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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는 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244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8월 17일)

모비 딕(Moby Dick, 백경, 흰머리 고래)은 미국 소설가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장편소설로 1851년 작품이다. 이 소설은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에 불굴의 의지로 도전하는 인간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는 동시에 자연에 무모하게 도전했다 자멸하는 인간을 통해 오만의 최후도 말해준다. 이 소설은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작품의 배경은 포경 산업으로 유명한 19세기 미국 뉴베드퍼드 항이다. 주요 등장인물은 포경선 피콰드호의 선원 이스마엘, 또 다른 선원 퀴퀘그, 그리고 선장 에이해브이다. 이스마엘은 모비 딕을 잡는 치열한 3일간의 사투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으로 이 소설의 화자다.

이스마엘은 매사추세츠의 학교 선생이다. 이 이름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에 쫓겨난 아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바다의 낭만을 동경해 오던 이스마엘은 우울한 기분이 들 때면 언제나 바다로 나가곤 한다. 결국 바다로 떠나기로 결심한 이스마엘은 고래잡이 선원이 되기 위해, 포경산업으로 미국에서 유명한 항구도시 뉴베드퍼드로 간다. 그곳 여관에서, 범상치 않은 느낌을 주는 폴리네시아인 퀴퀘그와 한 방을 쓰게 되는데, 이스마엘은 야만인 추장의 아들인 이 사람에게서 묘한 친근감을 느끼고 우정을 쌓게 된다. 퀴퀘그는 뛰어난 작살잡이기도 하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에이해브에 대한 주변의 경고를 무시하고 피콰드호에 오른다.

선장 에이해브(Abab)는 난폭한 흰 고래 모비딕을 잡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다지고 있었다. 지난날 모비딕을 잡으려다가 한쪽 다리를 잘려 버린 쓰라린 원한이 있었다. 에이해브는 모비딕를 복수하기 위해 배의 마스트에 스페인 금화를 못박아 전시하면서, 흰 고래를 발견한 사람에게 이것을 주겠다며 선원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일등항해사 스타벅(Starbuck)은 그에 자극 받아 모험을 하게 된다.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날 모비딕이 나타났다. 나침반이 고장나 버리고 말았다. 선원 하나가 빠져 죽고 흑인 하인이 미쳐 버리고 말았다. 첫째 날에는 배 한 척이 깨져 버렸다. 둘째 날에도 배 한 척이 부숴지고, 에이해브의 의족이 뜯기고 말았다. 셋째 날, 작살로 모비 딕을 찌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에이해브는 작살줄에 온 몸이 친친 감겨 버리고 흰 고래와 함께 깊은 바닷속으로 잠겨 버리고 말았다.

깨진 배는 점점 기울어져 바다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선원 한 명이 위험을 알리러 돛대 끝에 독수리 깃발을 달았지만, 이 신호를 보고 구조하기 위해 달려오는 배는 없었다. 모든 것이 바다에 휩쓸려가고 이슈마엘만이 바다에 표류하다가 구조되어 살아 남는다. 그 이슈마엘의 회고록이 소설의 내용이다.

1971년 3월 30일 미국 시애틀에서 제리 샌프란시스코 대학 출신의 젊은이 3명이 처음으로 커피점을 열었을 때. 그 이름을 모비딕의 주인공에서 따 스타벅스(Starbucks)로 정했다. 로고는 고래 잡이들에게 공포의 상징이자 그리스 신화에 바다 귀신으로 나오는 세이렌(sirens)을 귀엽게 포장했다. 오늘날 도시의 거리에 흔하게 만나는 미국의 상징 스타벅스는 멜빌의 모비딕에서 나왔다. 소설에 등장하는 스타벅은 광기에 빠진 선장에게 쓴 소리를 하는 1등 항해사로 등장한다. 그가 소설 속에서 가장 이성적이고 차분한 인물이었다. 스타벅스 창업자들이 그의 이름의 택한 것은 아마 커피 한 잔이 주는 차분함을 상징하고 싶었지 않을까 생각한다. 세이렌 이야기는 내일 하려고 한다.

<<바다로부터 얻은 작은 철학(petite philosophie de la mer)-한국어 번역판의 제목은 '모든 삶은 흐른다'>>를 쓴 로랑스 드빌레르는 모비 딕 이야기를 한다. 그녀 사유 주제는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는 지 아는 일'이다. 

피쾨드 호의 에이해브 선장은 바다 괴물에게 다리 한쪽을 잃었다. 그 후 그는 오직 복수만을 꿈꾼다. 바다 괴물 모비 딕을 잡아 죽이는 것이 선장의 유일한 인목표이다. 이런 복수심은 어디서 오는 걸까? 저자는 분노라고 본다. 분노(忿怒/憤怒)의 사전적 정의는 '분하여 성의 내는 것'이다. 자신의 욕구 실현이 저지당하거나 어떤 일을 강요당했을 때, 이에 저항하기 위해 생기는 부정적인 정서 상태이다. 보통 '화' 또는 '성'이라고 한다. 일상 생활에서 분노가 생기는 경우들은 다음과 같다.
- 부당한 일을 당해 억울할 때 
- 누군가에게 자신의 것을 빼앗겼다고 확신할 때
-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감사의 표현 혹은 답례를 제대로 받지 못할 때

소설 <<모비 딕>>에서 에이해브 선장은 이 같은 분노를 상징한다. 그리고 모비 딕은 그가 당한 피해와 잔인한 운명이다. 선장은 이 운명에 맞서 싸우고 싶어 한다. 모든 것이 시련이었던 선장은 바다의 주인이 되어 신과 동등해지고 싶어 하고, 모비 딕은 선장에게 허락되지 않은 모든 것이었다.

복수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기를 파괴한 대상을 파괴하고 악을 악으로 갚으려 한다. 공격을 당했으면 되돌릴 수 없다. 복수심은 차갑든 뜨겁든 갈증만을 남긴다.  분노만 해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이러한 무력감 때문에 복수하려는 사람은 더 분노하며 피의 복수는 강도가 더욱 세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현실을 바꿀 수는 없다. 현실은 현실이다.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 없다는 현실 앞에서 사람들은 울부짖으며 분노한다. 이미 벌어진 일은 원래대로 수습할 수 없다. <<모비 딕>>에서 흰 고래는 이처럼 가혹한 현실을 상징한다. 우리의 원한이 무엇이든 현실은 귀를 닫고 듣지 않는다.

그렇다면 분노의 고기잡이배에 올라타지 않으려면, 우리 자신이 에이해브 선장처럼 되지 않으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저자는 특별한 방법이 없다고 한다. 그저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파도가 잔잔해 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격렬한 분노도 결국에는 가라앉는다. 단, 분노한 상태일 때는 행동이나 말을 막 해서는 안 된다. 그 순간에는 시원할 지 몰라도 이후에 대가를 톡톡히 치룬다. 예컨대, 한참 열심히 내려온 언덕을 다시 올라갈 때 그 과정은 더욱 길고 괴롭다. 고삐 풀린 분노는 폭풍우처럼 에너지가 많이 소비되는 일이다.

분노에 휩싸이면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상황을 과장한다. 분노한 사람은 상황을 왜곡해서 바라본다. 분노가 가라앉아야 상황을 정확히 평가할 수 있다. 그러니 분노에 휘감겼을 때는 결정을 하지 말고 분노부터 어떻게 든 달래는 것이 좋다. 마음 속으로 '그만!' 하고 크게 외쳐보고, 현재 나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해야 한다. 세상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돌아가지 않고, 따뜻하지도 포근하지도 않다. 바다에는 숱하게 많은 악마와 고래가 지나간다.

소설 <<모비 딕>>은 손에 넣기 힘든 무엇인가를 쫓는 우리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열렬하고 간절히 원한다. 그 모든 것은 흰 고래로 상징될 수 있다. 흰 고래는 복수의 대상일 뿐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에 간직된 알 수 없는 오래된 욕망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쫓는 흰 고래는 무엇일까? 우리는 의미. 이유, 꿈을 찾아 삶이라는 바다에서 헤맨다. 이러한 것이 없다면 에이해브 선장이 말한 대로, "모든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땅은 거대한 제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선장은 모비 딕이라는 저주스러운 향유 고래에 집착했다. 동시에 그 고래는 선장이 살아가는 의미였다.

육지에서 든 바다에서 든 뭔가를 이루고자 하는 열정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다. 우리가 마음 속으로 끈질기게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수수께끼를 밝히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가 뒤쫓는 흰 고래, '모디 빅'이 무엇인지 아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한다. 우리 인간은 두 가지 본능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생존 본능, 또 다른 하나는 종족 보존을 위한 복제 본능이다. 생존을 위한 욕구는 의식주와 같은 몸을 위한 욕구와 심리적 안정을 위한 안전, 사랑, 지위, 소속감 그리고 자부심과 같은 정신적인 욕구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저 생존할 뿐만 아니라, 삶의 환희를 경험하는 또 다른 삶의 영역이 존재한다. 인간은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된 후에,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 전혀 다른 성격의 욕구를 찾아 나선다. 인간은 물질적이며 정신적인 욕구를 넘어선 영적으로 만족스런 그 무엇을 추구하게 된다. 그 무엇이란 개인이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이 되는 것이다. 탁월하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행복하다. 그런 사람들은 먼 미래에 대한 걱정을 멈추고 현재를 음미한다. "아 지금 참 좋다!" 이 잦은 멈춤과 음미의 총합이 그날 하루 능동적으로 찾아낸 행복의 양이다. 그렇게 매일 하루치 행복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결국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현재를 음미하려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있어야 하고, 그 분야에서 탁월함이 있어야 한다. 그냥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없다. 어떤 성취가 중요하지는 않다. 성취 지향적일수록 행복지수는 낮다. 행복을 큰 성취에서 찾기 때문이다. 행복의 기준이 크고 높게 설정되어 있으면, 평범한 일상은 초라함을 가져다 준다.

우리는 자신이 해야만 하는, 그 무엇에 매진할 때 행복하다. 인간은 자신의 개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잠재성을 일깨워, 그 잠재성과 어울려 춤을 출 때, 행복하다. 진정한 행복이란 기본적인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영적인 자신을 만족시킬 때, 경험하는 어떤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영적인 욕구를 알고, 그것을 매일 갈고 닦는 수련을 지속하여 탁월함에 이르면, 자연히 남들이 모두 최고선이라고 추구하는 부나 명예보다는,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삶의 고유한 임무에 몰입하게 된다. 그럴 때만이. 잠자고 있던 잠재력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고, 행복하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점점 낯선 것이 '새로운 기본(new normal)'이 되어가고 있다. 예컨대, 초지능 기계와 공학적으로 설계된 신체, 소름 끼칠 정도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알고리즘, 10년 마다 직업을 바꿔야 할 필요성 등이다. 게다가 막대한 양의 정보는 홍수처럼 밀려드는데, 도무지 그것들을 흡수하고 분석할 방법이 부족하다. 맹목적으로 모비 딕을 쫓기보다는, 이런 세상에서 필요한 것이 강한 정신적 탄력성과 풍부한 감정의 균형감이다. 이런 가운데,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삶을 원하는가 등 명상을 하며 나를 잘 관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국민적  갈등을 자신의 이익의 동력으로 삼는 우리 정치인들은 "사람 안에 개가 들어 있어" "개소리"를 하느라 바쁘다. 답답하다.


개의 정치적 입장/배한봉

개들이 짖는 소리를
개소리라 한다.
그것은 개들의 대화이기도 하고
개들이 달을 보고 하는 뻘짓이기도 하다.​

​사람끼리 가끔
개소리한다고 할 때가 있다.
사람 안에 개가 들었다는 말이다.

개들도 그럴 때가 있을까.
개 안에 사람이 들어
울부짖으면
사람소리 한다고 개들끼리 수군거릴까.

​그러면 그것은,
욕설일까,
정치일까,
철학의 한 유파를 형성할 수 있을까.

​벽에는 커다랗게 얼굴 사진을 새긴 포스터가
일렬횡대로 붙어 웃고 있다.

​벽보 앞을 지나가다 나는
개 짖는 소리를 듣는다.
이것은
정치적 혐오일까, 무관심일까, 참여일까.
골목 앞, 신들린 무당집 개가
아무나 지나갈 때마다
컹컹컹, 컹컹 자꾸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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