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8월 20일)

로랑스 드빌레르의 <<바다로부터 얻은 작은 철학(petite philosophie de la mer)-한국어 번역판의 제목은 '모든 삶은 흐른다'>>의 마지막 주제가 "세이렌"이다. 이 주제를 가지고 철학자는 '조종하려는 사람을 무시하는 법'에 대해 사유하였다.
고대 그리스어로 세이렌(Seirên), 또는 세이레네스라 불리기도 하고, 라틴어로는 시렌(Siren, 사이렌)이라 한다. 이 말은 ‘휘감는 자, 옴짝달싹 못하게 얽어매는 자, 묶는 자’라는 뜻의 옛 그리스어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이는 세이렌이 내는 소리가 영혼을 매혹시키는 힘이 있어 한번 들으면 빠져나올 수 없다는 고대인들의 믿음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대 그리스 문헌들에는 세이렌이 아름다운 목소리 뿐 아니라 피리 소리, 리라(Lyra, 고대 발현악기) 소리로 지나가는 뱃사람들을 깊은 잠에 빠지게 해 잡아먹거나 배를 난파 시켰다고 나온다.
호메로스(Homeros)의 ≪오디세이아≫에서 귀향길에 오른 오디세우스는 연인인 마녀 키르케(Circe)로부터 세이렌에 대한 이야기를 미리 전해 들었기에 위험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는 세이렌이 있는 섬을 지날 때 부하들에게 귀를 밀랍으로 막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은 돛대에 묶어 세이렌에게 홀려 바다에 뛰어들거나 그녀가 있는 섬으로 뱃머리를 돌리지 못하게 했다. 유혹에 실패해 치욕을 느낀 세이렌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바다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리스 신화 속의 이아손도 세이렌의 유혹을 물리친 영웅이다. 그는 현명한 켄타우로스 키론(Chiron)의 충고를 받아들여 명연주자 오르페우스(Orpheus)를 항해에 데려갔다. 세이렌의 소리가 들려오자 오르페우스는 리라를 꺼내들고 훨씬 아름다운 연주를 했고 이아손 일행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세이렌은 반이 여자이고 반은 새인 바다의 마녀들이다. 그들은 매혹적인 노래로 지나가는 뱃사람들을 홀려 죽게 만들었다. 이런 세이렌이 사는 섬을 지나갈 때, 오르페우스가 리라 연주와 노래로 만들어 내는 더 매혹적인 멜로디가 세이렌이 만들어 내는 마법의 멜로디를 압도해, 이아손 일행은 무사히 통과했다.
반인반어인 인어공주의 모습과는 달리, 세이렌 꼬리와 비늘이 없는 대신 발톱과 날개가 있고, 노래를 불러 선원들을 유혹한다. 세이렌의 노래에 홀린 선원들의 배는 암초에 부딪혀 부서지고, 세이렌이 유유하 선원들을 먹어 치운다는 다소 끔찍한 내용의 신화이다. 살면서 한 번도 유혹을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라고 질문하며, <<바다로부터 얻은 작은 철학(petite philosophie de la mer)-한국어 번역판의 제목은 '모든 삶은 흐른다'>>의 저자 로랑스 드빌레르는 삶에서 유혹은 다양한 형태로 다가온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유혹에 넘어가 파멸할 수도 있는 인생이라고 말한다. 사실 우리는, 유혹을 당할 때, 아무런 의심 없이 논리적이지 않은 말에 쉽게 넘어가곤 한다. 우리는 생각보다 거짓에 쉽게 속는다. 그 이유는 생각을 많이 해야 하고 안정된 진실에 지루함을 느끼고, 확인하고 따지고 논리적으로 나오는 것에는 매력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끌어당기지 못하면 누군가 당신을 끌고 다니게 될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그러나 모든 관계의 기초는 유혹이다. 그리고 이젠 인간의 깊이와 폭은 존재의 깊이와 폭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의 넓이와 깊이가 그 사람의 '사람됨'의 품계인데, 우리에게는 유혹에 대한 '나쁜' 서사들이 너무 많다. 우리 사회에서 유혹은 '파멸'이라는 단어와 함께 읽힌다. 마치 유혹하면, 깊은 바닷물로 뛰어들게 하는 요정 세이렌처럼.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에 나오는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그 세이렌은 오딧세우스에 의해 사라진다. 그 서사의 의미는 유혹은 그 앞에 놓이면 견디기 힘들지만, 그 유혹을 넘기고 나면 오히려 그 유혹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한국에 사는 우리에게 유혹이라는 말은 홀림과 무력한 이끌림에 이어 개체의 파괴로 이어지는 서사에서 자주 만난다. 그 서사는 또한 유혹의 거부할 수 없는 힘과 함께 환상을 품게 만든다. 우리는 바로 '팜므 파탈'의 유혹을 떠올린다. 우리는 유혹을 '추락을 예감하는 순간적인 쾌락을 위한 질주'로 간주한다. 이런 식으로 길들여진 우리는 유혹에 다가가고 싶지만 다 다르기도 전에 도망친다.
유혹은 유혹함으로써 자신을 증명해 보는 행위라고 볼 수도 있다. 그것은 당장의 결과만을 위해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존재방식이 된다. 유혹은 자신의 매력을 드러내고, 그것을 통해 관계를 다른 이들과 만들어 나가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백화점에서 물건을 살 때도, 사업에서 새로운 계약을 할 때도,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도 우리는 서로서로 유혹한다. 정치인은 유권자를, 작가는 독자를, 가수는 청중을 유혹한다.
유혹은 상대가 있는 한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일 일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유혹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유혹은 모든 관계의 기초로써, 자신의 매력에 자신감을 갖는 자기 긍정의 힘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유혹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힘이기도 하고,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는 유혹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볼 일이 아니다. 세상은 유혹의 현장이자 학습 터이다. 그래서 유혹도 학습해야 한다. 유혹의 학습을 통해, 우리는 다른 이의 매력은 물론 자신의 매력을 발견하고 탐험하며 영토를 확장해 나가야 한다. 나는 유혹을 마냥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잘못된 것을 알아도 그대로 두고 진실보다 거짓을 선택하면 악순환만 일어난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욱 어두워진다. 유혹하는 사람, 거짓 슬로건을 내세우는 사람, 거짓말을 계속하는 사람들이 사대방을 의존 상태로 만드는 과정이다. 여기에 걸려들면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고, 혼란 속에 살게 된다.
흔히 진실은 극적이거나 시원한 사이다 같지도 않으며 정곡만 찌른다. 진실은 실망스럽거나 거슬리고 슬플 때가 많다. 그리고 진실은 직설적이고 솔직하며, 꾸밈도 양보도 없다. 좋은 말 듣기를 좋아하는 우리는 이러한 진실 앞에서 우리 본영의 모습과 마주할 때가 많다. 하지만 우리는 더 편하고 감미로운 것을 바란다.
거짓은 전염성이 강하다. 거짓은 반복적으로 퍼져가며 의식과 말 속으로 스며든다. 그래서 우리는 남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인 양 말하고, 시류에 맞는 것을 쉽게 믿는다. 그 과정에서 정신과 의지는 오염되고 썩는다. 그렇다면 거짓은 어떻게 알아볼까? 이에 대한 대답을 저자는 "확신할수록 거짓일 가능이 높다"고 말하며, "거짓을 말하는 사람일수록 의심하지 않고 완고하며, 의문을 품지 않고 다 아는 체하고, 언제나 이해하는 척한다"는 거다.
특히 선동된 여론은 대체로 신중하지 않으나 문제는 대세인 의견일수록 우리의 마음에 쉽게 와닿는다는 점이다. 이렇게 우리는 아무 저항 없이 대세에 떠밀려간다. 그러니 모든 것을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한다. 이런 사람일수록 정보와 지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줄만 안다. 그저 다른 사람들이 구축한 정보와 지식을 인용할 줄만 아는 팔로워 순응주의자일 뿐이다. 더구나 이들이 참고하는 정보와 지식의 대부분은 거짓 선동이 난무하는 SNS와 가짜 뉴스를 말하는 일부 유튜버들로부터 온 것이다.
우리는, 정신차리지 않고 방심하면, 자신의 과거에 축적된 세계관이란 렌즈로 주위를 보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한 가치를 나름대로 측정한다. 자신의 시선을 객관적이며 온전한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의심하지 않는 한, 우리는 자신의 인식체계의 노예가 되어 대상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한다. 특히 우리는 세상을 쉽게 둘로 나눈다. 왜냐하면, 그런 구분이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은 늘 변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투스가 한 말이 지금도 혜안을 준다. 그가 한 말이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빠질 수 없다. 잘 알려진 라틴어 문장이다. Panta chorei ouden menei. 모든 것은 변하고 그대로만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영어로 말하면 이렇다. Everything changs, and nothing remains still. 만물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한다. 생로병사의 수레바퀴 안에서 있음과 없음을 반복하며 변한다.
그러나 서양 철학과 종교는 이상세계와 현실세계를 구분하였다. 그러한 구분은 우리가 사유하는데 편하게 해주었지만, 동시에 우리의 생각을 혼탁하게 만들어왔다. 나는 이 두 세계를 품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래 한문 명(明)자를 가지고 늘 깨어 있으려고 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가 밝을 ‘명'자이다. ‘밝다'의 반대는 ‘어둡다'이다. 명자를 풀이하면, 달과 해가 공존하는 것이다. 해를 해로만 보거나, 달을 달로만 보는 것을 우리는 흔히 '안다'고 하며, 그 때 사용하는 한자어가 지(知)이다. 안다고 하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평생을 안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고 외치다 죽은 이유를 난 알겠다. '명'자는 그런 기준을 세우고, 구획되고 구분된 ‘앎(知, 지)’를 뛰어 넘어, 두 개의 대립면을 하나로 장악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것은 명확하지 않은 경계에 서거나 머무는 일이다.
그 경계에 서는 일은 세이렌과 강하게 맞서는 일이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사진처럼, 오디세우스가 선원들에게 귀를 막고 갑판의 승강구를 닫으라고 제안한 방법이 치료약이 될 수 있다. 선동하는 방식과 세뇌하는 의견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오디세우스처럼 단호해지는 길을 선택하면 된다. 오디세우스는 선동하는 말이 난무해도 흔들리지 않고 늘 비판 정신을 유지했다. 오디세우스와 마찬가지로 세이렌의 노래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배의 커다란 돛대에 우리 자신을 단단히 묶어야 한다. 세이렌 마녀들과 한패가 되어 유혹의 노래를 불러서는 안 된다. 차갑더라도 진실을 중시하는 태도를 늘 지켜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 눈 앞에 있는 것을 대담하게 직시하고, 그것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책임이다. 직시해야만 우리는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현재 알고 있는 것, 의지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만큼 직시가 중요하다. 한 인간의 가치는 그가 진실을 얼마나 용인할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니체는 말한 바 있다. 사실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안주하기에는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알고 한다면 얼마든지 훨씬 더 좋은 것들을 우리는 알아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재미난 시를 공유한다.
사탕과 사랑 사이/전순복
알록달록 치장을 유혹이라 말하겠어요
누군가 당신을 까서 그의 입속으로 녹아 드는 희망 말이에요
민 낯을 보이면 깨지거나 붙어버리는 사탕
제 나름의 껍데기로 치장하고 기다리죠
오랫동안 방치된 사탕은 엉뚱한 곳에 외로움을 풀어내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죠
밀봉된 사탕에게 그곳이 유일한 세상이니까요
사탕은
그를 감싼 포장이 열리기까지 그냥 수많은 사탕이지만
누군가에게 한 알로 스며드는 순간 비로소 제 매력을 풀어내죠
사탕이 사랑이 되는 순간 말이에요
사탕과 사랑을 부를 때 혀가 발랄해지는 것은
단맛을 예감한 가슴이 마중물이 되기 때문이죠
오랜 시간 기다리던 사탕은
와자작 깨무는 것보다 당신의 혀끝에서 서서히 녹기를 원해요
불멸의 사랑은 아니지만 천천히 음미하는 시간을 원하죠
알록달록 사랑을 몇 개나 먹어보셨나요
혹시 굴리다 내뱉은 사탕은 없나요
함부로 뱉었던 사랑이 옷이나 머리카락에 달라붙어 곤란했던 적은 없었나요
단맛을 사탕이라고 이름 지은 최초의 사람은
오미五味의 사랑을 겪어본 적 없는 단순한 사람이었을 거에요
사탕과 사랑은 유통기한이 없지만
당신을 사탕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조심하세요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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