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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벌써 오늘이 9월의 마지막 날이다.

2491.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9월 30일)

배 철현 교수는 인생을 '멋진 춤이 아니라 레슬링'이라고 보았다. 인생은 잘 짜인 안무라기보다 사각 링에서 펼치는 레슬링 경기라는 것이다. "링 안에는 나와 호흡을 맞추려는 파트너가 아니라, 나를 호시탐탐 링 바닥에 넘어뜨리고 목을 조르려는 경쟁자가 있다. 레슬러에게 고통과 예상치 못한 습격은 일상이다. 레슬러에게 링 위는 적 뿐만 아니라 자신의 한계, 감정 그리고 훈련의 성과가 여실히 드러나는 공간이다. 인생에서는 우아한 몸짓이나 감동적인 목소리보다 더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삶이란 링 위에서 나를 엄습하는 공격과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한 평상시 고강도 훈련이다."(배철현) 그래 나는 이번 연휴 기간을 체력과 영혼의 근육을 기르는 고강도 훈련 기간으로 삼고 있다. 연휴이지만, 쉬지 않고 나의 습관으로 고정된 아침 글쓰기와 맨발 걷기는 멈추지 않고 있다. 이젠 쌓인 <인문 일지>를 책으로 만들 생각에, 모두 인쇄하여 다시 읽으며 비문을 찾고, 오 탈자를 수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인문 정신이 더 고양되는 중이다. 그리고 어제도 저녁 식사 후에 추석 보름달 아래에서 딸과 맨발 걷기를 했다. 오늘 공유하는 아침 사진이 그 거다. 

추석이지만, 내 어린 시절의 추석과는 다르다. 가족이 해체되어 만남도 형식적이다. 아침에 차례를 지내고 산소에 갔다가 바로 헤어졌다. 나는 딸과 친구 밤 과수원에 가 떨어진 밤을 엄청 주워 왔다. 김사인 시인이 말하는 추석 같지는 않았다. 


추석은/김사빈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고향집 뒷마당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보름달이다. 

달밤에 달구 잡기 하다 넘어져 
무릎이 깨어져 울던 일곱 살이다 

한참 잊고 살다 생활에 지쳐 
고향 생각나면 달려가던 
뒷동산에 만나던 첫사랑이다. 

큰어머니가 해주던 찹쌀 강정과 
송화 가루로 만든 다석이다 

울담 안에서 오가던 정을 
건네 주던 푸성귀 같은 
내 사랑 여인아 

책갈피 속에 곱게 간직한 
진달래 꽃잎 같은 내 친구야 

괴롭고 힘들 때 
영혼의 안식처 
내 쉼터인 것을 


원래 추석의 유래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3대 임금인 유리 이사금이 도성 안 부녀자를 두 팀으로 나눠 한 달간 길쌈 만들기 경쟁을 하게 한 뒤 진 쪽이 한턱을 쏘게 한 축제에서 비롯된 게 추석이라고 한다. 이후 조선시대에도 조상의 묘를 찾아 인사 드리던 풍속이 잘 기록돼 있다. 지금은 미국의 추수감사절처럼 수확한 곡물을 조상께 바치며 감사드리는 날로 인식하지만, 원래 추석은 아직 곡식을 수확하기 직전이어서 무사히 풍년이 들도록 조상님이 마지막까지 도와주십사 기원하는 의미가 더 컸다고 한다. 실제로 이 무렵이면 북태평양 고기압이 약해지면서 태풍이 한반도에 몰아쳐 한 해 농사를 망치는 경우가 허다했으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들이 잊혀지고 있다. 추석의 대표음식인 송편도 사라지고 있다. 송편의 원래 이름은 '오려 송편'이었다 한다. '오려'란 제철보다 일찍 여무는 올벼를 뜻한다. 송편이란 이름은 떡 사이에 솔잎을 깔고 찐다는 의미로 소나무 송(松)과 떡 병(餠)을 붙여 부르던 데서 나왔다. 송편이 반달인 이유는 점점 기울어지는 보름달보다 앞으로 가득 차오를 반달을 중시한 우리 조상들의 우주관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 추석에는 달도 둥글고, 과일도 둥글고, 마음도 둥글어진다. 

벌써 오늘이 9월의 마지막 날이다. 세월이 빠르다. 이렇게 빠르게 흐르는 세월을 두고, 우리는 "백구과극(白駒過隙)"이라 한다. 장자가 한 말이다. 장자는 우리의 삶을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사람이 사는 시간이라는 것은 마치 흰 망아지가 벽의 갈라진 틈새를 내달리며 지나치는 순간 정도다. 홀연할 따름이다!"(<<장자>> 외편 <지북유>)고 했다. 이를 간단히 우리는 "백구과극"이라  한다. 우리의 삶이 "마치 흰 망아지가 벽의 틈새를 지나치는 순간"이라는 백구과극이 실감나는 아침이다. 

내일부턴 10월이다. 본격적으로 가을이 시작될 것이다. 나는 이 때쯤 되면 늘 다짐하는 것이 있다. 나무의 지혜 말이다. 이제  나무들은 겨울 준비를 할 것이다. 단풍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나무들은 나뭇잎을 떨굴 것이다. 나무의 겨울나기는 먹을 것을 극한까지 비축해 견디는 동물의 그것과 정반대로 이루어진다. 즉 축적은 나무의 생존 방식이 아닌 것이다. 나무는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비우고 버리는 것으로 혹독한 겨울 준비를 마친다. 비우고 덜어내는 건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10월이 시작되면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으로 자신을 온건히 지키는 나무의 지혜를 살펴 보리라. 

"버려야 할 것이/무엇인가 아는 순간부터/나무가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제 삶의 이유였던 것/제 몸의 전부였던 것/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방하착/제가 키워온/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가장 황홀한 빛깔로/우리도 물이 드는 날"(도종환, <단풍 드는 날>)들이고 싶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자꾸 발목을 잡는다. 어렵게 얻은 민주주의가 자꾸 퇴행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간신히 정상에 올려놓았건만, 자꾸 굴러 떨어지고 있다. 군대를 정치에서 몰아내니 검찰이 왔다. 국정농단으로 국민이 마음을 하나로 모아 시스템을 바꾸고자 했던 일이 불과 몇 년 전 일이다. 그러나 국가의 시스템은 오히려 더 나빠져만 간다. 과거 실패한 이명박 정권의 장관들은 더 늙고 노회 해져 귀환했다. 더 많은 의혹과 더 왜곡된 역사관을 지닌 다른 공직 후보들과 함께. (…) 우리 사회에는 끝없는 노동을 되풀이하다 기계에 끼여 숨지고 끝없는 민원과 폭언 끝에 자살하는 이들이 줄을 잇는다."(이화여대 이주희 사회학과 교수) 

현재 벌어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수많은 퇴행들을 보면, 이 교수는 시지프(시시포스)가 떠오른다고 했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민주주의를 간신히 정상에 올려놓았건만, 자꾸 굴러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지프에게 가혹한 형벌을 가하는 신들의 바위는 현재의 우리를 가두고 제약하는, 식민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사회구조에 대한 은유일 수 있다."(이주희)

그러나 해병대 채아무개 상병 순직 사건을 끝까지 놓지 않고 지키려 한 해병대 수사단장은 그런 희생을 통해 우리가 밀어 올려야 하는 바위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켰다. 헌정사상 처음이라는 검사 탄핵 역시 그러리라 기대한다. 야당이 집권당과 야합해 국회를 무력화시키지 않는다면, 법원이 행정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원칙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려준다면, 우리가 민주주의를 다시 복원하는 작업이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 교수가 찾은 대안은 알베르 까뮈의 <<시지프의 신화>>이다. 알베르 카뮈는 삶이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자살도 의식의 소멸을 통해 부조리를 무너뜨릴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끝까지 살아남아 그 척박한 땅의 괴상한 식생을 면밀하게 관찰 하기”를 권하였다는 거다. 카뮈에게 희망은 자살과 똑같은 삶의 회피일 뿐이다. 그러니 절망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막연한 희망도 금물이다. “내세에 대한 희망, 또는 삶에 초월적 의미를 부여했다가 그것을 배반해버리는 어떤 위대한 ‘이념’을 위해 사는 사람들의 속임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알베르 까뮈는 자살과 희망 대신 카뮈는 부조리를 명철하게 바라보며 고집스럽게 버티는 ‘저항’을 권하였다.

일그러진 얼굴과 흙투성이 두 손으로 바위를 밀어 올리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고통을 향해 다시 내려가는 시지프는 자신의 비참한 조건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그가 겪는 고통의 근원인 이 통찰력은 운명을 그의 것으로 만들고, 그에게 완전한 승리를 가져다 준다. 인간이 자기 삶을 향해 되돌아가는 바로 그 미묘한 순간, 그는 운명보다 우위에 있다. 정상을 향한 투쟁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다.” 카뮈는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했다. 이러한 상상을 보고, 우리도 저항의 끝에 승리하리라 믿는다.

알베르 까뮈는 <<시지프의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스를 반항하는 인간의 표본으로 소개하였던 것이다. 그는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는 고통을 향하여 다시 걸어 내려오는' 그의 모습에서 저항과 반항을 보라고 했다. 알베르 까뮈에 의하면, 이 시지프스의 행위가 '무의미에게 의미 주기'란 것이다. 이것은 무의미한 삶에 스스로 '저항'이라는 의미를 줌으로써 그 형벌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 비록 끝없는 좌절의 연속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이상을 향하여 지속적으로 성실하게 노력하는 데서 그 가치와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삶의 가치는 완벽한 성취가 아니라, 성취를 향한 노력, 성실한 자세, 좌절을 극복하고 밝은 미래를 내다보는 희망의 태도라는 것이다.
 
알베르 까뮈는 우리에게 '사막에서 버티기'를 제안하였다. 우리들이 겪는 삶의 고단함과 무의미함을 극복하는 방법을 '버티기'라고 했다. '버틴다는 것'은 그곳을 벗어나지 않고 꿋꿋이 견딘다는 것을 뜻한다. 언뜻 툭툭 털고 다시 내려와 다시 바위를 올리는 시지프스의 모습을 실존주의로 해석하는 까뮈에게 나는 대학시절에 열광했었다. 까뮈는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철학적 태도는 저항과 반항이다"면서 실존주의 철학을 대변했었다. 그는 삶의 부조리성, 무의미성에 대해 정면으로 대항하는 인물로 시지프스를 꼽았다. 알베르 까뮈는 자신의 모든 노력이 무의미함을 알면서도, 그 어떤 희망도 없는 것을 알면서도 포기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언제나 다시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향해 다시 돌아서는 시지프스의 모습에서 부조리에 정면으로 '저항하고 반항하는 인간'의 당당한 자세를 보았다. 나는 그것을 '엉덩이의 힘으로 버티기'라 명명한다. 연휴 기간에 몸과 마음을 회복하여 더 버틸 생각이다. 어제 추석 대보름달 보고 다짐했다.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기로. "이 책은 사막의 한 가운데에서도 삶을 영위하고 창조하는 선명한 초대장이 되면 좋겠습니다."(<<시지프의 신화>>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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