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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크라켄(Kraken)

2435.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 8 3)

<보령머드축제> 당번으로 왔다. 바다를 실컷 보고, 해변을 맨발로 많이 걸었다. 우리나라 해변과 프랑스 해변의 차이는 도서관이 있고 없고로 구별된다.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엔 도서관이 있다 한다. 내가 굳이 책을 싸 가지 않아도 해변에서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거다. 대한민국은 굳이 도서관을 찾아가야 하고 그나마 있는 도서관에 대한 지원도 줄이겠다는 목소리가 늘 들려오는 나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몰릴 만한 곳이면 거기가 어디든 임시로라도 도서관을 설치해 사람들에게 읽을 수 있는 구조와 환경을 자연스레 만들어 두는 나라가 프랑스이다. 우리나라 해변은 카페나 술집이나 편의점이나 횟집들 뿐이다.

 

대천해수욕장은 바다와 고은 모래사장으로 아름다운데, 무분별하게 늘어선 조개구이집, 편의점 그리고 모텔인지 호텔인지 하는 것들로 무질서하다. 불편함을 인식하게 것은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의 글을 읽고서 이다. 그의 말을 공유한다. "강릉에 살며 해변에 자주 간다. 바다는 예쁘고 해변에선 필요한 무엇이든 구매할 수 있다. 그러나 ‘책 읽는 해변’이란 네이밍을 상상해 본 일은 없었다. 보여주기 위해 무언가 짓고 책을 가져다 두고 사업으로 소개하고, 그런 것 말고, 어느 해변에 가든 작은 임시도서관이 있어 거기에서 아이들과 함께 책을 빌려 읽는 일이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됐으면 한다. 우리 주변 어디에나 책이 있으면 좋겠다. 읽고 안 읽고는 중요한 게 아니다. 그저, 어디에든 책이 있는 환경을 조성해 두는 게 선진국이고 선진도시 아닌가?"

 

그런 분위기에서, 철학자는 <<바다로부터 얻은 작은 철학(petite philosophie de la mer)-한국어 번역판의 제목은 '모든 삶은 흐른다'>>를 있는 거다. 오늘 아침은 책을 다시 꺼내, "새로운 지식으로 편견 부수기"라는 소제목이 달린 "크라켄" 이야기를 공유한다. 크라켄(Kraken)은 신화 속의 거대한 바다괴물로,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의 해안에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몸집과 잦은 출현으로 다양한 문학 작품에서 크라켄을 일반적인 바다 괴물의 표본으로 삼았다. 크라켄은 촉수가 있으며 13~15m 크기로 추정되는 대왕오징어 혹은 콜로살오징어에서 유래되었다고 추정된다. 크라켄은 평소에는 깊은 바다 속에 살지만, 이따금 수면 위로 올라와 배를 공격한다고 전해진다.

 

대규모의 해양 탐험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미지의 지역들이 용들이 사는 곳으로 상상되곤 했다. 알려진 지도 경계선을 넘어가면 아직 탐험이 이루어지지 않은 지역들이 존재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무지는 공포를 낳는 법이다. 모르는 곳을 내기 어려웠던 사람들은 머리를 짜서 그럴듯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만들었고, 거기에 바다 괴물들이 쓸모 있는 도구가 되었다. 게다가 실제로 독차지 하고 싶은 보물 같은 낚시 지역이 있다면 경쟁을 막고 함부로 탐험하며 가지 못하게 무서운 바다 괴물들이 살고 있다고 겁을 주면 통하지 않겠는가? 위험한 동물들이 득실대는 바라라고 말이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그런 곳이 있다고 오랫동안 굳게 믿게 되었다.

 

자연이 비어 있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인간은 모르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인간은 모르는 곳에는 무섭고 위험한 괴물들이 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항해를 때는 오히려 새로운 것을 발견할 있다는 열린 마음으로 미지의 성역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엉뚱한 상상으로 괴물들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편견과 왜곡된 생각에 갇혀버리면 세계관이 좁아지고 단순해지기 때문이다.

 

그런 경계를 넘게 해주는 것이 호기심이다. 덕분에 우리는 편견을 극복할 있다. 우리는 몸을 사리며 산책하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곳만 때가 많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반복하고 그것에 안주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모험을 떠나 새로운 지식과 만나야 한다. 기존에 알고 있던 것을 다르게 알아야 하고, 아직 가보지 않은 곳에 있어야 한다. 기존에 품고 있던 생각에 함몰되지 않은 계속해서 의심하며 편견을 깨고 움직여야 한다.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 너무 빨리 확신하고 답을 정해 버린다. 모든 것이 편견으로 발전해서 우리를 가두는데, 우리는 이를 안전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모르는 많다는 받아들이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기존에 가졌던 안전한 확신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발견해가겠다는 생각을 하게 것이다. 무엇인가를 새로 알아가게 되면 호기심의 불꽃은 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활활 타오른다. 실제로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새로운 것을 발견하려는 욕구가 커지는 것이다. 선회(旋回)라는 말이 있다. 문화는 선회에서 시작된다.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은 문화적이라는 점이다. 문화를 글자 그대로 보면 '무엇인가를 만들어서 혹은 그려서(文) 변화를 야기(化)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변화를 더 잘 야기하는 인간일수록 더 인간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변화를 야기하는 동력을 흔히 창의력이라고 한다. 창의적 도전은 집단적으로 함께 내달리던 정해진 방향에서 급선회하던 바로 그 지점이다. 전진(前進)하다 역진(逆進)하는 사람은 두 방향을 다 경험하지만, 이 경험의 여정에는 전진과 역진이 교차하는 신비한 지점이 탄생할 수밖에 없다. 이 지점이 바로 문화적이고 창의적이며 인간적인 활동의 시작이다. 이게 인문 정신을 가진 자들의 활동이기도 하다.

 

과거 아프리카의 타조 사냥이야기를 하고 싶다. 타조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계속 쫓는다. 그러면 타조와 쫓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유지되는 일정한 간격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존재하게 되는데, 쫓고 쫓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쫓기는 쪽의 긴장감은 커지기만 한다. 타조가 쫓기고 쫓기다가 간장감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지면 도망가는 것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서서 머리를 뜨거운 모래땅에 처박는다. 사람들은 그냥 가서 꼼짝 않고 대가리를 박고 있는 타조를 잡아오면 되었다. 타조들은 다 그래왔다. 그리고 또 다른 타조들도 그렇게 잡혀 죽을 것이다. 그런데 한 타조가 다른 타조들을 따라서 머리를 처박지 않고 무리에서 이탈하여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쫓아오는 사람들을 노려보는 일을 저질렀다.  DNA에 박혀 있는 일정한 방향을 지키다가 돌발적으로 선회(旋回)하여 습관적이고 집단적으로 공유하던 방향을 혼자서 바꾼 것이다. 모든 타조들과 공유하던 언어와  문법들에서 이탈하여 친구 하나 없는 곳으로 스스로 던져진다. 탈주한 것이다.

 

인간과 세계 사이에서, 인간은 타조처럼 쫓기고, 세계는 인간을 쫓아간다. 그러니까 세계는 인간에게 항상 무엇인가 반응을 강요한다. 우리 삶은 모두 그 강요에 대한 나름대로의 반응일 뿐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타조이고, 타조를 쫓아가는 사람들은 인간에게 반응을 강요하는 세계 전체로 비유된다. 이때 선회는 도전이고, 여기서 필요한 것이 용기이고, 그 결과로 변화가 일어나면 새로운 문화가 생긴 것이다. 문화적 삶의 시작은 과거의 답습(踏襲)이 아니라, 탈주하는 것이다. 내내 쫓기기만 해왔던 무리에서 이탈한 어떤 한 타조가 뒤를 돌아보고 갑자기 이전에는 있어 본 적이 없는 전혀 다른 반응을 시도했다면, 이것이 바로 새로운 도전이다. 일단 되돌아보면(선회하면), 그 이전의 관행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 시도될 것이고, 그것은 세계에다가 이전에 있어본 적이 없는 어떤 무늬를 그리게 될 것이다. 문화적 활동의 결과를 수용하던 타조가 주도적으로 문화적 활동을 하는 타조로 변했다. 창의적인 타조가 된 것이다.

 

탈주한 타조처럼, 창의적인 인간은 매일 자신만의 지도 위에서 새로운 곳에 관심을 많이 기울이는 연습, 같은 바다만 알고서 끝내지 않고 새로운 바다를 수집하듯이 즐겁게 탐구하는 연습을 있다. 이미 증명되고 나와 있는 답에 안주하지 말고 우리의 시야와 탐구 분야를 넓혀보아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아는 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사실부터 인정하는 법을 배워야 것이다. 탐험은 위험한 곳을 찾아가는 매우 무모한 행동이고, 모험은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다. 둘 다 위험과 접촉하는 일이다. 우리는 위험한 것들은 다 이상하다고 보고,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편안하고 안전하다. 그러나 익숙지 않고 아직은 이름 붙지 않은 모호한 것들에 대해 우리는 불편해 한다. 안정과 익숙함은 가깝고, 불안은 생경함이나 모호함과 가깝다.

 

탐험가나 모험가는 익숙함을 답답해 한다. 모험은 불안을 감당하는 용기를 발휘해서 생경한 세계에 도전하고, 그곳을 사람이 살 수 있는 터전으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영토를 확장해 준다. 그러니까 모험은 새로운 세계를 여는 데 필수불가결한 행위가 된다. '안다'고 하는 것이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르는 것으로 넘어가려고 발버둥치는 그 행위'까지를 포함해야 비로소 의미가 있다. 모르는 곳은 알려지지 않은 곳이고, 불안의 장소이자 위험한 곳이다. 그러나 바로 더 나은 곳이자 새로운 곳이기도 한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용기이다. 용기가 없으면 더 나은 곳으로 건너가려는 모험심이 사라져 현상을 지키는 기능주의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예컨대, 방송은 시청률에, 대학은 취업률에 등등 빠져 새로운 세계를 열지 못한다. 더 나은 곳에서 새롭게 살고 싶으면 더 모험적이고 무모하고 과감하고 거칠어야 한다.

 

나이는 마음의 상태일 뿐이다. 물리적 나이가 청춘 이어도 마음이 늙어 있으면 늙은 것이고, 마음이 나이가 장년기에 접어들었 어도 어린이와 같은 천진난만함과 호기심을 유지하고 있다면 아직은 청춘이라고 규정한 시가 있다. 오늘 그걸 공유한다.

 

 

청춘/사무엘 울만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장미 빛 뺨, 앵두 같은 입술,

하늘거리는 자태가 아니라,

강인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는 열정을 말한다.

 

청춘이란

인생의 깊은 샘물에서 오는 신선한 정신,

유약함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를 뿌리치는 모험심을 의미한다.

 

때로는 이십의 청년보다

육십이 된 사람에게 청춘이 있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우리가 늙는 것은 아니다.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 것이다.

 

세월은 우리의 주름살을 늘게 하지만

열정을 가진 마음을 시들게 하지는 못한다.

고뇌, 공포, 실망 때문에 기력이 땅으로 떨어질 때

비로소 마음이 시들어 버리는 것이다.

 

육십 세이든 십육 세이든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는 놀라움에 끌리는 마음,

젖먹이 아이와 같은 미지에 대한 끝없는 탐구심,

삶에서 환희를 얻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법이다.

 

그대와 나의 가슴속에는

남에게 잘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간직되어 있다.

아름다움, 희망, 희열, 용기

영원의 세계에서 오는 힘,

이 모든 것을 간직하고 있는 한

언제까지나 그대는 젊음을 유지할 것이다.

 

영감이 끊어져 정신이 냉소라는 눈에 파묻히고

비탄이란 얼음에 갇힌 사람은

비록 나이가 이십세라 할지라도

이미 늙은이와 다름없다.

그러나 머리를 드높여

희망이란 파도를 탈 수 있는 한

그대는 팔십 세일지라도

영원한 청춘의 소유자인 것이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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