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8월 12일)

오늘은 노자 <<도덕경>> 제70장을 읽고 나간다. 오후에 <유성구 공동체한마당> 집담회에 참석한다.
제70장의 제목은 "도란 무척 알기 쉽고 행하기도 쉽다"이다. 그러나 이 장에는 내가 좋아하는, '베옷 안에 풍은 보석'이라는 "피갈회옥(被褐懷玉)"이 나온다. 이 말은 '거친 삼베옷을 걸치고 있지만 가슴에는 아름다운 구슬을 품고 있다'는 거다. '겉은 허름한 베옷(褐)을 입고(被) 있지만, 속에는 옥(玉)을 품고(懷)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거'다. '겉은 허름하지만, 속은 알차다'는 거다. 노자가 그리는 성인의 모습인데, 나는 자유인으로 인문 운동가의 모습도 그렇다고 본다. 인문 운동가가 하는 말은, 노자가 말하는 성인의 말씀과 같이 화려하지도 멋지지도 않다. 그러나 그 안에 보석을 품고 있지만, 사람들은 웃어 넘기거나 믿으려 하지 않고, 듣거나 읽으려 하지 않는다.
나는 '회(懷)'라는 한자를 좋아한다. 내가 살고 있는 옆 동네가 '대덕구'인데, 이 대덕구의 옛이름이 '회덕(懷德)'이었다. 나는 '회덕'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현 '대덕구 대신 '회덕구'로 빨리 바꾸었으면 한다. 대전의 '대'자와 회덕의 '덕'자를 따서 '대덕구'라 했다는 데, 회덕이라는 말보다 스토리가 약하다. '회덕'은 '덕을 품은 곳'이란 뜻이다. 공자가 한 "대인은 가슴에 덕을 품고, 소인은 가슴에 고향(땅)을 품는다"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이걸 "대인회덕, 소인회토(大人懷德, 小人懷土)"라 한다.
이 장 역시 노자의 실존적 심정이 나온다. 이미 <<도덕경>> 제41장에서 노자는 자신의 실존적 고독을 다음과 같이 토로한 바 있다.
上士聞道(상사문도) 勤而行之(근이행지): 훌륭한 사람들은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행동에 옮기고
中士聞道(중사문도) 若存若亡(약존약망): 중간치기 사람들은 도를 들으면 긴가민가하며 의심하고,
下士聞道(하사문도) 大笑之(대소지): 하류 사람들은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는다.
不笑 不足以爲道(불소부족이위도) : 하류 사람들이 비웃지 않으면 도라고 하기엔 부족할 것이다.
노자는 자신의 말을 들으면 '훌륭한 선비(上士)'는 부지런히 행하려고 노력하지만, '중간 선비(中士)'는 반신반의 하고, '일반적인 선비(下士)'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웃는다는 거다. 노자는 사람들이 듣고 웃어넘기는 이야기가 진짜 위대한 진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듣고 웃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라는 역설이다.
나는 여기서 '선비'라는 말을 지식인으로 읽고 싶다. '훌륭한 지식인(士)'은 노자가 말하는 도에 대한 철학에 동조하고 실행에 옮기겠지만, 중류, 하류 지식인들은 의심하거나 크게 비웃을 것이라 했다. 더 나아가 사람들이 비웃지 않으면 진정한 진리(道)라고 할 수 없다는 거다. 노자는 자신의 도에 대한 철학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 말하고 있는 거다. 위대한 진리는 처음에 배척을 받거나 무시를 당했다. 새로운 진리의 시작은 사람들의 불신이 함께 했다.
진리는 상반되는 듯한 두 명제를 동시에 포함하기 때문에, 진리는 역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일상적 상식인으로서 이렇게 한 가지 사물이 정반대되는 두 특성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식적인 이분법의 단선적인 사고 방식에 지배 받고 사는 우리로 서는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소롭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 소리를 들으면 크게 웃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사람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는 것은 '도'가 아니라고 했다. 정확한 통찰이다. 웃음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역설적이 아니라는 뜻이고, 역설적이 아닌 것은 궁극 진리가 아닌 것이다. 궁극 진리는 언제나 일상적 의식을 근거로 한 상식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간 지기들은 일언지하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비웃지 않는다. 그것이 정말 그럴까 안 그럴까 반신반의하는 "방법적 회의"(데카르트)를 하며 의심한다. 여기서 또 한 단계에 더 올라서서 사물을 변증법적, 역설적 차원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진리 자체에 아무런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 열심히 따르고 실천하는 태도를 취할 것이다.
여기서 '상사(上士)'는 단순히 지식인 너머, 외면의 물질적인 가치보다는 내면의 정신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구도자로 볼 수 있다. 내면의 참된 본성을 찾아서 진리 탐구를 하는 순수한 마음을 지향하는 사람말이다. 그들은 '도'에 대한 가르침을 들으면 그 즉시 배운 대로 믿음을 가지고 성실하게 가르침을 실천한다. '하사(下士)'는 쾌락과 물질적인 욕망에만 관심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내면 탐구나 진리 탐구를 경멸하는 사람들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러한 물질적인 가치와 욕망만 탐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한다. 화려하고 예쁜 것에 더 많은 눈길을 보내고 선택한다. 그래서 요란하게 겉은 치장하고 꾸며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려고 한다. 포장만 요란하고 내용은 형편없는 물건도 많고, 겉은 그럴듯하나 들여다보면 상식에 어긋난 사람도 많다. 유기농으로 재배한 채소는 벌레 먹고 상처도 많지만, 영양가도 많고 맛도 좋다. 노자가 이런 말을 하는 요지는 자신의 주장이 겉으로 보기에 특별하거나 멋져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톡 쏘는 깨달음이나 주장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알고 실천하려 하지 않는다는 거다.
선지자는 고독하다. 알아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도, 석가도, 마호메트도 그런 고독을 경험했다. <<도덕경>> 제70장에서 노자는 선각자로서 느끼는 고독감을 다시 또 한 번 더 말하고 있는 거다. 자신이 말하는 '도'란 것이 알고 보면 무척 쉽고 행하기도 쉽지만, 사람들은 어렵게만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하려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푸념이 아니라 연민이다. 대중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알아주는 사람이 없지만 스스로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는 않는다. '도'를 포기하지도 않는다. '자신을 아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자신이 더욱 더 귀한 존재가 된다'는 말에는 진리에 대한 강한 자기 확신이 감춰져 있다. '성인이 겉으로는 거친 삼베옷을 걸치고 있지만 가슴 속에는 아름다운 구슬을 품고 있다'는 마지막 문장에도 자신의 도에 대한 노자의 자긍심이 짙게 배어 있다.
우선 제70장의 원문과 번역을 읽어 본다.
吾言甚易知(오언심이지) 甚易行(심이행) : 내가 하는 말은 매우 알기 쉽고, 매우 행하기 쉬우나,
天下莫能知(천하막능지) 莫能行(막능행): 세상 사람은 알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한다.
言有宗(언유종) 事有君(사유군): 말에는 요지가 있고, 일에는 중심이 있다
夫唯無知(부유무지) 是以不我知(시이불아지): 사람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나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知我者希(지아자희) 則我者貴(즉아자귀) 是以聖人被褐懷玉(시이성인피갈회옥): 나를 아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나는 더욱 더 귀한 존재가 된다. 그래서 성인은 거친 삼베옷을 걸치고 있지만 가슴에는 아름다운 보석을 품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어려운 문장이 "知我者希(지아자희) 則我者貴(즉아자귀) "이다. 도올 김용옥은 두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이 두 문장을 병치 구조로 보아, "칙(則)"을 '본받는다'라는 타동사로 보고, '나를 아는 자도 희소하고, 나를 본받는 자도 희소하다'로 읽고, 다른 하나는 "즉(則)"을 '~ 즉' 의미의 접속사로 해석하여, '나를 아는 자가 희소하면 희소할수록 나는 귀하게 된다'의 뜻으로 읽는다. 백서본은 "지자희(知者希), 즉아귀의(則我貴矣)"로 되어 있다 한다. 이는 '나를 아는 자가 적을수록 나는 귀하게 된다'로 읽힌다.
"피갈회옥(被褐懷玉)"은 노자가 처한 세상의 불우한 모습과 내면의 진박(眞樸)한 인격 자세의 모순된 양면을 잘 그려내는 말로서 다양한 맥락에서 잘 인용되고 있다. 보석을 가슴에 품은 자가 갈포를 두려워할 리가 없다. 도올은 이렇게 말하면서, 이것은 "도가적 은둔자의 프라이드"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강의에서 말하였다.
위대한 진리는 참 평범하고 일상적이다. 예컨대, 높아지려면 낮추어야 한다. 물처럼 부드럽고 약한 것이 결국 강하고 센 것을 이길 것이다. 강과 바다가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되는 이유는 자신을 낮추어 아래로 흘렀기 때문이다. 천하의 주인이 되려면 말로 자신을 낮추고 몸으로 자신을 겸손히 해야 한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당신을 받들고 따를 것이다. 천하의 주인이 되는 방법을 이야기한 노자의 주장은 이해하기도 쉽고 실천하기도 쉬운데, 세상 사람들은 알려고도, 실천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노자는 그런 현실이 안타까웠던 것 같다. 다음 문장은 노자 <<도덕경>의 제70장을 소개한 글을 인터넷에서 만난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혁신을 이끌고 있는 기술의 '도(道)'도 무척 쉽고 간단하다. 스티브 잡스의 미니멀리즘, 구글의 검색 엔진은 쉽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체계는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혁신기술들이 처음 등장했을 때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가? 누구나 쉽고 편리하게 이용한다. 2500년 전 노자는 자신의 '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인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했지만, 오늘 날 실리콘밸리의 천재들에게 노자의 '도'는 그지없이 귀한 선물이 되고 있다. <<도덕경>>은 혁신에 무한한 영감을 주는 마르지 않는 샘"이라는 거다.
오늘 아침 가진 비를 맞고 있는 모과나무이다. 그래 안도현 시인의 모과나무를 공유한다. "모과나무는 한사코 서서 비를 맞는다." 모과나무는 "끝까지, 바로 그것, 그 푸른 것만 아니었다면/그도 벌써 처마 밑으로 뛰어들어왔을 것이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전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도'처럼, 그 모과의 향기는 기가 막히다.
모과나무/안도현
모과나무는 한사코 서서 비를 맞는다
빗물이 어깨를 적시고 팔뚝을 적시고 아랫도리까지
번들거리며 흘러도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비를 맞는다, 모과나무
저놈이 도대체 왜 저러나?
갈아입을 팬티도 없는 것이 무얼 믿고 저러나?
나는 처마 밑에서 비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모과나무, 그가 가늘디가는 가지 끝으로
푸른 모과 몇 개를 움켜쥐고 있는 것을 보았다
끝까지, 바로 그것, 그 푸른 것만 아니었다면
그도 벌써 처마 밑으로 뛰어 들어왔을 것이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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