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1.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4월 30일)

4월을 이젠 버리고, 변화의 5월을 맞이한다. 이것 저것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은 데, 이젠 선택과 집중을 할 때이다. 바꾸고 변화를 하여야 할 때이다. 이 변화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주역>>떠오른다. <<주역>>의 핵심은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易, 窮則變, 變則通, 通則久, 역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이다. "역(易)"은 흐름 바꾼다는 거다. 여기서 '궁하다는 것'은 사물의 변화가 궁극에 이른 상태, 즉 양적 변화와 양적 축적이 극에 달한 상태를 말한다. 그런 상태에서는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거다. 그 질적 변화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거다. 이게 통(通)인 거고 닫히는 것이 아니라 열리는 상황이다. 그러니까 '개신(開新)'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久, 영원)'라 할 수 있는 거다.
고 신영복 교수는 <<주역>> 사상을 한마디로 하면, "변화"라 했다. 변화를 읽음으로써 고난을 피하려는 '피고취락(避苦取樂)의 현실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변화를 사전에 읽어 냄으로써 대응할 수 있고, 또한 변화 그 자체를 조직함으로써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도 있는 거다. 우리의 삶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조직한 관계망이다. 선택된 여러 부분이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조직된 것이 자신의 일상이다. 그러니 우리는 성찰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맺고 있는 관계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서 성찰은 자기 중심이 아니다. 시각을 외부에 두고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다. 자기가 어떤 관계 속에 있는 가를 깨닫는 거다.
이러한 관계에 필요한 것을 <<주역>>은 절제와 겸손이라 말한다. 여기서 절제와 겸손은 자기가 구성하고 조직한 관계망의 상대성에 주목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겸손은 자기를 낮추고 뒤에 세우며, 자기의 존재를 상대 화하여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 배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절제는 자기를 작게 가지는 것이다. 주장을 자제하고 욕망을 자제하고, 매사에 지나치지 않도록 하는 거다. 그러면 부딪칠 일이 없다.
그런 터닝 포인트를 잡으라고, 4월이 가고, 5월이 오는 거다. "4월이 그렇게 떠나고 나면/눈부신 오월이 아카시아 향기로/다가"온다. 꽃잎이 다 진다 해도 연초록 속 깊어 가는 푸른 사랑, 다시 5월이 온다.
4월이 떠나고 나면/목필균
꽃들아, 4월의 아름다운 꽃들아.
지거라, 한 잎 남김없이 다 지거라
가슴에 만발했던 시름들
너와 함께 다 떠나버리게
지다 보면
다시 피어날 날이 가까이 오고
피다 보면 질 날이 더 가까워지는 것
새순 돋아 무성해질 푸르름
네가 간다 한들 설음 뿐이겠느냐
4월이 그렇게 떠나고 나면
눈부신 오월이 아카시아 향기로
다가오고
바람에 스러진 네 모습
이른 아침, 맑은 이슬로 피어날 것을
<<주역>>을 잘 모르지만, <<주역>> 독법에서 가장 먼저 설명 해야 하는 것이 '위(位)'라 한다. 즉 '자리'이다. <<주역>>은 효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경우를 ‘득위(得位)’라 하고, 잘못된 자리에 가 있는 경우를 ‘실위(失位)’라고 한다. '득위'는 아름답지만 '실위'는 위태롭다. <<주역>>의 핵심은 관계론이다. '길흉화복'의 근원은 잘못된 자리에서 비롯된다고 봤다. 내가 있는 '자리', 즉 '난 누구, 여긴 어디'를 묵상하며 알아야 한다는 거다. 단순히 어떤 '직위(職位)'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우주 속에서 나의 위치까지 확장되는 용어이다. 한문으로 하면 '위(位)'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득위'는 만사 형통이지만, '실위'는 만사 불행의 근원이다. 잘못된 자리는 본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불행하게 한다. 고 신영복 교수는 자신의 책, <<담론>>에서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처하는 경우 십중팔구 불행하게 된다. 제 한 몸만 불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에 빠트리고 일을 그르친다”고 하면서, 우리들에게 자기 자신보다 조금 모자라는 자리, ‘70%의 자리’를 권하였다. 이게 '득위'의 비결이라는 거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 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 주장을 '그릇 론'이라 한다. 우리 사회의 리더들이 알았으면 하는 것들이다.
신용복 교수에 의하면, “30 정도의 여유, 30 정도의 여백이 창조의 공간이 된다”고 했다. 반대로 70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0의 능력을 요구 받는 자리에 가면 어떻게 될까? “그 경우 부족한 30을 함량 미달의 불량품으로 채우거나 권위로 채우거나 거짓으로 채울 수밖에 없다.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그 자리도 파탄 난다.” 또한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자리와 관련해 특히 주의해야 하는 것은 권력의 자리에 앉아서 그 자리의 권능을 자기 개인의 능력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동아시아 철학의 관계론이기도 하다. 동아시아에서는 자기의 능력을 키우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먼저 자기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걸 강조한다. 개인의 능력은 개인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인이 발 딛고 있는 위치(난 누구, 여긴 어디)와 관계 속에 생성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주역>>에서 그 다음 중요한 개념이 '응(應)'이다. '위'의 개념이 개별 단위의 관계로 개인적인 관점이라면, '응'은 개체와 개체가 이루어 내는 관계 론으로 사회적 관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위치(位)를 잃었더라도 '응'을 이루고 있다면 허물이 없다는 거다. 예컨대, 집이 좋은 것보다 이웃이 좋은 것이 훨씬 더 큰 복이라는 거다. 산다는 것은 곧 사람을 만나는 일이고 보면, '응'의 문제는 중요한 거다. 직장도 직장 동료들이 좋은 곳이 좋은 직장이다. 우리의 삶을 저변에서 지탱하는 인간 관계와 신뢰가 바로 '응'의 내용이다.
이런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가, 최근에 나는 <주역>>의 "화수미제(火水未濟)"라는 괘를 알게 되었다. " 화수미제" 괘는 64괘의 제일 마지막 괘라 한다. 먼저 "화수미제"는 상괘(上卦)가 이괘(☲)이고 하괘(下卦)가 감괘(☵)이다. 불이 위에 있고, 물이 밑에 있어, 불은 뜨거우니 위로 올라가려 하고, 물은 차가우니 내려가려 하니 불안정한 상태이다. 그러나 <<주역>>의 풀이는 여우가 물을 건널 때, 꼬리가 아직 강물에 있거나 혹은 꼬리가 젖은 상태로, 아직 마무리가 안 된 미제(未濟) 상태이니 방심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아니면 음양 균형(짧은 막대-음-, 긴 막대-양-가 밑에서부터 위로 음-양-음-양, 이런 식으로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그래 불균형을 바로 잡기위해 노력하면 오히려 발전 가능성이 있는 괘로 해석한다. 한 마디로 단도리와 마무리를 잘하라는 괘이다. <<주역>> 64개의 괘 중 첫 번째는 "황룡유회"이다. '오를 대로 올라간 용에게는 후회가 있다, 즉 뭔가 일이 잘되고 앞으로만 나아갈 때 뒤도 돌아보고, 아래도 내려다보라는 가르침이다. 마지막 괘, "화수미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완의 상태'를 말한다. 현재는 어려운 상태에 있더라도 중도에 포기하지 말고 노력하면 좋은 때가 온다는 고난 극복의 메시지이다.
다시 말하면, "화수미제(火水未濟)"의 괘는 물과 불이 상극으로서, 영원히 해결되지 않고 대립을 반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비하면, "수화기제(水火旣濟)"의 괘는 "화수미제"와 반대인 경우이다.주역의 제 63괘인 "수화기제"는 상괘(上卦)가 감괘(☵)이고 하괘(下卦)가 이괘(☲)이다. 이괘는 선천의 물같이 차가운 기운이 후천에서 뜨거운 불의 기운으로 바뀌는 것이니, 만사가 저절로 해결되는 형국인 것이다. 재미있게도 『주역』의 마지막 괘는 ‘음주’를 언급하는 것이다. 우리 전통의 음주 습관은 성실하게 절제하면서 음양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우주를 관조하는 것이라 한다. 세상 만사는 음양과 오행의 변화로 빚어지는 것인데, 그것을 어떻게 운용하고 정확한 형국을 이해 하고 풀어가느냐에 성패가 달린 것이다.
술이란 말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여러 주장이 있다. "술술 잘 넘어간다고 해서 술이다." "술시(戌時, 19시-21시)에 마시면 맛있다." 등이다. 그러나 여러 문헌을 살펴보면, ‘술’이란 말에서 우리 훌륭한 ‘네이밍(naming, 이름 짓기) 기술을 지닌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술은 원래 ‘물 모양을 가진 불의 성격의 물체’를 뜻하는 ‘수불’에서 시작되어, “수불”, “수불”하다가 간단하게 ‘술’이 되었다는 것이다.
술과 같이 제주는 불과 물의 투쟁으로 이루어진 섬이다. 투쟁은 생명의 본질이다. 물과 불, 누가 이겼나? 무승부이다. 바다가 용암의 홍수를 삼키고 냉각시켜 현무암으로 만들어버렸으니, 결국 불이 패배한 것인가? 아니다. 불은 바다 한 가운데서 용솟음쳐 올라 새로운 땅, 큰 섬 하나를 만들어 놓지 않았는가? 무승부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주는 술이다. 술을 마시면, 물이 이긴 것인가? 불이 이긴 것인가? 술은 물과 불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수불, 수불'하다 '술'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 술은 '불을 품은 물', '해를 품은 달'이다. 이젠 내 몸 속의 '불'을, '해'를 식혀야 할 때이다. 새로운 땅을 만들 시간이다.
동양 사상에서는 지(地)와 음(陰)의 가치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 중에 음과 양을 합하여 지칭할 때 '양음'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음양'이라 하여 음을 앞에 세우는 것도 그러한 예의 한 가지라 할 수 있다. 동양 사상은 기본적으로 땅의 사상이며 모성의 문화라는 것이다. 빈부라 하여 빈을 앞세우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화수미제"의 괘사는 "未濟亨 小狐汔濟 濡其尾 无攸利(미제 괘는 형통하다. 어린 여우가 강을 거의 다 건넜을 즈음 그 꼬리를 적신다. 이로울 바가 없다)‘이다. 꼬리를 적시고’, ‘이로울 바가 없으며’, 또 그렇기 때문에 ‘끝마치지 못한다’는 일련의 사실이 흥미롭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실수와 실수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한 실수가 있기에 그 실수를 거울 삼아 다시 시작하는 것이고, 끝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세상에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라고는 없다고 생각한다. 바람이든 강물이든 생명이든 밤낮이든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 있을 리 없다. 마칠 수가 없는 것이다. 세상에 완성이란 것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64개의 괘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이 미완성의 괘를 배치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비록 (모든 효가) 마땅한 위치를 얻지 못하였으나 강유(剛柔), 즉 음양이 서로 상응하고 있다는 것으로 끝맺고 있는 것도 매우 의미심장하다. '위(位)'와 '응(應)'을 설명하면서 비록 실위(失位)이더라도 '응(應)'이면 무구(無咎), 즉 허물이 없다고 했다. '위(位)'가 개체 단위의 관계론이라면 '응(應)'은 개체 간의 관계론으로 보다 상위의 관계론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실패한 사람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응(應)', 즉 인간관계를 디딤돌로 하여 재기하는 것이다. 작은 실수가 있고, 끝남이 없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는 상태 등등을 우리는 읽을 수 있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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