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8월 10일)

오늘 아침도, 어제 이어, '마음 건강법'을 김기석 목사와 함께 생각해 본다.
김 기석 목사는 참된 삶이란 "나 스스로가 존귀해지는 게 아니고, 누군가에게 나를 선물로 내어줄 때 이루어지는 것"이라 했다. 왜냐하면 누군가의 이웃이 됨으로써 참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거다. 그리고 누군가를 품으려고 마음을 여는 순간 예기치 않은 생명의 힘이 생겨난다는 거다. 소크라테스는 당시 젊은이들에게 "숙고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The unexanined life is not worth living)"라고 말했다. 좀 더 자세하게 인용한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일은 언제나 탁월함에 대해 논하고, 자신과 이웃을 성찰하는 것이라네. 그리고 숙고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는 것이지."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참 인간이란
- 늘 탁월함을 생각하고,
- 자신과 이웃을 성찰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랍비 힐렐의 가르침은 "자기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말라"이다. 이를 우리는 '황금률'이라 한다. 예수의 황금률은 더 적극적이다.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그러면서 예수는 '하늘 나라'는, 내가 있는 이 시간과 이 장소에서 황금률을 실천할 때, 하늘 나라가 그 곳이고, 거기서 사랑을 받는 상대방이 바로 신이 된다고 주장한다. 여러 번, 자주 읽고 묵상할 내용들이다. 배철현 교수는 자신의 책 <<인간의 위대한 질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옆에 있는 낯선 자가 바로 신이죠. 낯선 자를 사랑할 수 있느냐가 예수의 가르침입니다. 그리스어로 '아가페'는 상대방이 사랑하는 걸 사랑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신의 사랑은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라는 단순하고 혁명적인 가르침이 인류를 감동시켰습니다."
성경에 ‘마음이 가난하면 복이 있나니’라고 했는데, 마음이 가난하다는 의미는, "매일 저녁 나의 능력과 특권과 재능과 학식을 가지고 약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위해 무얼 했는 가라고 자문하는 것"이라고 했던 피에르 신부의 말로 김 목사는 요약했다. 그러면서, 그는 "삶은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려는 마음을 통해 변화가 일어난다. 배고픈 이에게 따뜻한 밥 한끼 대접하고 싶은 마음에 밥 한끼를 금식하거나 그들을 위해 밥상을 차릴 때 우리 식탁은 성찬이 된다. 외로운 이의 벗이 되어주려고 분주한 일상의 한 부분을 잘라낼 때 우리의 남은 시간은 의미로 충만한 시간이 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비우면 비로소 세상이 보이고, 비우고 나면 다시 무언가 채워진다. 마음과 물질이 아닌 영혼 깊이 모두를 비워내다 못해 긍휼과 사랑으로 가난하게 되어야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 재물이 부자인 사람은 근심이 한 짐이고, 마음이 부자인 사람은 행복이 한 짐이다. "천국과 지옥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레오나르도 다빈치) 마음을 가난하게 하는 것은 세상을 소유하려 하지 않고 누리는 거다. 그리고 자연의 흐름에 맡기면서 무위(無爲)적 삶을 사는 거다. 마음이 가난 하려는 것은 존재 자세의 문제이다. 초조해 하거나 조급해 하지 않고 느긋하게 여유를 가지고 그 일 자체로 돌아가 즐기며 몰입하고 전념하는 하는 거다.
사람들은 종교를 '신을 향한 맹목적인 믿음'이라고 생각하지만, 종교의 진정한 의미는 자신의 삶에서 소중한 것을 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이다. 다시 말하면, 종교는 자신의 삶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이다. 그러니까 '무엇을 믿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 예수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 예수는 자신을 따라 다니던 유대인들에게 삶에 대한 성찰과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다른 세계, 다른 삶을 상상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이 속한 사회적 세계가 당연하게 여기던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종교의 본질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마음에 붙들어 매는 것인 동시에, 삶의 준거점을 욕망이 아니라 사랑에 두고 살도록 사람들을 인도하는 데 있다. 그러나 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이 중심이 된 성전 체제는 스스로 특권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사람들을 지배하려 했다. 그러면 신앙은 무거운 짐이 된다. 예수는 그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성전 체제와 대립했다. 십자가의 길이란 자기를 희생해서 남을 살리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주류 세계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주류가 만든 분리의 장벽을 철폐하고, 이 사람과 저 사람이 만나게 하는 것이다.”(김기석)
미사에 빠짐없이 참여하고, 그저 착하게 살면 되나? “기독교적 삶은 개인의 덕스러운 삶이나 윤리적 실천으로 고착 시킬 수 없다. 강도 만난 이웃을 돕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강도가 출몰하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일 또한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영국의 정치 사상가 에드문그 버크는 ‘악이 승리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은 선한 사람들의 침묵’이라고 했다. 세상은 우리에게 ‘가만히 있어, 조용히 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움직여야 하고 침묵을 깨뜨려야 한다.”(김기석)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친 것을 크게 다음과 같이 네 가지이다.
- 예수는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한 적도 없고, 그것을 믿으라고 강요한 적도 없다.
- 그는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그가 제자들에게 보여준 행동, 가난한 자들, 즉 고아, 과부 그리고 이주자들을 보살피고 배고픈 자들을 먹이고 헐벗은 자들에게 옷을 주라고 주문했다.
- 또한 학연, 지연에 얽매이지 말고 자신만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하늘의 새와 들판의 백합처럼 자연과 더불어 살며, 생명의 신비를 마련하고,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아버지-어머니 같은 존재인 신을 의지하라고 요구했다.
- 이렇게 살려고 결심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 그것이 피스티스, 즉 믿음이다. 이 믿음에 대한 기쁜 소식(복음)은 사회적으로 저명하거나 특권층 뿐만 아니라 창녀들과 고리대금업자들에게 전해야 하며, 자신만을 위한 사람이 아니라 내 이웃을, 더 나아가 내 원수까지도 아낌 없이 사랑하는 삶의 태도가 바로 믿음이라고 주장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개인의 안일한 행복을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우리 자신을 주님께 바치는 일이다, 그것은 평안한 길이 아니라 가시밭길이다. 그 좁은 길을 따라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다. 기본적인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이다. 부활을 믿는 것은 나는 패배할지 몰라도 그분은 패배하지 않는다는 든든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나를 던지는 것이다. 헤셀은 ‘믿음이란 하나님의 꿈을 나의 꿈으로 삼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해산의 고통을 감당하는 것’이라고 했다. 개인적인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믿음이 아니라, 더 큰 생명 속에서 포섭된 존재로서 든든함으로 이웃을 위한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믿음은 인간이 구축한 문명화와 문화를 지탱하는 힘이다. 믿음은 내가 사는 사회가 정상적이어서, 나를 악이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이다. 믿음은 나의 신실함을 보았던 동료가 소문에 의거하여 나를 의심하고 배척하지 않을 것이라는 바램이다. 서로 믿는 믿음의 세계가 구축되려면, 중요한 것이 서로 간의 분명한 소통이 보장 되는 언어가 있어야 하고, 그 언어로 뒤에서 뒷담화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보장되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의 신념 체계가 우연히 알게 된 것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는 일이다. 자기가 믿는 신념 체계가 유일하고 정당하고 옳은 체계라고 착각하면 문제가 되기 시작한다. 우리 사회가 다소 그러한 점이 있다. 그런 착각을 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신념을 고치려고 충고하고 질책하기까지 한다.
우리가 말하는 좌와 우의 문제도 그렇다. 자신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위치에 따라 자신의 세계관과 그 신념이 형성될 뿐이다. 예컨대, 1에서 10까지의 눈금이 있어, 내가 2에 있다면 1은 좌이고, 나머지 3-10은 우이다. 내가 9에 있다면, 1-8은 좌이고, 10은 우이다. 자신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위치에 따라 자신의 세계관과 그 신념이 형성된다. 그래서 우리는 공부하고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공부나 배움은 자신의 눈금을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이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세계관이 형성된 눈금이 중요한 만큼, 상대방에게도 그의 눈금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눈금을 깊이 파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그 눈금이 구속시키는 프레임이라면, 그것을 벗어 버리고 상대방 눈금의 위치를 알아차리고 역지사지하는 공감을 지닌 사람이다.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는 것/손병흥
주고 또 줘서 잃는 것 많을지라도
왠지 안타까워 애써 양보하고 싶은 마음
더 잘난 사람 비교는 커녕 매달려만 지는 것
비록 꿈꿔왔던 이상형 다를지라도
그냥 환상적 착각에 빠져 드는 것
끊임없이 주변 맴돌면서도
시침 뚝 떼고서 무표정 짓는 것
가끔씩 기다림에 지칠지라도
늘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사랑하는 순간임을 알게 해주는 것
누군가에게 큰 관심 갖게 해주던
새삼스레 믿음 주려고 노력하는 것
그 바람 같은 마음마저 머물도록
언약 가진 자의 축복인 냥
내가 믿어 줄 단 한 사람
때론 빗줄기에 흠뻑 젖어
삶의 고비고비마다 우수에 잠겨버려
크게 부족하고 많이 어긋날지라도
뭐 어때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하는
슬픔 외로움 허전함 달래 주던 포근함
마음 아파 괴롭고 미울지라도
되려 겸손과 감사함으로
더욱 더 성장케 해주던 영혼
닫힌 마음 활짝 열고서
늘 가득 채우게 해주던 그리움
조금 외롭더라도 간절히 원하는 그 마음
화해 손 먼저 내밀게 해주던 성숙된 사랑.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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