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8월 22일)

'연주를 잘 하려는 것'과 '연주를 하는 것'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홀로 연주할 때의 평상심을 공연장에서 유지하려는 노력 자체가 평상심을 해치게 된다는 것이다. '잘‘ 연주하려는 노력은 역효과를 가져오고, 오히려 곡에만 몰입하여 연주를 하는 것이 더 좋은 효과를 낳을 것이다. 일체의 인위적인 노력 없이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바로 평상심에 따르는 행동이다. ‘잘’ 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하는 것이다. 이것이 평상심에 머무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냥'이라는 말이 지금은 잘 통하지 않는다. 홍혜은 작가는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김연아 선수의 이 말이 유명해진 것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여자 싱글 부문 최고점을 경신하고 금메달을 딴 후였다. 열악한 환경에서의 극기 훈련, 그걸 ‘그냥 했다’는 말에 모두 감동받았다. 반면 나는 ‘그냥 하는’ 사람의 정반대에 있다. 매번 생각을 하고, 그냥 하라고 하면 열 받아 한다" 고 말했다. 그러면서, 홍혜은은 다음 말을 이어갔다. "최근 한 웹툰 작가가 학부모로서 특수교사를 고소한 사건을 둘러싼 여론은 작가의 아이, 다른 급우들, 교사 각각의 권리를 대립적으로 이해하는 지형 위에 있다. 교사가 말과 행동으로 아이에게 피해를, 아이는 문제 행동으로 교실의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를 줬고, 이것이 각각 권리 침해라는 것이다. 교사에겐 교권, ‘교사의 권리’가 없는 게 문제라고도 한다. 그런데 교권이 학생들을 ‘그냥’ 움직이게 하는 힘이라면, 이것은 권리가 아니라 권력이다."
그러니까 내가 자발적으로 '그냥 한다'는 말과 누가 누구 보고 '그냥 하라'고 하면, 그때 시키는 사람이 권력이 된다. 그런데 권위를 가지고 시키면 피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은 교사나 어른의 권위를 잃었다.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아도, 다른 곳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게 사교육이 낳은 한국 사회의 슬픔이다. 학원에 가면 다 되기 때문이고, 학원이 너무 많다. 반면 학교가 무력하다.
지금 문제는 권리가 아닌 권위다. 권위는 정당성이 있는 권력이고, 정당성은 가치에 대한 사회의 합의에서 나온다. 시키는 대로 하면 성공 엔딩을 보는 공략법이 있을 때, 시키는 사람은 권위가 있었다. 그런데 전에 시키는 대로 했는데 잘 안됐다. 그러면 요즘은 이런다. “진작 알아서 했어야지.”
교육이 ‘화이트 칼라’가 되는 지름길, 학교가 상위 명문 학교를 보내는 통로였을 땐 교사가 학생을 때려도 괜찮았다. 하지만 지금은? 체육 못하는 학생을 버리고 가도 아무도 항의하지 않던 학교 밖에서, 체육 내신까지 필요한 입시 학생에겐 줄넘기 과외를 붙이면 된다. 인생은 한 번뿐인 게임인데, 부모가 ‘알아서’ 뚫는 공략 루트엔 학교의 역할이 없다.
홍은혜 작가는 그럼에도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한다. 별 성과 없이도 수영을 계속하는 우리에게 이 사회는 관심이 있나? 권위란 무엇인가? 다시 말해, 뭔가에 권위를 줬다가도 뺏는 우리의 욕망은 어떤 가치를 향해 있을까? 머리가 복잡한 아침이다. 다시 '그냥'해도 내버려 두는 사회로 다시 돌아갔으면 한다. 아이들을 그냥 두었으면 한다.
시인들은 '그냥'을 좋아한다.
그냥 둔다/이성선
마당의 잡초도
그냥 둔다.
잡초 위에 누운 벌레도
그냥 둔다.
벌레 위에 겹으로 누운
산 능선도 그냥 둔다.
거기 잠시 머물러
무슨 말을 건네고 있는
내 눈길도 그냥 둔다.
이런 시도 있다.
그냥이라는 말/조동례
그냥이라는 말
참 좋아요
별 변화없이
그 모양 그대로라는 뜻
마음만으로 사랑했던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난처할때
그냥 했어요 라고 하면
다 포함하는 말
사람으로 치면 변명하지 않고
허풍 떨지 않아도 그냥 통하는 사람
그냥이라는 말
참 좋아요
자유다 속박이다 경계를 지우는 말
그냥 살아요 그냥 좋아요
산에 그냥 오르듯이
물이 그냥 흐르듯이
그냥이라는 말
그냥 좋아요
그러나 여러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의 공통점은 밑에서 위로 올라가려는 사람들의 노력보다, 위에서 밑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이들의 노력이 훨씬 더 절박하다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소설가로 살기 위해 처음 필요한 건 재능이고, 이후는 체력이라고 말했다. 고치고 고쳐서 더는 고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한 번 더 고치는 사람이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아마추어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작업을 하지만 프로는 그냥 자리에 앉아 작업을 한다." 할란 엘리슨의 말처럼 “관건은 작가 되기가 아니라 작가로 살아가기”다. 쉽게 쓴 것처럼 읽히는 글을 쓰기 위해, 쉽게 부르는 것처럼 들리는 노래를 부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퇴고와 연습이 필요한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자연스러운’이라는 단어는 그들이 듣는 최고의 상찬 중 하나다. 예전에는 열정이 좋아하는 것을 향해 돌진하는 ‘뜨거운 것’이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이제 열정이 포기할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는 ‘서늘한 인내심’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원하는 글을 쓰기 위해 작가는 원치 않는 많은 글을 쓰고, 원하는 옷을 입기 위해 모델은 혹독한 식단 조절을 한다. “영감을 찾는 건 아마추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하러 간다”는 소설가 필립 로스의 말처럼 프로는 ‘그냥’ 하는 사람들이다. ‘그냥’은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열정의 다른 이름인 ‘인내’가 만든다. 좋아하는 곳에 가기 위해 좋아하지 않는 더 많은 곳에 기꺼이 가 본 사람, 우리가 그들을 '프로'라 부르는 이유라고 소설가 백영옥은 말하였다.
나도 '그냥'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그냥'하는 거다. 그리고 스포츠에서는 너무 애쓰지 않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다. 게임을 하는 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여유 있는 집중'이다. 이 말은 너무 애쓰지 않는 것이다. 그냥 눈 앞에 있는 것을 보라는 말이다. 목표를 보지 말고, 눈 앞에 해야 할 일만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이런 거대 담론보다 눈 앞의 일에 우선 집중한다. 팀 페리스는 말한다. "탁월함은 앞으로의 5분이다. 혁신이나 개선도 앞으로의 5분이며, 행복도 앞으로의 5분 안에 존재한다." 이 말은 계획을 싹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다. 빅 픽처의 그림이나 담대한 게획을 세우되, 그 커다란 목표를 가능한 한 작은 조각으로 해체해 한 번에 하나씩 '충격의 순간(point of impact-테니스에서 공이 라켓과 접촉하는 지점)'에 집중해야 한다.
그 눈 앞의 일에서 벌어지는 실수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를 무너뜨릴 수 있는 실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더욱 자유로워진다. 곧장 새로운 인생 프로젝트에 도전하는 용기가 생겨난다. 실수한 날이 지나, 아침에 일어나면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세상이 끝났다고 해도, 다른 길을 가면 된다. 신은 앞 문이 닫히면, 뒷문을 열어 놓는다. 살아 보니 그렇다.
이런 시도 있다.
그냥! /오탁번
- 내가 왜 좋아?
- 그냥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다
- 내가 왜 좋아?
- 그냥
나도
이 말 한번 해봤으면!
나는 '그냥' 살고 싶다. 그럼 사는 게 뭔가? 나태주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사는 일/나태주
오늘도 하루 잘 살았다.
굽은 길은 굽게 가고
곧은 길은 곧게 가고
막판에는 나를 싣고
가기로 되어 있는 차가
제시간보다 일찍 떠나는 바람에
걷지 않아도 좋은 길을 두어 시간
땀 흘리며 걷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나쁘지 아니했다
걷지 않아도 좋은 길을 걸었으므로
만나지 못했을 뻔했던 싱그러운
바람도 만나고 수풀 사이
빨갛게 익은 멍석딸기도 만나고
해 저문 개울가 고기비늘 찍으러 온 물총새
물총새, 쪽빛 날갯짓도 보았으므로.
이제 날 저물려 한다
길바닥을 떠돌던 바람은 잠잠해지고
새들도 머리를 숲으로 돌렸다
오늘도 하루 나는 이렇게
잘 살았다.
"굽은 길은 굽게 가고/곧은 길은 곧게 가는" 것을 시인은 잘 사는 길이라 했다. 달리 말해 순리대로 사는 게 잘 사는 것이라 한다. 순리대로 산다는 건 시간의 흐름과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며 욕심 부리지 아니하고 살아가는 것일 게다. 나는 절대로 남을 위해서 자신이 뭘 한다거나 혹은 예언하거나 하지 않으려 한다. 산다는 것은 그냥 아니 그저 세상에 꽃 한 송이가 피어 있듯이 그냥 존재할 뿐이다. 어제 나태주 시인이 사는 내 고향에 가 좋은 분들과 와인 강의를 하고 왔다. 다들 서로가 서로의 배경이 되는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배경이 되는 기쁨/안도현
살아가면서 가장 아름다운 일은
누구의 배경이 되어주는 것이다.
별을 빛나게 하는
까만 하늘처럼
꽃을 돋보이게 하는
무딘 땅처럼
함께 하기에 더욱 아름다운
연어떼처럼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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