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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무의미한 무한 경쟁만 난무한다.

2451.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8월 19일)

"오늘날 우정은 결점이 되었다. 학교에 가는 이유는 배우기 위해서가 아닌 이기기 위해서이다. (......) 요즘은 친구보다 경쟁자를 갖는 게 가장 좋다. 경쟁자들은 이기심을 조장하고 남을 신뢰하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다니에 꼴네호, <번개-세상을 바라보는 날카롭고 번뜩이는 이야기>,  pp, 156-157)

우리나라 교육은 백년대계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백년하청'이다. 중국의 황허 강이 늘 흐려 맑을 때가 없는 것처럼, 한국 교육의 미래가 계속 흐리다. 가장 큰 문제가 교육부의 교육관료들 때문이라는 지적이 매우 많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교육관료들에게 교육은 권력이고 기득권의 방벽이다. 그래서 그들은 교육의 이름으로 통제와 길들이기에만 몰두한다. 교육철학보다 교육공학에만 몰두한다. 이러다 가는 다 망한다. 교육관료에게는 지금의 시스템이 꿀물이지만, 다음 세대는 끝물이고, 그 다음 세대는 사약이 된다. 이런 교육부의 철옹성을 바꿀 수는 있을까? 연대 하여야만 바꿀 수 있다. 점진적 변화가 아니라, 혁명적 전환이 필요하다. 연대가 함께 머리띠 두르고 주먹 불끈 지르는 것만은 아니다. 생각을 공유하고 뜻을 함께하는 것이 연대이다. 현재 교육은 신분 고착의 굴레가 되었다. 그런데 교육은 변하지 않고 있다. 무의미한 무한경쟁만 난무한다.

20세기 교육은 사회가 요구하는 노동력에 호응하였다. '속도와 효율'의 시대에는 빠르고 정확한 계산의 능력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교육은 답을 빨리 습득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 능력으로 사회에서 인정받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하지만 21세기는 다르다. 물론 교육의 본질이 '과거의 사람이 과거의 방식으로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을 가르치는' 숙명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래도 20세기는 그런 교육이 통했다. 사회가 전체적으로 속도와 효율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이젠 그런 것이 안 통한다. 우리는 창의력, 상상력, 융합의 능력을 요구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니 가르치는 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힘들겠지만 연대의 힘으로 하면 성공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금쪽이 부모는 ‘미친개’의 제자다>란 제목의 박선화 교수 글을 읽었다. 그래 같이 좀 생각해 보자고, 갈무리하여 공유한다.

# "세상 경험이 쌓일수록 알게 된다. 대개의 사람들은 완벽하게 좋거나 나쁘기보다는 상황과 입장, 욕망에 따라 다른 행위를 선택한다는 것. 그러나 보편적 선악의 행위와 상호 영향력, 연쇄적 파급효과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고민할수록 더 나은 선택을 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는 기본적인 인간관계의 룰과 예의를 배우는 과정보다는, 타인을 속성으로 규정하고 구분 짓는 법을 먼저 습득하게 만든다." 그러니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의 구분 이전에 좋은 행위와 나쁜 행위를 먼저 알아야 한다.

# 나도 동의하는 내용이다. "근현대 100년사가 “반(反)교육의 역사”였다. 박선화 교수의 다음 정리가 마음에 든다. 
- 일제 치하에서는 ‘식민지 교육’으로 자존감을 잃고 사대주의에 물들었고, 
- 분단 이후는 극단적 좌우 논리의 ‘반공 교육’으로 다름의 조화보다는 절대선과 절대악의 편가르기와 혐오를 배웠다. 
-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들이 결실을 맺기 전, 산업 역군으로 서의 효용성과 배금주의 시대의 스펙 향상이 궁극의 교육 목표가 되면서 경쟁을 학습시키는 교육이었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조건과 공생의 가치를 가르쳐야 할 학교가 오히려 굴복할 강자와 무시 받아 당연한 약자를 가르는 검투사 훈련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  젊은 교사들이 목숨을 끊고,  교사들이 폭염에 거리로 나섰다. 이 문제를 놓고, 어떤 이들은 “내 새끼 지상주의”가 문제라며 부모들을 탓하고, 어떤 이들은 비대해진 학생인권의 문제니 다시 체벌을 허용해야 한다고 진단한다. 그게 다일까. 진실로 내 새끼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라면, 강력한 교권의 문제라면, 그토록 오랜 시간 교사들의 폭력과 차별에 무방비로 방치된 학생들이 넘쳐나던 사회는 어떻게 진단해야 할까? 박선화 교수는 자녀의 행복보다 성공을 갈망하는 사회 문제로 보고 싶어 한다. 그리고 "금쪽이 부모들"이 ‘미친개’의 제자들이라는 주장이다. 나도 교사를 했지만,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의 학창 시절이 그랬다. "금쪽이 부모들"은 냉철하게 현실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 "학교마다 있던 교사 별명 1위가 ‘미친개’라는 조사가 있다. 광년이, 독사, 피바다에 돈만 밝힌다는 거지새끼, 바리캉과 맛세이, 여학생들의 신체를 더듬던 변태가 활보했다. 학교인지 조폭인지 혼란하다. 가난하거나 성적이 낮은 학생은 가장 만만한 먹잇감이었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학교폭력의 피해자인 주인공이 담임에게 복수했을 때 많은 이들이 통쾌함을 느낀 이유는 집단적 유사경험 때문이다. 스승의 기억이 빈약하고 불신만 가득한 학생들이 학부모가 되었고, 전대의 상당수 교사들이 저지른 악업이 거울처럼 부메랑으로 대물림 되는 중이다. 폭력의 주체가 오갈 뿐 학교가 학교가 아닌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폭력교사도 갑질 부모도 대책 없는 '금쪽이들'도 철학 없는 교육, 길 잃은 무한경쟁 사회와 남 탓주의의 결과물이자 상호 악영향의 주체이지 근본 원인은 아니다." 이게 젊은 교사들이 목숨을 끊고,  교사들이 폭염에 거리로 나서게 만든 근본 원이 아니라는 주장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시스템 문제이다.

# 침몰 직전의 교육환경과 오랜 불신의 고리를 쉽게 끊기는 어렵겠지만 샛길은 없어 보인다. 당장의 세심한 제도정비는 중요하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학교와 교육 문법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 우선이다.
- 아군과 적군의 편가르기를 배우기 전에 나와 타인의 차이를 이해하는 교육, 
- 나쁜 사람 이전에 나쁜 행위가 먼저 있고 나쁜 행위는 나부터 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교육, 
- 나만 행복해서는 결코 행복한 세상이 오지 않는다는 당연한 진리를 인식시키고 경쟁보다는 협력과 대안을 소통하는 교육
이렇게 교육 문법을 바꾸지 않으면, 대부분의 제도 정비는 잠시의 미봉책에 불과하다. 교권은 학교가 학교 답고 교육이 교육다운 모습을 갖출 때, 느리지만 자연스럽고 올곧게 세워지는 신뢰의 결과물이다. 이조차 부모나 학생과의 제로섬 경쟁 쟁취물로 보는 시각이 바로 반(反)교육의 산물이다.

#  경쟁과 효율을 위한 장치들을 덧붙이기만 해오던 우리 사회는 이제 다른 방향으로의 진화를 모색해야 할 때다. 몸에 밴 서열화의 절차를 떨궈내야 한다. 평가와 서열이 소거된 바로 그 자리에서 예기치 않은 풍요가 싹틀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목수정의 담벼락에 만난 이야기이다. 텔레비젼의 거의 모든 예능 프로그램은 예외 없이 경쟁을 기본 구도로 한다. 패자와 승자가 존재한다. 그것이 없으면 마치 우린 숨마져 쉴 수 없을 것처럼. 승자의 얼굴에 비친 환희와 패자의 얼굴에 드리운 어둠을. 그 잔인한 이분법을, 인간의 능력을 기필코 계량화하고 서열 화하는 사회의 룰을  학습시킨다. 누구도 이 체계화된 경쟁의 구도를 피해갈 수 없을 것처럼. 그래서 개인적 여흥의 시간에서 조차 채점 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왔다.

"가슴으로 살아야 하는 시대에 가슴 께가 뻐근한 일만 많다. 가슴으로 행동하고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가슴으로 아껴야 한다. 가장 사람답게 사는 사람은 가슴으로 사는 사람이다." 어린 시절 못났던 친구들은 행복이며 인생이며 계속해서 삐걱거릴 것만 같았는데, 서정홍  시인은 ‘못난 것들’에게 점수를 주고 있다. 동감이다. 새침하게 공부만 잘했던 친구들은 자기 앞 바라지에만 정신을 쏟으며 비싼 척하느라 시야가 좁을 수도 있겠다. 공부는 지지리 못하거나 안 했어도 했어도 인정 많고, 사람 좋아했으니 세상에 의롭게 뛰어들 이는 어쩐지 ‘못난 것들’ 쪽일 것만 같다. 사람을 살린다는 말도, 세상을 살린다는 말도 그토록 당연한 말임에도 제대로 와닿지 않는 것은 흉흉한 분위기 탓이다. 멀쩡한 사람을 죽이고 멀쩡한 세상을 죽이는 시대가 아닌가. 흉기 난동 현장에 그때의 정근이가 또 민철이가 있었다면 무엇이라도 해보려고 주먹을 불끈 쥐었을 것이다. 이 시를 소개한 이병률 시인의 덧붙임이다.


못난 것들이/서정홍

이제야 알았네. 
수업 시간에 공부는 안 하고 첫눈 온다고 창밖만 바라보던 정근이, 
꼴찌가 좋다며 툭하면 수업 빼먹던 민철이, 
부모 몰래 오토바이 타다가 넘어져 여섯 달 꼬박 병원 신세 지던 동준이, 
부모 이혼하고 난 뒤에 학비조차 내지 못하던 순식이...... . 
그 못난 것들이 겨우겨우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말이야, 
틈틈이 못난 스승을 찾아와 위로하고 간다는 것을. 
그 못난 것들이 하나같이 땀 흘려 일해서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살린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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