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9월 16일)

어제는 2 주 만에 노자 함께 읽기를 했다. 우당과 둘이서 제66장, 제67장 그리고 제68장을 읽었다. 어제 얻은 지혜를 공유한다.
▪ 제66장은 한 마디로 "선하((善下)"라 붙일 수 있었다. 상대 방 밑에 자신을 둘 줄 아는 거다. "부쟁의 지혜"이다. 나는 이 보다는 "앞서고자 하면 반드시 그 몸을 뒤에 두어야 한다"는 '겸양지덕'과 단순히 "부쟁(不爭, 싸우지 않음)"을 넘어서는 다양한 리더의 철학으로 읽었다. "부쟁"은 성공한 자의 신의 한 수라는 거다. "선하"는 과정이고 그 결과가 부쟁으로 성공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강(江)과 바다(海)가 깊고 넒은 물이 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낮추고 아래로(下) 흘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골짜기(百谷)의 물이 그 곳으로 모여드는 것이다. 제61장에서는 강대국과 약소국의 국제관계에 있어서 겸양지덕의 중요성을 말했는데 이 장에서는 국내정치에서 지도자가 갖춰야 할 겸양지덕에 대해 말하고 있다. 논조와 수사적 표현 양식은 같다. 골짜기에서 발현된 물은 최종적으로 강과 바다로 수렴된다. 그러므로 강과 바다는 가장 낮은 곳에 처하는 겸양지덕의 은유적 표현으로 사용됐다.
▪ -제67장은 제목을 노자의 "3복"이라 할 수 있다. <<성서>>에서는 '믿음(信), 소망(望), 사랑(愛)'을 인간이 가져야 할 세 가지 보물이라 했고, 불교에서는 '불법승(佛法僧)'을 불교도의 세 가지 귀의처로 '삼보(三寶)'라 했다. 유교의 세 가지 보물은 '지인용(智仁勇)'이다. 이건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갖고 태어난 하늘이 준 소중한 선물로 평생 실천하고 닦아야 할 덕목이라는 거다. 노자도 세 가지 보물을 말했다. 사랑(慈), 검소(儉), 겸손(後)이 그것이다. 겸손은 "不敢爲天下先(불감위천하선)"이라 표현 했다. 흥미로운 것은 "자"는 "용(勇)"으로 연결되고, "검"은 "광(廣)"으로 연결되고, "후(後), "불감위천하선"은 "능성기장(能成器長, 모든 그릇의 으뜸으로 자연스럽게 추대될 수 있다)"으로 연결된다. 그냥 "기장(器長, 큰 그릇)"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양면성을 전관(全觀)하는 도가적 성인의 지혜를 말한 것이다.
▪ 제68장은노자가 말하는 "고수(高手) 이론'에 따르면, 백 번 싸워서 백 번 이긴다 한들, 내 병사가 많이 죽고, 상대방의 감점에 상처를 내고 이겼다면 그 승리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노자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고도의 전략을 나열하여 부쟁(不爭)의 탁월함을 강조하였다. 노자는 이런 싸우지 않고 이기는 위대한 능력을 "부쟁지덕(不爭之德)"이라고 정의하였다. 이 것이 하늘의 도와 가장 부합(配天)하는 방법이며, 옛날 태평 시대에 사용했던 정치 방법(極)이었다는 거다.
- 불무(不武): 최고의 전사는 무용(武勇)을 과시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허술하고 나약해 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투가 벌어지면 단칼에 상대방을 제압한다. 겉으로 강하다고 으스대는 사람 치고 잘 싸우는 고수는 없다. 장자의 "목계(木鷄)"가 생각난다.
- 불노(不怒): 잘 싸우는 군대는 분노(忿怒)하지 않는다. 분노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함부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서 무모한 공격을 하거나, 상대방의 전략에 말려들면 결국 패배의 결과밖에 없다.
- 불여(不與)또는 부쟁(不爭): 싸움을 잘 이기는 사람은 직접적인 싸움을 하지 않는다. 전략을 잘 세워 쉽게 승리를 얻어낸다. 직접적인 충돌은 결국 후유증이 남는다.
- 위하(爲下): 사람을 잘 부리는 사람은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인다. 상대방을 존중하여 나를 위해 전력을 다하게 한다. 진정 용인(用人)의 고수이다.
오늘 아침은 노자 <<도덕경>> 제71장을 읽는다. 이 장의 제목은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하는 것이 병'이라는 거다. 쉽게 말하면, '모르면 모른다고 하라'는 거다. 그러니까 "지부자상(知不知上)"이 키워드이다. '알지만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라는 거다. 이 장은 <<도덕경>>중에서 가장 짤막한 장 중 하나다. 총 28자로 구성되어 있는 짧은 장이지만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뜻은 280자 아니 2800자 이상이다. 간단하게 이 장의 메시지는 '모르면 모른다고 하라'는 거다. 더 나아가서는 '알지만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공자의 <<논어>>의 <위정편>에도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진짜 아는 것(知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이라 말이 나온다. 공자의 제자인 자로가 모르는 일에 대하여 아는 척하는 것을 보고, 제자를 깨우치기 위해 공자가 한 말이라 한다. 노자는 내가 모르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에서 더 나아가 알면서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란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고대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神殿) 현관 기둥에 새겨져 있는 ‘너 자신을 알라’는 문구도 의미가 일맥상통한다. "지부지상(知不知上)"을 이렇게 해석하면 뒤에 나오는 구절들은 쉽게 정리된다.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가장 훌륭하므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참된 지식이라 할 수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알지도 못하면서 안다고 하는 것은 무지한 상태를 넘어 병적인 상태라고 진단할 수 있다. 그래서 "부지지병(不知知病)"이라 했다.
<<도덕경>> 제71장의 원문과 번역을 우선 읽는다.
知不知上(지부지상) 不知知病(부지지병):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가장 훌륭하다.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하는 것은 병이다
夫唯病病(부유병병) 是以不病(시이불병): 대저 병을 여길 줄 알면, 병이 되지 않는다. 이경숙은 이런 병은 워낙 흔하기 때문에 병인 줄 모르고 해석했다.
聖人不病(성인불병) 以其病病(이기병병) 是以不病(시이불병): 성인은 병이 없다. 병을 병으로 알기 때문에 병이 없는 것이다. 성인은 모르는 것을 아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병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장은 사람에 따라 해석도 구구 각색이다. 여기서는 가장 많은 논자들이 취하는 해석에 따라 지부지상(知不知上)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가장 훌륭하다'고 해석했다. 그것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봤기 때문이다. 노자에 따르면, 자신이 어떤 사물이나 진리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최상의 지식이고, 쉽게 말해,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에서 나아가 알면서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란 수준에 도달한다는 것이라고 보았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과연 진짜 아는 것인지 회의(懷疑)를 통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확실하거나 변하지 않는 절대적 진리는 없다고 하는 앎의 단계로 나아가 한다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는 영원하지 않으며,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 옳고 틀림, 높고 낮음, 선과 악, 아름답고 추함에 대한 앎은 모두 상대적이어서 확실하게 안다고 할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다는 고집을 버리고, 타인의 앎을 존중하고, 타인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것이 진정 제대로 앓을 실천하는 성인의 모습이다. 안규백 시인은 말한다. "보이는 것이 진실이 아니다/보는 것이 진실이다".
근기(根氣)라는 말이 소환되었다. 근기는 '근본이 되는 힘'이라는 말이다. 이 근기가 두텁지 못한 사람, 중근기 사람들은 심고 가꾸는 일을 열심히 하지 않고, 수확에만 마음이 가 있는 사람이다. 끝내 그런 이들은 결과 따위에는 연연해 하지 않는다고 하며, 도량이 넓은 척할 뿐이다. 우리는 근대 이후 '중근기의 병자'를 대량 생산하는 체제 속에서 살아 왔다. 교육의 확대와 지식산업의 발달, 특히 디지털 정보 기술의 극대화로 하근기에 멈춘 인구가 대폭 줄어든 대신, 중근기 고개를 넘어 상근기로 진급하는 공부는 공식적인 교육과정이나 교육 이념에서 아예 자취를 감춘 형국이다. 이게 문제이다. 그래 나는 인문 운동가로 매일 <인문 일기>써서 가급적 많은 사람들과 공유한다. 중근기 고개를 넘어 상근기로 건너가는 공부를 하자는 거다. 자기 몸과 마음을 닦아 인간 세상을 평안하게 하는 공부, 스스로 부처가 되어 중생을 건지는 공부, 또는 하느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공부는 진지하게 하면 할수록 손해 보게 되어 있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공부하며 늘 배워야 한다. 그렇게 자신의 진정성을 되찾아야 한다.
사실 '근기(根機)'라는 말은 불교 용어이다. '근기'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역량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끈기’라는 말도 바로 이 '근기'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이 '근기'에는 '상근기(上根機)', '중근기(中根氣)' 그리고 '하근기(下根機)'가 있다. '상근기'가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사람을 가리킨다면, '하근기'는 성불하기에 자질이 충분하지 않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하근기'라도 수행을 통해 '중근기', '상근기'로 올라갈 수 있는데, 가장 위태로운 것이 오히려 '중근기'의 고비이다. 이 단계에서는 아주 몽매한 상태를 벗어나 분별력이 늘고 더러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도 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자기 기준으로 매사를 재단함으로써 '상근기'로 못 가고 심지어 '하근기'보다 못한 지경에 떨어지기 일쑤이다.
주변에서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언행을 일삼으며 혼자 똑똑한 척하는 '중근기' 사람들을 우리는 일종의 '병자'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주변에서 어렵지 않다. 그리고 자신을 동조하는 사람들 중에서 그런 부류를 인지하기는 쉽지 않다. 무엇보다 스스로 '중근기' 고개에 걸려 있다는 생각을 '중근기'일수록 더 하지 못한다. 이들은 관련된 서적을 잠깐동안 관심을 갖는 척하는 사람일 뿐이다.
자신의 앎이 불확실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앎을 확신하는 것보다 큰 병이 없다. 자기가 보고 들었던 것만 진리의 논거이며,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은 모두 부정하는 것은 사람들이 앓고 있는 앎의 병이다. '부지(不知)의 병'은 폭력을 낳기도 하고, 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졸교적 앎, 신념의 앎, 이념과 정치적 앎에 집착하면 결국 적과 동지, 선과 악으로 세상을 구분하여 싸움의 진영을 만들어 낸다. ㅅ상에 내가 확실하게 아는 것은 없다고 하는 앎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세상을 제대로 보는 안목을 갖게 될 것이다.
앎은 확신의 체계가 아니라, 불확실성의 가능성을 무한히 개방하는 것이다. 앎은 앎의 한계를 스스로 자각할 때만이 앎으로써 위대한 생명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장자>> <대종사>에서 장자는 인간이 건설하는 지식의 체계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을 한 바 있다. "앎이 아는 바를 가지고, 암이 알지 못하는 바를 키워 나가는 것, 그러하면서 천수를 다 누리고 도중에 일찍 죽지 않는 것, 그것이야 말로 앎의 최상품이다." 결국 아는 것을 가지고 모르는 것을 키워 나가는 것이 인간의 삶의 과정인 것이다. 끊임없이 다가오는 더 많은 모름의 세계에 대해 인간은 겸손해야 하고 끊임없이 자기를 비워야 한다. "허기심(虛其心)"이 없으면 앎은 확장되지 않는다. 앎이 확장되지 않으면 도의 전체를 볼 수가 없다.
어제는 가을 비가 내렸다. 이 비는 계절이 가을로 가는 길을 더 재촉할 거다. 비는 그 철을 돕거나 재촉하는 촉매제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봄비에 만물이 잘 보이고, 여름비에 튼실한 열매 열리고, 가을비에 나뭇잎 보내고, 잎 떨어진 벌거벗은 나무에 겨울비 내릴 거다. 이 비와 함께 가을을 기다리며, ""가을이 오면", 나무처럼 더 가벼워 지리라.
가을이 오면/홍수희
나무야
너처럼 가벼워지면
나무야
너처럼 헐벗겨지면
덕지덕지 자라난
슬픔의 비늘
쓰디쓰게
온통 떨구고 나면
이 세상
넓은 캔버스 위에
단풍 빛으로 붉게
물감을 개어
내 님 얼굴 고스란히
그려보겠네
나무야
너 처럼만 투명해지면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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