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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동사적 삶

1652.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2021년 6월 8일)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부라는 것은 직업을 찾거나, 직업을 유지하는 일에 필요한 전문 지식과 관련되지만, 이런 내용들로 이루어진 공부를 하는 목적은 바로 그런 지식들을 기반으로 하여 삶과 세계의 방향을 결정하고 이끌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하려는 것이다. 지배적인 시선과 활동력을 갖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말로도 바꿔도 된다. 즉 자유인이 되려는 것이다. 노예가 되지 않으려는 것이다. 공부는 명사를 익히는 것이 아니라, 동사를 배워 실천하는 것이다. 따라서 삶은 동사이어야 한다. 삶이 명사이면, 관념 속에 살며, 실재가 아닌 이미지에 속는다. 

그러나  '동사'만 아니라, 동사를 실현하도록 도와주는 '조동사'가 필요하다. 배철현 교수의 칼럼에서 읽었다.  "조동사란 동사가 원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안내자다. 예를 들어 '나는 이 시련을 극복한다'에서 '극복 한다'는 동사이지만 '극복 할 수 있다'와 '극복해야 한다'와 문장에서는 동사와 조동사가 합쳐졌다. 조동사는 그 동사가 실제로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과 당위성을 부여한다."

당위성 이야기를 좀 해 본다. 당위성은 "마땅히 그렇게 하거나 되어야 할 성질"이다. '마땅함'이란 무엇인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행동이나 대상 따위가 일정한 조건에 어울리게 알맞다"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하거나 되는 것이 이치로 보아 옳다"이다. <장자> 제5편 "덕충부"에서 장자는 형벌로 발이 잘린 왕태를 빌려 다가, 용심(用心, 마음 씀)의 길을 다음과 같이 알려 주었다. 

• 생사(生死, 삶과 죽음)에 초연하라. 나는 '생사초연(生死超然)'으로 기억할 생각이다. 살고 죽는 일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는 말이다. 
• 천지개벽 같은 상황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꿈쩍하지 않는 의연하고 의젓한 사람이 되라. 나는 '태연자약'으로 기억할 생각이다. 
• 거짓이 없는 경지를 꿰뚫어 보고(審乎無假 심호무가), 사물의 변화에 결코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리라. 무가(無假)는 '거짓이 없는 것'으로  완벽한 경지, 궁극 실체의 경지를 뜻한다. 즉 가짜에 현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심(審)자에 방점을 찍는다. 숙고하라는 말로 이해한다. 그러면 '불여물천(不與物遷)'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 변화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즉 '명물지화(命物之化)'하고, "이수기종야(而守其宗也)"하라. 사물의 변화를 천명에 맡긴 채, 도의 근본을 지키는 것이다. 같이 책을 읽는 우경은 도의 근본을 "불리지당지극(不離至當之極)"이라 알려 부었다. 마음 씀은 '지극히 마땅한 것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배철현 교수는 "인생이란 우리가 될 수 있고 그래서 되어야만 하는 그것을 성취하려는 마라톤 경주다"라면서, "인생이란 마라톤을 완주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선정한 분명한 목표지점이 있어야 하며, 그 지점을 위해 매일 매일 자신이 행하고 있는 방향을 점검하고, 오늘이란 시간에 마쳐야 할 구간을 정해야 한다. 자신의 개성을 발휘할 수 있는 목표지점을 발견하지 않는 사람은 무식하며, 어렴풋이 발견하였지만, 최선을 경주하지 않는 사람은 나태(게으름)하고, 남들이 좋다는 경로에 안주하는 사람은 비겁하다"고 했다.

'지극히 마땅한 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면, 무식하지 말하야 하고, 게으르지 않고 지적으로 부지런해야 하고, 비겁하지 말아야 한다.
• 무식(無識): 불교에서는 무지(無知) 또는 무명(無明)이라 하며, 크게 경계하는 것이다. 불교는 "문/사/수"를 강조한다. 이 말은 늘 책을 읽거나 많이 듣고(聞, 들을 문), 그에 대해 깊은 의미를 헤아려 보는 사유(思, 생각 사)를 하고, 그것이 진리에 합당하다는 확신이 들면 실천(修, 닦을 수)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지혜'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를 '깨달음'이라고도 한다. 잠에서 깨어남이다. 실제 잠보다도 잠자는 상태의 나를 깨운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지혜가 우리를 괴롭히는 '탐/진/치(탐욕, 진에, 우치)', 다르게 말하면 '무지(무식)'와 '아집(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진리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그 진리는 나와 너가 구별이 되지 않는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자비(사랑)'를 행할 수 있게 해준다. 불교의 핵심은 '깨달음'과 '실천', 다시 말하면 '지혜'와 '자비'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무식(無識)하다는 사람은 글을 몰라 무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돌보는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에게 최선이 무엇인지 고민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배운 사람, 학력이 높은 사람일수록 무식한 경우가 많다. 자신이 감히 알고 있는 내용이 진리라고 착각하고 타인에게 우기기 때문이다. 반대인 유식(有識)은 즉흥적이며 포용적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 자신이 앞으로 알고 깨달을 지식에 비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겸손(謙遜)하다.

동네 초등학교 담벼락에 잘린 나무가 살아났다. 오늘 ,인문일기>는 책을 한 권 쓴 듯하다. 

나무 한 권의 낭독/고영민

바람은 침을 발라 나무의 낱장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다
언제쯤 나도 저러한 속독을 배울 수 있을까
한 나무의 배경으로 흔들리는 서녘이
한 권의 감동으로 오래도록 붉다
얼마나 읽고 또 읽었으면
저렇게 너덜너덜 떨어져나갈까
이 발밑의 낱장은 도대체 몇 페이지였던가
바람은 한 권의 책을 이제
눈 감고도 외울 지경이다
또 章들이 우수수, 뜯겨져나간다
숨진 자의 영혼이
자신의 몸을 물끄러미 바라보듯
바람은 제 속으로 떨어지는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손바닥으로 받아 들고
들여다보고 있다
낱장은 손때 묻은 바람 속을 날다가
끝내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밟힌다
철심같이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인적 드문 언덕에 구부정히 서서
제본된 푸른 페이지를 모두 버리고
언 바람의 입으로 나무 한 권을
겨우내 천천히 낭독할 것이다 


내가 살고 세상은 내가 스스로 변혁할 때, 비로소 변하기 시작한다. 세상의 변혁은 외부의 권위가 만들어 주지 않는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무식한 것이다. 자기 변혁은 자기가 누군인지 알려는 수고의 부산물이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올바른 말과 행동이 나올 수 없고, 자기 변혁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마음의 움직임에 대한 면밀한 관찰에서 시작한다. 나는 내가 오늘 마주치는 정보들과 사람들을,내가 경험하여 획득한 나의 시선이라는 색안경으로 볼 수밖에 없지만, 편견을 가진 내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고 인식하는 것이 자유로운 인생의 시작이라고 나는 믿는다. 신념과 이념처럼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인식을 왜곡하는 일이 없다고 믿는다. 자기 인식을 통해 얻은 자유는 나에게 자연을 편견 없이 탐색할 수 있는 여유를 선물한다. 자유로워야 조급해 하지 않고, 초조해 하지 않고, 여유를 갖게 된다.

 배철현 교수는 우리의 온전한 행복을 방해하는 무식, 나태, 그리고 비겁을 물리칠 도구가 '조동사'라고 했다. 나는 인간으로 태어나, 내가 될 수 있는 그 인간이 '될 수' 있고, 그래서 그 인간이 '되어야만 한다'. 이 문장에서 '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되어야만한다'는 당위성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이다. 깨우친 인간은 그 가능성과 당위성을 가지고 지금-여기에서 언행을 통해 차근차근 정진한다. 이 순간의 실천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율곡 이이는 '구원(성인聖人이 됨)'을 산의 등산과 비유하였다. "산을 만나는 세 가지 층위가 있다. 산이 있다더라는 소문을 들은 사람, 산을 제 눈으로 올려 다 본 사람, 그리고 직접 산을 밟고 올라가 땀을 훔치며, 눈에 가득한 전망을 누리는 사람이 그것이다." 1단계가 독서이고, 2단계가 이해, 3단계가 체화(體化)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문(問)/사(思)/수(修)'라 했다. 

심리학자 구스타브 융은, 인간이 심리적으로 온전한 상태로 도달하는 과정을 '개별화'라고 불렀다. 개별화는 온전한 나에 이른 주체적이고,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이 된 것이다. 개별화는 다음과 같은 어려운 질문들을 자신에게 던지는 용기다. 
1) 나는 내 삶의 고유한 임무를 완수하고 있는가? 
2) 내 삶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3) 나는 그런 삶을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내 단점을 발견하고 제거하고 있는가? 
4) 나는 나의 잠재력을 일깨우기 위해 장점을 작동시키고 있는가?"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이 매일매일의 일상을 통해 써 내려가는 소설의 주인공이어야 한다.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자유롭게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지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주제를 얼마나 충실하게 전개했느냐 이다. 나는 내 삶의 동사를 작동시킬 조동사를 가지고 있는가? 

여기서 가능성이 나온다. 해야만 하는 당위적인 일을 하면, 우리는 그 일 잘 할 수 있게 된다. 그래 늘 배우고 해야만 하는 일을 늘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일상의 삶 속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익힘'을 반복하면 '나만의' 새로운 양식을 만들 수 있다. 그리스인들은 그것을  두고 '자유(自由)'라고 불렀다. 그러니 배우고 익힘의 목적은 결국 '자유'를 위해서이다. 사실 자유는 그냥 주워 지지 않는다. 내가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때, 그로부터 나는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 가짜는 있어도 '공짜'는 없다. 그러니 공짜로 무언가를 얻으려 할 때,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배워 법칙을 알고 그것을 자유자재로 활용해서 나만의 스타일로 만들면, 그 때 나는 자유롭고 온전하다.

'온전'이란 우리 각자가 지닌 잠재력이 모두 실현되고 우리의 의식 뿐만 아니라 무의식까지도 동원되어, 자신만의 개성을 구축하기 위해 조화롭게 작동되는 상태다. 순간을 사는 인간은 그 목표지점에 근접할 수 있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다. 배철현 교수는 "인간에게 구원이란 근접"이라면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준다.

"구약성서에서는 그 숭고한 상태를 모세를 통해 "출애굽기"에서 다음과 같이 알려주었다. '나는 나다.' 흔히 이문장은 한글 성서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로 오역되었다. 이 문장을 풀어 해석한다면 '나는 내가 되어야 할 그 존재가 되고 있다' 정도일 것이다. 인도경전 <우파니샤드>는 '나는 무한이다라고 말한다. 유한한 나는, 우주의 끝에 아직도 팽창하고 있는 그 지점까지 포함하는 존재로, 나는 부분이면서 전체다.

인간이 조동사를 통해 자신의 마음속 깊이 내재한 온전한 자신과 조우할 때, 그 사람만의 '개성'이 등장한다. 이 개성은 그 사람을 다른 사람과 분명하게 구분 시키는,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한 고유함이다. 인문운동가는 '고유함'과 '우월함'을 혼동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말이다. 다른 사람보다  더 우월하게 보이고 싶어 하는 욕구는 거꾸로 자신이 열등하다고 느낄수록 강하게 나타난다. 그냥 서로 차이로 보면, 그냥 수평한 것이다. 비교하지 마라, 나는 나다. 나의 고유함을 지켜라. 

나만이 완수할 수 있는 고유한 임무를 인도인들은 '다르마'라고 한다. 그게 중국으로 와서 '법(法)'으로 번역 되었다. 법이란, 강물의 물처럼,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과감히 버리며 당연하게 그리고 도도하게 나아가는 삶의 규범을 말한다.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유일한 동물인 인간이, 자신의 다르마를 발견하고 발휘한다면 행복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자신이 될 수 있고, 그래서 되어야만 하는 그것이 된다. 개별화를 통한 자기-자신으로 하루를 산다면 자신의 달란트를 통해 유유자적한 삶을 영위하고, 행복한 삶을 방해하는 절망, 걱정, 우울, 그리고 중독과 같은 병들을 예방할 수 있다. 이 개별화를 작동시키기 위한 첫 단계가 있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파악하는 일이다. 소크라테스의 말이 그리스 델피 신전 입구에 '너 자신을 알라!'로 새겨져 있다. 이 문구는 다음과 같은 뜻일 것이다. 내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자기 자신을, 사실 가장 잘 모른다. 자신에 대한 편견이 가장 심하기 마련이다. 내가 진정으로 나를 알기 위해서는, 그런 자신을 생경한 3인칭으로 두고, 그것을 가만히 살펴보아야 한다. 자신을 1인칭이 아니라 3인칭으로 두고 바라보는 행위가 묵상, 명상 혹은 기도다.

나를 객관적인 3인칭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나의 장단점을 관찰할 수 있다. 나는 그런 단점을 지니는 나를 수용하고 용서하여, 그런 단점이 나의 잠재력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지 않도록 제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직 작동되지 않는 장점을 격려하여, 나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교두보로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