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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긍휼(compassion, 또는 mercy)과 환대(hospitality)가 절실하다.

236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5월 23일)

 

격주로 계룡산 자락의 하신리로 와인 강의를 간다. 오늘 아침 사진이 정원의 테이블에 놓인 작약의 일종이다. 작약은 모란과 구별하기 쉽지 않다. 햇살 좋은 테이블에 잠깐 앉자 조영남의 <모란 동백> 노래가 기억났다.

 

모란동백 - 조영남

 

 

모란동백/이제하 작사 작곡, 조영남 노래

 

모란은 벌써 지고 없는데

먼 산에 뻐꾸기 울면

상냥한 얼굴 모란 아가씨

꿈속에 찾아오네

 

세상은 바람 불고 고달파라

나 어느 변방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나무 그늘에

고요히 고-요-히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동백은 벌써 지고 없는데

들녘에 눈이 내리면

상냥한 얼굴 동백 아가씨

꿈속에 웃고 오네

 

세상은 바람 불고 덧없어라

나 어느 바-다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모랫벌에

외로이 외로이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동-백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찻집은 온통 꽃들이다. 꽃이 찬란한 것은 늙지 않기 때문이다. 필 때 다 써버리기 때문이라 한다. 꽃의 피 속에는 주름과 장수의 유전자가 없고, 말과 분별이 없기 때문이라 한다. 눈부신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찬란한 착란이다.

 

'나의 노년은 피어나는 꽃입니다. 몸은 이지러지고 있지만 마음은 차오르고 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문장이다. 늘, 지금을 탕진하는 것들은 황홀한 향기를 내뿜는다. 태양이 저물 때도 황홀한 이유다. 꽃 중의 꽃이라는 모란과 장미가 봄의 황혼을 향기롭게 하는 이유다.

모란은 꽃 중의 왕이다. 예로부터 부를 상징한다고 여겨 귀하게 여겨왔다. 모란과 작약을 구별하기 힘들다. 모란은 목단(牧丹) 화왕(花王), 부귀화(富貴花) 등 다양한 이름이 있으며, 작약과 비슷한 나무라는 뜻으로 목작약(木芍藥)이라고도 한다. 작약은 크고 탐스러운 꽃이 함지박처럼 넉넉하다고 해 '함박꽃'이라고도 부른다.

 

모란은 낙엽 관목이고, 작약은 다년생 풀이다. 나무인 모란은 나뭇가지 끝에서 새순이 돋지만, 풀인 작약은 땅 속에서 붉은 싹을 틔운다. 나무인 모란과 달리 작약은 에서 붉은 알뿌리 한 포기에 여러 개의 줄기가 나와 곧게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겨울이 되면 나무인 모란은 잎이 떨어진 가지가 남아 있지만, 풀인 작약은 뿌리만 남고 줄기를 찾아볼 수 없다. 모란의 개화 시기 4-5월, 작약의 개화 시기는 5-6월이지만, 요즈음은 동시에 꽃을 피우는 경우도 많다.

 

모란과 작약을 구분하기 가장 쉬운 방법은 잎 모양이다. 모란은 잎에 윤기가 없으며 잎이 오리발처럼 세 갈래로 나뉘어 있다. 반면 작약은 잎이 코팅한 것처럼 윤기가 흐르고 갸름하며 줄기에서부터 잎이 나누어진다. 

 

다양한 작약을 만난 찻집 이름이 <메르시merci)>이다. 프랑스어로 'merci(메흐시)' '감사하다' 인사로 많이 쓰이지만, 뜻은 원래 '감사' 또는 '자비', '연민', '긍휼'이라는 말이다. 영어로는 'mercy' 한다. 세계에 진입하려면, 공감 능력을 넘어서야 한다. 어제부터 우리는 공감능력과 자비능력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오늘도 이야기를 이어간다.

 

공감(empathy)은 상대의 정서를 이해하는 인지적 수준의 감정이다. 슬픈 영화를 보면 슬픔을 이해하고 슬퍼하지만, 곧 바로 웃기는 장면으로 장면이 전환되면 방금 슬퍼했다는 사실을 잊고 웃을 수 있는 능력이다. 공감능력이 있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이 웃어야 할 상황인지 울어야 할 상황인지를 분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공감능력이 없는 사람보다 공감능력이 있는 사람이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동참할 개연성이 높지만 공감은 일관된 행동에 대한 전제가 없는 단순한 인지적 역량이다.

 

그러니까 공감은 상대가 가진 아픔이나 기쁨을 인지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일 뿐이다. 공감은 상대의 고통을 인지하기는 하지만,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지적을 들어왔다. 설사 공감이 행동으로 이어진다 하더라도 공감이 이끄는 행동은 아픈 사람들에 대한 일방적이고 시혜적인 위로(sympathy) 정도이다. 그러니까 공감이란 단순히 타인의 감정을 동일하게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처한 상황과 관점을 이해할 수 있는 지적 해석이 동반되는 과정일 뿐이다. 전자를 정서적 공감 능력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인지적 공감 능력이라고 한다. 그러나 공감 능력이 있다고 해서 위로를 넘어 고통의 문제를 원인의 수준에서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혁신적인 행동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공감은 이기적이거나 상업적 목적으로 쉽게 전용 된다. 물론 상대방의 정서적 상태를 이해하는 공감이 원활한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 데 기본이다. 자신의 의견을 다른 사람에게 개진 시켜서 받아들이게 해야 하는 리더들도 과거에는 그냥 직책으로 밀어붙였다. 지금은 그런 리더십을 행사한다면 '갑 질'이 된다. 따라서 최소한 공감을 통해 정서적 상태를 파악한 후, 상대의 정서에 맞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해야 한다. 아랫사람이 의견을 받아들였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광고 회사가 이용하는 것이 고객의 감성을 자극하는 공감이라는 "설탕 코팅"(윤정구)을 통해서 이다. 고객이 광고 회사의 스토리로 설탕 코팅된 제품을 샀다고 해서 이 제품의 품질과 가격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들에 지불된 과대 광고 비용은 가격을 낮추거나 품질을 개선하는데 들어갔어야 할 비용이다. 고객은 설탕 코팅 된 제품을 비싸게 사는 꼴이 된다.

 

유발 하라리는 4차 산업혁명 시대 필요한 것은 공감 능력이라 말했다. 인간에게 생존 력을 부여한 것은 기술, 지식이었을 지 몰라도 교감이 없었다면 제대로 작동하거나 정교해지지 못했을 것이라는 거다.  그는 초연결 시대에 필요한 것이 '감정 지능(Emotional intelligence)'과 '마음의 균형(mental Balance)'이라고 주장했다. 경영 활동은 조직 간, 혹은 조직 내 인간의 상호 교류와 교감 속에 이뤄진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제까지 인간의 감정을 배제한 제도를 구축하고 의사 결정을 내렸다는 거다. 인간 감정의 맥락을 배제한 호모 이코노미쿠스(감정이 없고 정확하고 논리적인 경제적 동물)의 눈으로는 애초 보이지 않는 문화를 규정하기도, 논하기도 어렵다고 보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조직을 구성하는 감정을 가진 주체와 교감하고 서로 공감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 단순한 명제를 이해하고, 이행하는 것에서 성공이 씨앗이 싹틀 수 있다는 유발 하라리의 주장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는 한국 엘리트들이 환대는 커녕 공감 능력마저 부족하다는 거다. 특히 "[현] 정부 관료들의 공감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이태원 참사, 화물연대 파업, MBC사태 등에 대응하는 방식에 국민들은 “공감력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진다”고 말한다. 공감능력이 부족하면 당연히 소통과 협치 능력도 제한되며, 그래서 들이댈 수 있는 무기가 바로 ‘법과 원칙’이다. 이 과정에서 대화 단절과 투쟁이 뒤를 잇는다. 대화와 이해가 필요한 사람들, 특히 자신의 노동을 갈아 넣어야 겨우 기본적인 생활이 유지되는 사회적 약자층에 대해서조차 공감과 연대 대신에 ‘법과 원칙’이 작동한다." 서울대 교육학과 한숭희 교수의 주장이다.

 

공감능력은 ‘함께 살아가는 능력’의 핵심이다. 미국의 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다음 말이 잘 말해준다. “공감한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처지가 되어 보는 것이다. 우리와 다른 사람의 눈으로, 배고픈 아이의 눈으로, 해고된 철강노동자의 눈으로, 기숙사를 청소하는 이민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일이다.” 그런데 왜 한국 사회는 엘리트일수록 공감 능력이 부족할까? 그 답을 한 교수로부터 들어 본다.

 

"권력 엘리트들이 처음부터 공감능력 결핍이라는 DNA를 가지고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태생적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면 누구나 공감능력을 학습할 수 있다. 다만 양육과 성장, 교육과 경험 속에서 타자를 이해해야 할 필요성 혹은 상황에 노출되지 않도록 ‘관리'되었을 뿐이다. 청년 전기까지 이어지는 십 수년의 과잉 경쟁 속에서 아이들은 학교성적을 올리는 데 공감능력이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사회적 관계로부터 고립시켜 공부에 집중하도록 한다. 이 과정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학생들이 입시에 성공하고 엘리트 계층의 반열에 들어선다. 결국, 한국 엘리트들의 공감능력 부족은 과잉경쟁이라는 시대상황이 만들어낸 창조물이다. 그러한 학습경험의 결핍은 그대로 공감능력의 결핍을 낳는다." 좋은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함께 사는 능력(공감-친교-협동)의 성장을 억제해야 한다는 것이며, 입시생을 둔 부모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한숭희 교수는 공감 학습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유네스코가 강조해왔던 ‘함께 살아가는 능력을 학습하는 일(tolearntolivetogether)’은 모든 학교교육과 평생학습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함께 사는 능력’은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가장 중요하게 학습되어야 할 역량이다. 어릴 때 그나마 가지고 있던 사회적 연대와 공감, 공존의 능력을 갈수록 퇴화 시켜가는 학교체제와 방식에 대한 대대적인 수술이 필요하다. 공감 학습은 정서와 인지, 상황과 맥락을 넘나드는 범경계적 학습을 필요로 한다. (…) 공감학습을 위해서는 마음과 머리가 모두 필요하다." 오늘 만이라도,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공유된 마음’을 갖고 싶다. 공감 학습을 위해.

 

 

그러나 문제가 있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이점을 윤정구 교수는 잘 설명하고 있다. "경기가 좋을 때는 공감능력만 있어도 최소한 소통에서는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설정한 목표를 받아들이게 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경기가 꺾이고 여기서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쌓여 구더기가 생겼고 이 구더기가 무서워 누군가가 거적을 덮어논 상태다. 고통의 상처에 구더기가 파고들기 시작해서 고통의 문제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고통의 문제의 원인을 찾아서 원인의 수준에서 근본적으로 치유하지 않는다면 재앙이 덮치는 것은 시간문제다. " 이런 상황에서 공감을 대신하는 개념인 긍휼(compassion, 또는 mercy)  환대(hospitality)가 절실하다. 이게 오늘 인문 운동가의 화두였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