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8월 4일)

어제는 여러 번 바다에 나갔다. 파도라는 말의 한문을 처음 써보았다. '波濤' 사전적으로 '파도'는 '수면이 바람, 조류 등의 영향을 받아 출렁이며 밀려오는 기상 현상의 하나'이다. 오늘의 화두는 '파도처럼 인생에도 게으름과 탄생, 상실과 풍요, 회의와 확신이 나름의 속도로 온다'는 거다. 파도는 예상보다 깊게 파고들고, 더 멀리 밀려간다. 밀려갈 때는 영영 사라질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새 발 밑에 와 있다. 우리 삶에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없다.
<<바다로부터 얻은 작은 철학(petite philosophie de la mer)-한국어 번역판의 제목은 '모든 삶은 흐른다'>>를 쓴 로랑스 드빌레르는, 지구의 모든 바다 중에서도 유난히 특별한 바다, 사르가소(sargasso, '모자반'이라 불리는 해조류) 해를 '피해야 할 후회라는 덫'으로 사유하였다.
구글을 검색하니, 사르가소 해를 다음 같이 소개하는 글을 만났다. 북대서양의 3분의 2에 달하는 면적을 차지하는 사르가소해는 육지 경계가 없는 유일한 바다이다. 대신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는 4개의 강력한 해류만이 경계를 이루며 바다에 너무나 깨끗하고 따뜻하며 고요한 하나의 큰 영역을 조성하고 있다. 사르가소 해는 바다를 둘러싸고 있는 해류와 함께 표류한다. 이곳의 이름은 바다 표면에 풍성하게 자라나는 해초인 사르가숨(sargassum)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유일한 모자반 계열의 해조류(untethered seaweed)인 사르가숨은 긴 끈 형태를 띠는데, 작은 공기주머니를 달고 있어 바다 위를 떠다니닌다. 사르가숨은 뒤엉킨 나뭇가지 사이에 모여 자라며 조류, 어류 그리고 무척추동물들이 살아가는 다채로운 생태계를 조성한다. 저명한 해양 탐험가 실비아 얼(Sylvia Earle)은 이곳을 “금빛의 떠다니는 열대 우림”이라 불렀다.
로랑스 드 빌레르는 사르가소 해를 다음 같이 묘사하였다. "해안도, 바람도, 파도도 없는 바다이다. 겨우 바다의 행색만 갖추었을 뿐 넓고 큰 바다의 모습이 아니다. 비유하자면 사르가소의 바다는 움직임도, 밀려오는 파도도 전혀 없는 '해양 사막'이라고 할 수 있다. 사르가소의 바다는 문어발처럼 보이는 커다란 해조류로 금세 뒤덮이고 또 뒤덮인다"는 거다.
사르가소의 바다를 최초로 탐험한 사람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라 한다. 그는 해조류로 뒤덮인 이 바다에서 3주나 헤매며 제대로 된 항해를 하지 못했다 한다. 움직임 이라고는 전혀 없는 이 바다에 갇혀 있었다 한다. 지금도 바다사람들은 이 바다를 두려워 한다는 거다. 움직임이 전혀 없어 살아 있는 바다 라고는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바다 장어 떼가 허니문을 보내기 위해 수천 Km를 건너 이 이상한 바다에 온다는 거다. 그러나 허니문을 보내러 오는 장어 떼 이외의 생물들에게 사르가소 바다는 피하고 싶은 덫이다.
우리도, 살다 보면, 사르가소의 바다처럼 에너지와 희망을 잃어버린 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가 있다. 사르가소의 바다는 우리들의 삶에 비유하자면 '후회'와 같은 것이다. 후회에 사로잡히는 순간, 머리는 복잡해지고 행동은 느려진다. 그래서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고 정처 없이 서성이게 된다. 그래서 저자는 사르가소의 바다를 후회하는 우리들의 감정들이 길게 늘어져 있는 바다로 비유한다.
'그때 그랬어야 했는데',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라는 후회를 하다 보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계속 이렇게 후회만 하고 있으면 이미 지나간 행동과 놓쳐버린 기회에 대한 미련만 느낄 뿐, 현실 속에서는 꼼 짝도 하지 못한다. 앞으로 가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만 걷다가 끝없이 상실과 실패만 곱씹게 된다. 이러한 후회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그저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사막을 건너려면 그저 묵묵히 걷고 걸어서 건너는 수밖에 없다. 어쨌든 걸어야 한다. 쓸데 없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후회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자책을 확신과 믿음으로 바꿔야 한다. 살아오면서 시행착오를 거친 과거의 순간을 앞으로 나아갈 길로 만드는 거다. 그러면 과거의 일은 내 인생의 오점이 아니라 한 페이지가 될 뿐이다. 애써 눈을 감고 부정하거나 억지로 변명을 찾지 말고 부족했던 점을 인생의 시나리오 안에 포함시켜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면 그 뿐이다.
배철현 교수는 자신의 칼럼에서 '오늘'이란 시간을 후회 없이 지내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를 물으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최선의 삶을 위해 나에게 주어진 오늘은 일상(日常)이다. 내가 그 일상을 응시해 최선을 발견한다면, 그 일상은 특별한 일상인 비상(非常)이 된다. 만일 내가 그 일상을 방치하거나 흘려 보내면, 그 일상은 진부(陳腐)가 된다." 비상과 진부의 차이, 그거 참 크다.
비상이란 내 안에 숨겨진 천재성을 작동시키는, 나를 몰입시키는 위급(危急)이다. 인간은 위급한 상황에서 자신도 모르는 힘을 발휘한다. 반면 진부란 자신이 무엇을 지녔는지 모르는 상태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고기(肉)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고기를 소화해 에너지를 만들지 않는다. 그가 하는 일이란, 그 고깃덩이를 타인에게 진열(陳列)하는 자랑하는 일이다. 고기는 서서히 부패(腐敗)한다. 그는 서서히 진행되는 부패의 악취에 취해, 자신의 몸에서 고약한 냄새가 밴 줄 모르고 자신도 모르게 부패한다.
이젠 지난 일들을 후회하지 말아야 한다. 내 인생의 여정은 후회의 총집합도, 죽을 정도로 무겁고 버거운 일도 아니다. 내가 실제로 항해하는 수많은 길 중의 하나이다. 그러니 내 일상을 내가 주인이 되어 지배해야 한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어 자신의 삶을 이끌 때 변화한다. 주인이 된다는 것은, 현재의 자신을 응시하고, 그런 자신에서 유기해야 할 군더더기를 제거하고, 장려해야 할 장점을 찾아 일깨우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 응시를 하루의 가장 중요한 임무로 여긴다. 자신의 실존적인 위치를 정확하게 판단해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그 하나'를 끊임없이 찾아간다. 그는 그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희생할 수 있다.
그래도 오늘 시처럼, 나에게도 "뼈아픈 후회"가 있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언제 다시 올 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 거다/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하루의 해가 지는 바다가 알려 주었다. 류시화 시인의 담벼락에서 "지음(知音)"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음악을 이해한다는 뜻의 '지음'은 마음이 서로 통하는 벗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당신에게는 지음이 존재하는가? 혹은 당신은 누군가의 지음인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관계는 나의 '음'을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처음 만났는데도 내 마음의 '음'을 아는 사람, 마치 몇 생을 알고 지낸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을. 이유도 모른 채 바로 마음이 연결되는 사람, 무슨 말을 할지 말하기도 전에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을. 지음은 단순히 비슷한 성격이나 취미를 가진 것을 뛰어넘어 영적 유대감으로 이어져 있으며, 정신적, 정서적, 영적 차원에서 동일한 감수성과 파동으로 공명한다. 태어나기 전에 선택한 가족이 더 이상 자기 운명의 실현을 지원하지 않는다면 내 마음의 음을 아는 사람을 찾기에 언제라도 늦지 않다. 최악의 일은 혼자 삶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혼자라고 느끼게 만드는 사람들과 삶을 보내는 것이다. 자신의 음, 특히 영혼의 음을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삶이 가져다 주는 행운이고 축복이다. 나의 ‘음’이 불협화음이 아니며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님을 확인해 주는 이, 그래서 아직은 미숙하고 불안정한 나의 음에 힘과 마법이 깃들게 하는 이가 나의 지음이다." 그런 지음을 만나려 하지 않은 것이 나의 "뼈아픈 후회"이다.
뼈 아픈 후회/황지우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 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
뿌리 드러내고 쓰러져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 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리는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고열(高熱)이
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 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도덕적 경쟁심에서
내가 자청(自請)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나를 위한 희생, 나의 자기 부정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알을 넣어주는 바람 뿐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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