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생각이 떠오른다고 해서 불쑥 말해 버리면 안에서 여무는 것이 없다.

1647.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오늘 아침 화두는 '침묵(沈默)'이다. 본격적으로 <인문 일기>를 쓰던 시절에 적어 두었던 글을 오늘 아침에 만났기 때문이다. 그동안 너무 번잡하고 다양한 생각들로 너무 나를 채우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미 5년 전에 이런 생각을 했는데, 그게 내 속에서 충분히 숙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 오늘 아침에서야 '위도일손(爲道日損)'이라는 노자의 말을 뼈저리게 깨달었다.

'위도일손'이라는 말에서 나는 두 가지를 나누어 보고 싶다. 하나는 '위학일익(僞學日益, 배움의 목표는 날마다 새로운 것을 채우는 것이다)'처럼, 우선 채워야 한다. 그런 다음 '위도일손'으로 일상에서 실천하여야 한다. 거기서 '침묵'이라는 화두를 빼낸 것이다. 

'위도일손(爲道日損, 도를 닦는 것은 날마다 비우는 것이다)' 참 좋은 말이다. 나는 몇 일전에 이말을 다음과 해석해보기도 했다. “날마다 비우는 것이 도를 닦는 방법이다.” 또는 “열심히 산 사람만이 날마다 비울 수 있는 자격이 있다.” 도를 닦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살아가는 길(道)을 내는 것이 아닐까 문득 생각이 든다. 우리는 지갑을 채우고, 땅을 넓히고, 지위를 높이고, 권력을 높이기 위한 ‘채움’의 무한 경쟁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날마다 비우라”는 것은 새로운 가치의 혁신이다. 그 ‘비움’의 결과를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버리고, 또 버리다 보면 끝내는 무위(無爲)의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내가 가진 고집과 편견을 비우고, 내가 이룬 부와 명예를 나누고, 내가 쌓은 성공에서 한 발짝 물러나는 것이 채우고 쌓는 일보다 위대할 수 있다는 말이겠지?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채운 사람만이 버릴 자격이 있다는 점이다. 배우지 않고서는 버릴 수 있는 지식이 없는 법이듯이, 비우려면 오늘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런 후에 날마다 채운 것을 버리는 것이다. 나는 채우는 데만 열을 올렸다. 이젠 비워야 할 때이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나의 정신적인 것도 마찬가지이다. 아주 기본이 되는 것을 내 세포에 새겨질 때까지 익혀야 한다.

이 말은 "위학일익(僞學日益), 위도일손(爲道日損)"( <도덕경> 48장)에서 나온 것이다. "배움의 목표는 날마다 새로운 것을 채우는 것이다. 도의 목표는 날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도에 힘쓰는 사람은 날마다 덜어낸다. 여기서 도가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라면, 나이 들면서 조금씩 버리고 덜어내는 것이 사람 답게 잘 사는 길이라는 말로 들린다. 

비우고 덜어내 텅 빈 고요함에 이르면, 늘 물 흐르듯 일상이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뿐 포장하지 않으며, 순리에 따를 뿐 자기 주관이나 욕심을 고집하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 그의 모든 행위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항상 자유롭고 여유로울 것이다. 샘이 자꾸 비워야 맑고 깨끗한 물이 샘 솟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만약 비우지 않고, 가득 채우고 있으면 그 샘은 썩어간다.

'침묵'을 이야기하려 다가 여기까지 뻗쳤다. 어쨌든 5년 전 오늘 아침 '침묵'에 대한 생각을 했었다. 이런 식이었다. 우선 오늘의 시를 공유하고 침묵 이야기를 이어갈 생각이다.

명함/함민복

새들의 명함은 울음소리다
경계의 명함은 군인이다
길의 명함은 이정표다
돌의 명함은 침묵이다
꽃의 명함은 향기다
자본주의의 명함은 지폐다

명함의 명함은 존재의 외로움이다


언제나 조용하지만 변화무쌍한 자연과, 그 자연의 변화를 주도하는 시간의 특징은 침묵이다. 나는 다음 말을 좋아한다. "천하언재(天何言哉) "하늘이 언제 말하 더냐!)" 그리고 "희언자연(希言自然, 긴 말 없는 게 자연이다)"도 좋아한다. 그러니 "침묵은 금이고, 웅변은 은이다'라는 문장도 옳다. 진리는 이 쪽에도 옳고 저 쪽에도 옳은 중간이다. 말은 자신의 침묵이 만들어낸 보석이어야 한다. 침묵을 통해 단련된 자신의 인격과 품격이 드러난 말은 자연스럽고 찬란하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어느 수도원의 팻말에 “침묵에 보탬이 되지 않는 말이면 하지 말라"고 적혀 있다 한다. ‘단순하고 간소한 생활에 보탬이 되지 않는 물건이면 어떤 것이든 소유하지 말라'로 바꾸어 볼 수도 있다. 침묵을 바탕으로 해서 거기서 움이 트고 잎이 피고 꽃과 열매가 맺기 때문이다. 말 보다 묵묵히 인내하고 기다리는 침묵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그런 기다림의 기간이 있어야 있을 것이 있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자연은 침묵으로 가르쳐 주었다.

말은 가능한 한 적게 해야 한다. 한 마디로 충분할 때는 두 마디를 피해야 한다. 인류 역사상 사람 답게  살다 간 사람들은 모두가 한 결 같이 침묵과 고독을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끄러운 세상을 우리들 자신마저 소음이 되어 시끄럽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정말 말을 적게 하려면,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나 불평, 불만, 비난 3비를 조심한다. 말이 많은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든 간에 그 내부는 비어 있다. 생각이 떠오른다고 해서 불쑥 말해 버리면 안에서 여무는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내면은 비어 있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겐, 말(言)에 해당하는 '로고스(logos)'라는 개념이 있다. 로고스는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 즉 인간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거대한 문법이다. 이를 동양 철학에서는 '도(道)'라고 한다. 나는 도를 '삶의 문법'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문법은 문자가 발명되고 더 중요해 졌다. 글 뿐만 아니라, 말을 잘 하는 사람은 문법을 숙지하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승화시킨 사람이다.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는 문법이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배우지 못했다는 말은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과 행동, 즉 언행이 다듬어지지 않고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자란 뜻이다. 그런 사람은 누구로부터 지적 받아 자신의 잘못을 수정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문법이란 이타심에서 나온 상대방에 대한 배려하고 말할 수 있다.

'침묵이 힘이다'라는 이야기를 좀 하고 싶다. 입에 말이 적으면 어리석음이 지혜로 바뀐다고 불교 경전은 말하고 있다. 말하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있어야 한다. 생각을 전부 말해버리면 말의 의미가, 말의 무게가 여물지 않는다. 모든 것은 기다려야 여문다. ‘초조함은 죄악이다'라는 말도 떠오른다. 사실 말을 하기보다 듣는 것이 매우 힘들다. 하고 싶은 말을 참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초조하고 조바심을 느낀다든가 성급하다는 것은 두려움의 반영이다. 그 까닭에 앞뒤가 맞을 리 없고 손발이 맞을 리 없다. 그 상태로는 도움이 될 리 없고 협력이 될 리 없다. "빨리빨리"가 습관인 자는 실은 가장 늦는 자이다. 입만 빠르고 마음만 바쁘며 정작 손발은 허투르다. 마음과는 다르게 '대충대충'으로 끝나는 경우가 일상다반사이기 때문이다. 가장 빠른 자는 가장 정확한 자다. 빠르게 끝내고 싶은가? 그렇다면 정확하게 하라. 정확한 자가 냉철하고 여유가 있기 마련이다. 고저장단(高低長短), 경중완급(輕重緩急), 경유강약(硬柔强弱) 전후좌우(前後左右), 모두 정확하지 않으면 지닐 수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지지(知止), 즉 멈춰야 할 때 멈출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사 지혜의 근본은 '지지(知止)'일 수 있다. 멈출 때를 안다는 것은 부족함을 안다는 것이며, 부족함을 안다는 것은 채워야 할 것을 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채워야 할 것을 안다는 것은 생각할 줄을 안다는 것이며, 생각할 줄 안다는 것은 자신을 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초조함은 죄악이다. 초조함은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초조함을 몰아내려는 치열한 노력이 또한 인문학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문학에서 나오는 인문정신은 곧바로 반응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름길을 믿지 않는 것이다. 삶의 정신적 우회이다. 삶을 다시 씹어보는 것, 말 그대로 반추하는 것이다. 지름길이 아니라 에움길로 걷는 것, 눈을 감고 달리지 않고 충분히 주변을 살펴보는 것, 맹목이 아니라 통찰, 그것이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한마디로 초조해하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