• 과정과 절차의 투명성,
• 결과의 정의로운 사용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를 상징하는 것이 ‘반칙과 특권이 없는 나라’와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운 나라’였다. 하나의 레토릭(rhetoric)이었다. 왜냐하면 롤즈(Rawls)의 정의론이 다음과 같은 폐단이 있기 때문이다.
• 유전자 복권 당첨자(좋은 머리와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이 기회의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복권에서 배제된 사람들과 같은 선상에서 출발하는 혜택을 누린다.
• 과정과 절차의 투명성으로 다시 한번 당첨자들이 이길 수밖에 없는 경기를 응원하고,
• 이렇게 해서 얻은 우월한 결과를 개인들에게 귀속 시켜준다.
주목해야 할 것이, 이 이론은 당첨자의 행운을 이중 삼중으로 세탁해서 불평등을 정당화해주는 역기능을 더욱 심화시킨다. 처음의 의도와는 다르게 불공정의 세탁소로 전락했다. 불공정한 양극화가 정당화 된다. 예컨대,
▪ 롤즈의 무지의 커튼을 빌미로 유전자 복권 장본인들은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운이 좋아서 복권에 당첨된 사실을 감추고 모든 결과를 자신이 스스로 땀 흘려 일군 것으로 주장한다.
▪ 억세게 운이 좋은 것도 자신이 남들과 달리 특별하기 때문에 그런 기회를 얻었다고 포장한다.
▪ 이 모든 것을 자신이 다 일군 것처럼 스스로도 믿게 되면 마치 세상을 다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은 권능감을 가지게 되고 어느 순간 더불어 커져 가는 거만과 탐욕을 스스로도 통제하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거만과 탐욕이 거인처럼 커지게 되면 결국은 탐욕으로 이카루스의 날개를 달고 추락하게 되는 운명에 처한다는 거다. 모든 복권 당첨자들이 불운하듯이 이점이 바로 유전자 복권 속에 숨겨진 불운의 그림자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전자 복권 당첨자, '금 수저'가 나는 '마냥' 부럽지 않다. 아이들에게 돈만 물려주는 '금 수저'는 다음과 같이 4 가지를 갖지 못하게 된다.
• 영혼이 성숙될 기회를 갖지 못한다. 영적인 성숙은 피, 땀, 눈물이라는 3가지 액체를 많이 흘리지 않고는 어렵다. 그들의 인격은 빈곤해 진다. 돈이 좀 부족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런 상태가 되어야 자아를 덜어낼 수 있다. 그 순간 겸손해지고,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으면 정말로 감사의 마음이 솟구친다. 이 비움과 감사를 훈련하는 게 바로 영성이다.
• 부모로부터 통제를 많이 받으면 세상을 보는 관점의 독립을 갖지 못한다. 세상과 사람을 보는 나 만의 독립적인 관점을 가질 수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게다가 이들은 스스로를 증명할 수 없다는 약점도 갖는다. 인생을 실패해 봐야만 완전한 제로 베이스에서 인생 출발을 다시 할 수 있다. 그래야 철저하게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는 안목을 획득하게 된다. 주입된 관점에서는 창조를 못한다.
• 다른 이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한다. 사람들을 못 믿는다. 물질적, 신분적 풍요는 가식(假飾) 속에서 생활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산을 물려받은 2, 3세는 다른 사람을 의심하는 의심 병도 많다. 가식을 많이 경험해봤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살면서 무척 경계심이 많다. 그래 사람들을 잘 믿지 않는다. 그래서 좋은 출발 조건과 행복한 삶과는 관계가 크지 않다. 그 큰 유산을 가졌다면 걱정이 없을 것인데, 그렇지 않다. 그들은 상처 받기 쉬운 내면을 갖고 있다. 그리고 돈을 뜯길까 봐, 의심이 그의 머리에 먹구름처럼 떠다닌다.
• 일을 하지 않아, 무균 실 안의 '금 수저'들은 다른 사람들과 격리되어 현실 세계와 단절된 채 살아가야 한다. 사실 노동과 일자리는 인생을 설계할 때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우리는 일을 통해 자신이 사회에 공헌하고 있다는 느낌과 배움을 얻고, 도전에 맞서 성장하며,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고, 자립하는 동시에 공동체에 속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쓸모 있고 생산적인 존재라고 느껴야 성숙해진다. 그래 우리는 일이 있어야 한다. 일이 있다면, 돈에만 집중하지 않고 삶에서 의미 있는 일에 공헌할 수 있다. 그리고 일은 가족으로부터 조금이 나마 독립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 사회의 '금 수저'를 흔히 '기득권'이라 말하지만, 이 말은, 전우용 교수에 의하면, '친일파'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다음 그림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들, 즉 좋은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은 특히 학벌을 산출하는 제도 교육을 통해 이 불운의 당사자가 될 개연성이 높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학교에서는 스스로 공부를 해야 좋은 성적을 낼 수 있고 학벌을 얻어야 좋은 직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노력이 가미 되는 것을 과도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머리가 좋으면 똑 같은 시간을 공부해도 더 좋은 성과를 내고 칭찬을 받을 운명이다. 자신의 노력이 반드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일단 성과를 내면 이 모든 것을 자신이 일구어 낸 것처럼 주장해도 큰 문제가 안 생긴다. 공부를 잘하면 칭찬만 받으며 살기 때문에 이카루스의 기고만장의 날개를 달고 태양에 도전할 개연성이 높다.
그러니 좋은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은, 윤정구 교수의 주장처럼,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공의, 공정과 정의의 관점이 필요하다. 그걸 우리는 프랑스어로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 한다. 그 의미는 "귀족은 의무를 갖는다"이다. 보통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즉,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사회 지도층에게 사회에 대한 책임이나 국민의 의무를 모범적으로 실천하는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단어이다. 하지만 이 말은 사회 지도층들이 국민의 의무를 실천하지 않는 문제를 비판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자신이 얼마나 행운의 사람인지를 스스로 인정하고 감사와 고마움의 삶을 복원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을 콕 집어서 이런 엄청난 유전자 복권을 당첨되게 만든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질문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눈으로 본 세상은 소수의 당첨자들과 대다수의 비당첨자로 나눠진다. 비당첨자들은 자신이 복권에서 배제된 것도 모르고 자신의 운명으로 맨 땅에 헤딩해가며 온 몸에 피를 흘리고 산다. 복권당첨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불운과 고통에 긍휼감을 가지고 아파하는 사람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제다. 자신들이 얻어낸 당첨금의 일부를 비당첨자들도 주인으로 살 수 있도록 더 높은 곳에 평평한 세상 즉 공의의 운동장을 만들기 위해 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유전자 복권 뿐 아니라 이 유전자 복권을 담고 있는 그릇인 몸은 신이 우리에게 임차해준 것이라는 관점이 맞다. 수많은 정자의 경쟁을 누르고 동물이 아닌 인간으로 태어나 세상을 구경하는 행운을 누린 것만 해도 기적이다. 물론 선천적으로 불운하게 태어난 소수의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최소한 살아갈 수 있는 건강한 몸을 가지고 태어났다.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문제는 세상을 하직할 때 신으로부터 평생 무료로 빌려 쓴 유전자 복권과 몸에 대한 최소한의 이자와 임차료를 지불하고 세상을 떠나는 지의 이슈다. 이자는 고사하고 임대료조차도 내지 않고 가족만 배타적 소유권을 누릴 수 있는 재산만 남기고 조용히 떠나는 사람은 노블에스스 오블리제가 아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특별한 재능을 얻고 태어난 사람들을 넘어서 건강하게 한 평생을 자신을 귀족처럼 소중하게 모셔가며 산 우리 모두가 갚아야 할 빚과 이자에 대한 책무다. 신에게 세상에 갚아야 할 이 빚과 이자를 가족에게 남기고 떠나는 사람들은 죽는 순간까지 유전자 복권의 수혜자임을 부정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신의 피조물임을 인정하지 않는 동물 세상의 이기적 유전자에 의해 장악된 유사 인간이다.
건강한 몸을 가지고 태어난 평범한 사람도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의무를 이행해 자신이 세상을 다녀 감에 의해 세상이 더 따뜻해지고 더 건강해지고 더 행복해지는 "공의(公義)의 운동장"에 기여하는 책무가 있다. 떠나기 전에 빚과 이자를 청산하는 행위는 태어난 것자체가 노블레스 오블리제였던 우리 모두의 사회적 책무다. 유전자 복권당첨기가 돌아가는 장면에 검정 천막으로 가리고 만들어낸 롤스의 정의론이 가진 한계를 넘어 무지의 커튼을 걷어내고 유전자 복권 은행이 돌아가는 현실을 인정해야 화려한 수사에 불과한 정의(justice)를 넘어 현실 속에서 공의(righteousness)가 실현된다.
그렇게 되면, "지금과 같이 패거리로 나눠 싸우고 험담하고 질시하고 어렵게 만들어낸 공의의 운동장에 싱크홀을 파서 블랙홀로 무너지게 하는 파렴치한 파당정치 행위의 상당 부분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라고 윤정구 교수는 결론을 냈다. 그리고 그는 "아픈 사람들에 대한 긍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갈라치기 정치가들은 자신이 최고의 유전자 복권의 수혜자였음에도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이 이행해야 할 삶의 목적과 책무를 방기한 사람들"이라고 하며,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유전자 복권 당첨을 감춰가며 이들과 어울려 더 많이 갖기 위해 나눠서 치고 박고 싸워야 할 시간이 없다"고 했다.
이젠 유전자 복권 은행이 돌아가는 현실을 인정하고, "화려한 수사에 불과한 정의(justice)를 넘어 현실 속에서 공의(righteousness)가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 지금까지 주장한 공의(公義)라는 단어는 공평(公平)과 정의(正義)를 하나로 줄인 말이다. 인간사회에 불공평하고 부정한 일들이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약자에게는 희생을 강요하면서 정작 자신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기득권과 '갑'의 놀부 심보가 암처럼 퍼져 가고 있다. 가진 자, 힘 있는 자, 윗사람이 우선 자기 것을 희생하는 문화가 없거나 부족하다.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문화가 아쉽다. 자신이 기득권이 된 것은 다 혼자만의 힘이 아니다. 많은 약자의 희생으로 기득권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힘 있을 때, 약자를 위해 자기를 희생할 기회가 살면서 쉽게 그리고 많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기회 있을 때마다 약자에 대한 긍휼을 실천해야 한다. 그건 강자에게 당당히 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정의로운 사회, '을'과 약자에게는 내 것 일부를 양보해 함께 풍요로워지는 '너그러운 사회', 진영으로 나뉘어 싸우지 않는 사회가 될 것이다.
이 긴 글을 갈무리하고 나니, 나부터 부끄럽다. 그런 감정 속에서 김수영 시인의 시 하나가 소환되었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등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이것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나 하나 꽃 피어/조동화 (0) | 2023.10.03 |
|---|---|
| 10월/오세영 (0) | 2023.10.03 |
| 가을/나호열 (0) | 2023.10.02 |
| 세수/이선영 (2) | 2023.10.02 |
| 가을날/라이너 마리아 릴케 (0) | 2023.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